파리 36 (Faubourg 36, 2009) ☆☆1/2

 

서울 명동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5번 출구로 나온 후 중앙 우체국 방향으로 좀 걸어가다가 나오는 오른쪽 길모퉁이로 돌아가서 그 다음 좀만 가다가 나오는 작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걸어가면 99년부터 제가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한 음반 가게인 부루의 뜨락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주로 중고 CD들로 가득한 가운데 전 주로 쓸 만한 사운드트랙들이 있는지에 대해 집중했지만 구석진 곳에서는 중고 LP들도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는 여전히 듣기 좋은 것들도 있었을 것이고, 유행에서 벗어났지만 그래도 듣기 꽤 괜찮은 것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크리스토프 바라티에의 [파리 36]에 대한 제 주관적 감상은 후자에 가까웠습니다. 영화는 옛날 옛적 멜로드라마 영화들에 어울릴 법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가운데 그에 어울리는 복고풍 판타지 방식으로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파리를 화면 안에다 살려 놓았습니다. 진짜 그 시절을 재현하기 보다는 그 시대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낭만적 이미지를 살리는 것을 목표로 해서(아코디언 연주야 여기에 빠질 수 없습니다) 할 일을 다 했다는 점에서 보기 좋지만, 영화는 그 이상으로 나가서 현대 관객에게 닿지 않기 때문에 우린 그 멋진 모습을 단지 구경만 할 뿐입니다.

영화의 도입부 장면은 저에게 약간의 착각을 주었습니다. 영화 줄거리에 대해 대충만 알고 있던 저는 시작 후 몇 분 동안을 보면서 혹시 영화가 분주한 뒷무대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었습니다. 1935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은 가운데, 파리의 한 뮤직 홀 극장인 샹소니아의 사람들은 새해 전야 공연으로 분주하기 그지없고 무대 매니저인 피구알(제라르 쥐뇨)은 조명 조절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연자들을 통제하느라 바쁘기 그지없습니다. 여기서 뭔가 재미있는 일들이 나올 법 하지만 그들의 활기 찬 모습은 곧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채무 문제로 갈라피아(베르나르-피에르 도나쥬)에게 극장을 잃은 소유주가 그 날 저 세상으로 가는 걸 택했거든요.

그리하여 4개월 후, 피구알과 다른 극장 사람들의 사정은 많이 각박해졌습니다. 극장에서 무대 배우로 활동했던 그의 불충한 아내는 별 놀랄 것도 없이 그의 곁을 떠나 다른 부자 남편에게 가버렸고 그는 어린 아들 조조(막상스 페렝)과 함께 매일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가 경제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아들의 양육권이 아내에게 넘어가게 되는 일이 생기니 피구알에겐 돈벌이가 되는 일을 정말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그는 자키(칼 므라)와 미루(클로비스 코르니악) 등의 옛 동료들을 다시 끌어들인 가운데, 갈라피아의 허락을 받아 버려진 자신들의 극장을 다시 잘 정리해서 공연을 재개해서 관객들을 끌어 모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공연은 생각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갈라피아에게 넘어가서 간 극우파 모임에서는 갈라피아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람들 잘 웃기곤 하는 편인 흉내꾼 자키(카 므라)는 정작 뮤직 홀 공연 때는 썰렁한 반응을 얻을 따름이고, 다른 공연자들도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지요. 다행히도 극장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한 줄기 빛이 비쳐지는 데 그건 다름 아닌 생판 처음으로 파리로 상경한 젊은 아가씨인 두스(노라 아르네제데르)입니다. 우연히 갈라피아와 만나게 된 후 그의 주선으로 극장에서 공연자 소개를 담당하는데, 그의 생각대로 그녀는 정말 스타 기질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래 실력도 상당했지요. 그리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동안 그녀는 자본가인 갈라피아와 공산당원인 미루 사이에서 흔해 빠진 삼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이야기를 이 정도만 해도 그 옛날 영화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데, [파리 36]은 정말 그런 영화들 스타일을 충실히 따라갔습니다. 프라하에서 제작한 큰 규모의 세트들이 그 시절의 파리 거리를 대신하는 가운데 줄거리는 가볍게 돌아갑니다. 이야기상의 악당인 갈라피아도 성질이 나쁘긴 하지만 생각보다 불쾌한 인간은 아니고 미루가 참여하는 그 당시의 좌익 노동운동은 험악한 상황과 살짝 맞부딪히기만 하는 가운데, 이 인공적 배경 안에서 캐리커처에 가까운 캐릭터들이 알콩달콩하게 굴러가는 거지요.

올해 아카데미 주제가 상 후보에 오르기도 해서 영화는 관심을 받기도 했었는데 이야기 진행 동안 등장하는 여러 노래들은 강한 인상을 남기지 않지만 기분 좋은 인상을 남기고 노라 아르네제데르는 매력뿐만 아니라 노래 실력에서 점수를 많이 줄 만합니다. 그러나 전 영화 속의 공연에 관해서는 여러 모로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꾀죄죄하게 보였고 공연도 시원찮았던 뮤직홀이 이야기 후반에 가서 별안간 50년대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 레벨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벅스비 버클리 안무까지 시도하는 단계로 도약한다는 건 그리 믿기지 않는 발전이지요.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는 음악이 등장하지 않을 때는 생기가 떨어지곤 합니다. 영화 맨 처음에서 경찰서에서 형사에게 사실을 털어놓는 주인공을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기 하려고 하지만 정작 내러티브 형식은 기본적으로 그저 막을 내리고 열고 하는 걸 반복할 따르고 출생의 비밀 같은 뻔한 클리셰들을(이건 문제없습니다) 빤하게 사용합니다(이건 문제 있습니다). 무슨 갈등이 생기면 금방 해결되고 그에 이어 다음 갈등의 공연이 이어지고 그러다보니 각본은 얄팍한 캐릭터들에게 신경을 잘 쓰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간에 [파리 36]은 전체적으로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영화이고 여러 모로 좋은 구석들이 있습니다. 달콤함에도 불구 뒷맛이 부족하지만, 어쩌면 여러분들은 그 2% 부족한 거에 대해 그냥 기분 좋게 넘어가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P.S.

영화의 원제목 뜻은 영화의 무대인 ‘36 구역’, 다시 말해 ‘디스트릭트 36’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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