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둑들, 2012

2012.08.22 12:39

hermit 조회 수:3603

 

 

솔직히 말해 최동훈 감독은 각본을 굉장히 참신하다거나 논리적으로 쓰는 사람은 아니다. 탄탄한 원작이 있었던 타짜를 제외하면, 각본을 맡았던 중천, 전우치 등의 이야기 구조는 꽤 허술한 편이었고 데뷔작인 범죄의 구성도 관객마저 속여넘기는 기막힌 반전이나 치밀한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엄청난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일단 뻔한 이야기더라도 맛깔스럽게 풀어낼 줄 안다는 점이고 더욱 뛰어난 점은 배우들에게 강렬한 캐릭터를 부여해 적재적소에 써먹을 줄 안다는 것이다. 특히 배우들이 다른 작품에서 굳어진 이미지(백윤식의 여유있는 백전노장이라든지 염정아, 김혜수의 섹시한 팜므 파탈같은)를 차용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는 대신 오히려 그런 점들을 강렬한 매력으로 승화시키는 솜씨는 뛰어나다. 최동훈의 영화에서 배우들의 캐릭터는 항상 물 만난 고기처럼 뛰놀며, 몸에 딱 맞는 옷을 걸친 것처럼 자연스럽다.

 

초장부터 엉뚱한 소리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영화 도둑들의 매력이 상당부분 그의 장기인 캐릭터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국적을 뛰어넘어 각기 다른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급 카지노를 턴다... 뭐 카지노에서 현금 등이 아닌 다이아몬드를 턴다는 게 좀 이색적이긴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영화만 수십편일테고, 그 대표적인 영화는 "오션스 일레븐"일 것이다.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지만 눈이 휘둥그레지는 출연진과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는 캐릭터들, 화려한 볼거리로 눈호강하는 영화... 그리고 도둑들의 초중반부는 이런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이 영화의 출연진은 정말로 화려하고 또 캐릭터는 매력적이다.

 

마카오 박 역의 김윤석은 언제나 그렇듯 어떤 캐릭터든 완벽하게 소화해낸다.(송강호가 어떤 캐릭터든 송강호로 소화하는 능력이 있다면, 김윤석은 어떤 캐릭터든 완벽하게 변신해 녹아든다.) 건들건들하고 찌질한 뽀빠이 역의 이정재, 언니의 매력을 뽐내는 펩시 역의 김혜수, 누나들의 마음을 꽤 흔들어놓을 듯한 잠파노 역의 김수현 등도 자연스럽다.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 또는 깐깐한 시어머니 역할에서 벗어나 천연덕스러운 알콜의존증 사기꾼 씹던껌으로 변신한 김해숙은 새롭고, 앤드류 역의 오달수는 여전히 웃기다. 중국 팀에서도 첸 역의 임달화는 중년의 중후한 매력을 뿜어내며 줄리 역의 이심결은 섹시하면서도 이지적이다. 다만, 자니 역의 증국상 만큼은 왜 나왔는지 모를만큼 비중도 적고 카지노에서 도망친 이후엔 행방도 묘연하다(...후반부엔 감독이 이 캐릭터에 대해 아예 까먹지 않았나 싶은 의심마저 든다...-_-;;) 하지만 이 영화 최고의 캐릭터는 아무래도 예니콜의 전지현인데, 예니콜이란 캐릭터 자체가 오직 전지현을 위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뭐 알다시피 전지현은 애니콜의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고)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전지현은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지현은 섹시한 배우다. 프린터 광고로 데뷔해 테크노 댄스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순간부터 그녀는 섹시함의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연기력이 좋은 배우는 아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또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전지현은 배우를 가장한 광고모델이란 평가를 불식시키기 위함이었는지 시월애, 4인용 식탁, 슈퍼맨이라 불리운 사나이 등 진지한 드라마에 꾸준히 출연해왔지만 흥행이나 평 모두 좋지 못했으며, 결론적으로 이는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배우에게 물론 연기력은 중요한 것이지만, 때론 연기력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코난 시절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감정연기는 그저 눈 크게 뜨는 게 전부일만큼 형편없었지만, 그 어떤 배우가 그의 근육질 몸매가 뿜어내는 박력을 재현할 수 있을까? 결코 연기력이 좋다고 볼 수 없는 샤론 스톤이지만, 원초적 본능에서 치명적 매력을 발산하는 다리꼬는 장면에서 그 이상 어울리는 배우가 있었을까? 때론 몸 자체가 뛰어난 연기력을 대신하거나 또는 오히려 능가할 때도 있으며 전지현은 충분히 그런 장점을 가진 배우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최동훈 감독은 전지현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그녀를 돋보이게 만든다. 뭐 이 영화에서도 전지현의 연기력은 여전히 좋지 않다. 하지만 상관없다. 전지현은 그 누구도 대체하기 힘든 그녀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다. 그동안 전지현은 자신의 장점(섹시함)을 숨긴 채 단점(연기력)을 보완하려 급급했지만, 틀린 거였다. 전지현은 그저 자신의 장점을 펼쳐놓으면 되는 거였다. 그녀의 장점은 다른 모든 단점들을 티끌처럼 보이게 할만큼 거대하니까... 그녀가 이제서야 자신에 맞는 처방을 찾았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쓰다보니 배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뭐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빛나고 또 배우들이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적역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캐릭터에 비해 이야기 구조는 조금 아쉽다. 최동훈 감독이 애초에 치밀한 각본으로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또 이 영화에는 사실 두 편 분량의 이야기가 빼곡이 들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카오 박의 지휘 아래 한국과 중국에서 최고의 도둑들이 모여 카지노를 터는 부분까지는 영락없는 오션스 일레븐이다. 그런데 중반 이후, 다른 모두를 속이고 혼자 태양의 눈물을 손에 얻은 마카오 박이 웨이홍과 추격전을 벌이는 부분으로 오면 갑자기 영화가 본 시리즈로 바뀐다. 다양한 캐릭터들을 골고루 보여주며 유쾌한 분위기로 흘러가던 영화가 일순간 마카오 박을 주인공으로 한 긴박한 분위기의 액션물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단 135분 동안에 펼쳐진다. 이러다 보니 영화가 중반부 이후에는 진행이 빠르다 못해 숨넘어갈 지경이고, 일부 캐릭터들은 너무나 황당하게 중도 퇴장해버린다.(김수현의 퇴장도 안습이었지만 아예 잡혔는지 아닌지조차 안 나온 자니는 뭥미...=_=;;)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마카오 박은 '몸은 못 쓰지만 뛰어난 두뇌로 계획을 세우고 팀을 이끄는 리더'에서 '동료들 등쳐먹고 혼자 다이아몬드 챙겨 안전하게 튄 나쁜 놈'으로, 다시 '두뇌면 두뇌, 변장이면 변장, 금고열기면 금고 열기, 줄타기면 줄타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는 초만능에 지고지순 순정남'이라는 사기급 캐릭터로 변화를 거듭한다...=_=;; 뭐 작전 진행중에도 서로 등쳐먹을 생각만 하는 도둑놈들인데 애초에 무슨 의리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마카오 박이 그저 자신의 복수를 위해 동료들을 위험으로, 심지어 죽음으로 내몬 것은 명백한 사실인데(뽀빠이야 당해도 싸고 첸도 원죄가 있다지만 씹던껌은 무슨 죄...=_=) 죄책감 느끼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며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도 좀 그랬고... 사실 중반까지의 마카오박은 이탈리안 잡의 에드워드 노튼처럼 동료들 등쳐먹었다가 다시 모인 동료들에게 결국 크게 털리는 최종보스 포지션인데, 갑자기 이 캐릭터가 후반 선역으로 돌변해 홍콩 마피아와 리얼 액션물을 찍으니까 꽤 당황스럽다;;

 

그냥 한 영화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루는 대신 카지노 터는 이야기로만 쭉 밀고 나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후반부 이야기도 꽤 좋았고 특히 액션 시퀀스 등은 역대 한국영화 중 탑이라 꼽아도 될만큼 볼거리가 풍성했지만, 영화 전반부 분위기와 다소 동떨어진 건 사실이다. 또 한 영화에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루려다보니 전개가 급해지기 마련이고, 이는 이야기의 짜임새를 좀 약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부 캐릭터들은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허무하게 퇴장해버렸고...(특히 자니는 왜 나왔던 거야...=_=;;)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재미있다. 캐릭터들은 매력적이고 이야기는 다소 산만하지만 여전히 맛깔스럽다. 화려한 볼거리와 액션 시퀀스도 뛰어나고. 최동훈 감독의 차기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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