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5 03:51
코리아
(감동적으로 영화를 보셨다면 찬물 끼얹을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 특히 극화란게 창작의 영역이지만 종종 실화에 영감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는 영화들은 현실의 감동을 스크린으로 옮김으로서 재현/극대화 하려는 경우가 많지요.
이런 영화를 볼때에 늘 양가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순수하게 이야기에 감동하면서도 내심 진짜로 저런 일이 있었다는 거야라며 의심하게 되는 거지요. 제작자의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영화화가 논의 될 정도의 사건이라면 그 자체로도 극적인 의미나 감동이 크기 마련이지만 이걸 막상 영화라는 틀에 맞추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각색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현실 그대로 옮길 거 같으면 차라리 자료필름 가져다가 다큐를 만드는 게 더 실용적일 테니까요.
그걸 나쁘다고 생각할 순 없어요. 관객들 입장에서도 고증에만 철저하게 치중해서 건조할 정도로 리얼한 영화는 그리 달갑지 않을 겁니다. 특히나 스포츠 영화라면 이미 원안이 된 역사적 경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본 관객들이 많을 테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경기의 명장면이나 감동을 재현하고 싶지만 동시에 그때랑 똑같은 장면이 아니라 보다 극적으로 다듬어지고 고양된 무언가를 기대하게 된기 마련인거죠.
코리아는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분단후 최초로 결성된 남북단일팀이 출전하여 여자단체에서 우승을 하기까지했던 역사적 기록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영화를 살필 수 있겠지만 실제사건의 극화를 위한 '각색'이란 지점에서 영화를 살펴볼까 합니다.
1. 캐스팅
역사적 복식조인 현정화-리분희에는 하지원과 배두나가 캐스팅 되었습니다. 실제 인물과 얼마나 닮았느냐는 관점에서 본다면 영 아니올시다죠. 이미지 자체가 너무 달라요. 그렇다고 굳이 닮은 꼴 배우를 캐스팅하거나 특수분장을 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그런 캐스팅 시도로 인한 리스크가 너무 크기도 하거니와 그리 중요하지도 않지요. 그보다는 얼마나 실감나는 탁구경기 장면을 재현하느냐가 극적 긴장감을 위해 더 중요한 영화니까요. 영화의 중심은 '남북단일팀 우승'이란 사건이지 현정화나 리분희의 전기영화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프로페셔널인 두 배우의 캐스팅은 좋아요. 연기력도 검증되었고 특히나 하지원 같은 경우엔 역할에 몰입하기 위한 신체훈련에 철저하기로 알려지기도 했고요. 화면 속 경기장면은 꽤나 실감납니다. 비전문가 입장에서 보기엔 얘네들이 여기서 공갈탁구 하고 있구나란 생각은 들지 않아요. 드라마 부분에서의 연기야 기본은 먹고 가는 배우들이고요.
아쉬운 점이라면 하지원이 연기한 현정화입니다. 어릴적 TV를 통해 본 경기장면에서의 현정화는 '포커페이스'였어요. 적어도 경기 중에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육체적 능력만큼이나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한 탁구 경기이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무표정하게 경기를 끝내고 나서야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게 현정화의 이미지였어요. 하지원의 현정화는 그보다 감정적입니다. 상황에 따라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나고 눈물까지 보이죠, 실제 경기였다면 감정적으로 흔들려 경기를 망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영화적 재미와 감동을 생각하면 넘어갈 만한 부분입니다.
덩야핑의 캐스팅은 재미있는데 실재의 덩야핑은 '마녀'란 별명을 들은 건 사실이지만 150cm의 아담한 체구에 순박하게 생긴 사람입니다. (경기중 매서운 눈매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게다가 당시 18세로서 중국팀내에서 에이스이긴 하지만 동료선수들 꼬리에 매달고 여왕벌 노릇한 짬은 아니었어요. 경기전 인터뷰에서도 "코리아선수들을 꺾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길 수 있는 상대들,현의 평범한 서브와 리의 약한체력 등이 취약점"이라 평가하면서 겸손하면서도 냉철한 답변을 했더군요.
2. 거짓말
요즘 세상이 좋다보니 21년전 (하아.. 벌써 그렇게 오래 되었나요?) 신문 기사도 클릭 몇 번이면 검색이 됩니다. 그래서 당시 지바 탁구선수권대회 관련 기사와 경기 결과들을 살펴봤는데요. 영화에서 그려진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극적 재미를 위해서라지만 이건 결과를 제외하곤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가져다 붙여 놨어요.
일단 한국 선수들이 이 경기 전까지 중국에 계속 말린 건 아닙니다. 특히 여자복식에선 북경아시안게임, 서울복식컵 대회에서 현정화,홍차옥 조에 중국 팀이 연패하였다는 기록도 있어요.
그럼 본경기로 들어가 볼까요? 영화에서 코리아팀은 프랑스와의 첫 경기에서 손발이 맞지 않아 허덕이는 모습을 보이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3대0 완승이었고 심지어 경기 시간도 75분으로 짧았어요. 아주 사뿐이 즈려밟았던 거죠. 게다가 영화에서와는 달리 현정화 리분희 복식은 첫 경기부터 선보였답니다.
다음으로 유순복에 대해서, 영화에선 루키이자 국제대회 첫 출전인 유순복이 큰무대에 대한 공포증으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실제로 경기 3인차 처음 출전한 유순복은 일본팀을 상대로 100% 실력을 발휘하며 당시 체력문제로 난조를 보이던 리분희의 공백을 메웠다고 기록되어 있더군요.
영화에서 가장 큰 갈등이자 난관은 북한팀의 일방적 철수로 인해 한국선수만 출전한 준결승이었습니다. 중국과의 경기를 눈앞에 두고 팀 자체가 파토가 나게 생긴 거지요. 진짜로 이런 사건이 있었을까요? 적어도 기록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헝가리를 상대로 한 준결승전에선 남북선수 모두 출전해 완승을 거두었어요. 한 가지 걸리는 건 준준결승인 소련전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건데 영화에서 그린 사건이 이 시점에 벌어졌고 국내여론을 생각해 보도통제가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해볼 수 있겠네요.
대망의 결승전은 영화에서처럼 치열했습니다. 3-2로 마지막 경기까지 접전을 벌인 끝에 극적으로 우승을 했죠.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현정화나 현-리 콤비가 대활약을 벌인 건 아닙니다. 영화에서 2번의 패배는 홍차옥, 리분희에 의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정작 현실에선 현정화가 단식에서, 그리고 현정화 리분희 콤비가 복식에서 패배를 했어요. (심지어 현정화는 단식에서 0-2 완패를 당했네요) 정작 팀을 구한건 두 번의 단식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유순복이었어요.
어때요? 이쯤되면 좀 심하다 싶죠. 영어로 표현하자면 코리아는 BASED ON TRUESTORY라기 보다는 INSPIRED BY TRUESTORY에 가까워요.
3. 각색의 의미
앞서 실화의 영화화에서 극적 재미를 위한 각색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부분에 긍정적인 편이에요. 2번 항목에서 영화가 현실의 기록을 심하게 바꾼 것을 투덜거렸지만 그것을 통해 극적 재미와 감동을 준다면 괜찮지 않은가 하는 편이죠. 다시 말하지만 다큐 찍자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건 '유순복' 선수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을 꼽자면 현정화도 리분희도 아닌 유순복이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이미 이룰만큼 이루고 '파이팅'으로 경기공포증까지 이겨낸 완성체 현정화의 승리는 당연한 것처럼 보여요.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리분희도 마찬가지고요. 이들이 어려운 가정사나 건강상 문제 같은 걸 들먹여도 그러려니 하는 거죠. 하지만 유순복 파트는 전형적인 성장스토리로 스포츠를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 가장 인기있는 유형의 캐릭터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한계에 좌절하고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경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성장하여 결국 막판에 진가를 발휘하는 캐릭터... 이거 딱 주인공 감 아닌가요? 실화에서도 마지막 결승전의 주인공은 혼자서 2승을 챙긴 유순복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다음으로 좋았던 부분은 현정화의 반지에 얽힌 사연입니다. 좀 오글거리게 만들고 막판에 과잉이 있긴 했지만 그 반지가 상징하는 부분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와 일치하는 순간 꽤 가슴을 울리더라고요.
반면에 홍차옥과 북한 남선수(이름도 기억나지 않네요..-_-)의 러브스토리나, 북한팀의 철수로 인한 빗속에서의 오바질은 별로였어요. 전자는 시간때우기용이 분명해 보이고 후자는... 그런 갈등이 단일팀이라는 상황 속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오바하고 오글거리게 표현해서 오히려 감동을 감소시켰다는 느낌이 강해서지요. 갈등 자체는 필요해보이고 수긍가는데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이 쌍팔년도 청소년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하잖아요? 특히나 선수단 감독과 북한 장교의 장면은... 아흐... 실지로 저런 일이 있더라도 절대 저런 식은 아니란 거 아는데 그런 식으로... 아흑. 짐작컨데 현실이었다면 둘이서 술잔 기울이며 언제쯤 선수들 내보내야 될지 타이밍 재고 있었을 거라고요!
가장 감동적이어야할 결승장면이나 좀 늘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너희들을 울려주마'라고 작정한 듯한 선수단 이별 장면에서 무감동했던 이유가 후자의 지나친 각색 때문이었어요. 불필요하거나 오바스런 쌍팔년 감성은 영화 속 표현을 빌자면 '촌스럽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 근자에 재밌게 봤던 실화바탕의 영화 두 편이 생각나더군요. '블라인드 사이드'와 '언터처블 2%의 우정'이요. 두 영화 모두 갈등이 고조되는 지점에서 감정의 과잉이나 오버질이란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매끈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며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이는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좋은 평가로 이어졌고요. 지금의 코리아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부분에서 조금만 더 쿨했다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크네요.
그 외
마지막 결승 장면에서 배경이 암전되고 탁구대와 선수들만이 남는 순간이 그려지는데요. 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진짜 시야는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상대선수와 공만 보이는 거죠. 이런 연출은 쿠보즈카 요스케가 출연했떤 핑퐁이란 일본영화에서 이미 본 적이 있었는데요 탁구경기를 표현하기에 더 없이 좋은 방식인 거 같습니다. 좀 뻔하긴 하지만요.
영화에서 탁구 경기 자체의 갈등이나 극적요소를 그리는 부분이 너무 개인사나 감정적 요인에 치중해서 아쉬웠어요. 그러다보니 중국팀은 전형적 악당캐릭터로 그려지기도 했고.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전문적인 요소들을 살렸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앞서 말한 '핑퐁'이란 영화에선 서로 다른 스타일의 탁구를 구사하는 선수를 대조하면 경기와 인물의 개성을 일치시켜 극적 재미로 승화시키는 라인이 있는데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홍차옥의 다리 부상을 중국선수가 집중 공략하는 모습을 그린다거나, 현-리 콤비가 자신들의 포지션을 이용해 상대를 속이는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좀 더 잔재미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유순복 얘기를 자꾸 하게 되는데 역할을 연기한 배우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한예리라는 배우고 84년생으로 2007년부터 활동했네요. 왜 이제서야 이런 배우를 알게 되었나 싶을 정도로 빛나는 배우에요. 개성있는 외모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선수단 중에서 가장 리얼하다고 해야 할까. 정말 역할에 몰입해 있구나 느끼는 순간들이 많더라고요. 똘망똘망한 모습에 반해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지바대회의 공인구는 '오렌지색'이랍니다. 왜 흰색공을 등장시킨 걸까요, 고증을 안 한 건지 아님 경기장면 CG처리 하는게 흰쪽이 더 편했던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