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1995)는 작화, 연출, 주제의식에 이르기까지 재패니메이션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설 중 하나로 꼽힙니다. 특히 화려한 작화와 오시이 마모루 특유의 철학적 사유(라기보다는 철학적 후까시라는 게 더 정확해보이긴 합니다만;;)는 비단 일본 뿐 아니라 전세계의 서브 컬쳐 팬덤을 열광시키며 이후 매트릭스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죠. 물론 공각기동대와 여타 일본 사이버펑크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지만(하긴 블레이드 러너 이후의 SF 중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공각기동대는 단순한 모방이나 재해석을 넘어 한발 더 나아가고 오히려 종주국인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 합니다. 마치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을 모방하며 시작된 영국의 락이 이후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 등 더욱 뛰어난 밴드들을 배출하며 오히려 락의 종주국이던 미국을 휩쓸고 영향을 준 브리티쉬 인베이전에 비할만한 사건이었죠. 이는 단순히 오시이 마모루라는 한명의 걸출한 기인이 만들어낸 기적이라기보다는 이전부터 오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아키라(Akira, 1988)' 등을 통해 오랜 기간 축적된, 사이버 펑크 장르만큼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과 그에 걸맞는 장인정신이 융합하여 빚어낸 대폭발로 보는게 맞겠죠. 


공각기동대는 사실 시로우 마사무네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합니다. 시로우 마사무네는 '애플시드'의 원작자이기도 하고 그 역시 사이버 펑크 장르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인사지만,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는 마사무네의 원작을 거의 골격만 남기고 통째로 들어내 그의 색깔대로 채워놓은, 거의 재창작에 가까운 작품이라 원작과는 꽤 차이가 있는 편입니다. 


사실 공각기동대 원작은 그렇게까지 유명하다거나 걸작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오히려 마사무네의 대표작이라면 애플 시드를 꼽는 사람들이 더 많죠. 뭐 애초에 공각기동대는 애플 시드의 외전이 아닐까 생각해도 무방할만큼 애플 시드에서 그대로 가져온 요소들이 많아 독창성 면에서 그리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점도 있고요.  그리고 사실 그리 무거운 작품도 아닙니다. 마사무네판 공각기동대의 무게감은 동시대 다른 사이버펑크물인 더티 페어라든지 버블검 크라이시스... 딱 그정도입니다. 폄하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가 그렇다는 거에요. 곳곳에서 아이디어가 번뜩이고 꽤 철학적인 논쟁거리를 던지기도 하지만, 본바탕은 유쾌한 분위기의 소년만화죠. 마사무네판 공각기동대에서는 개그스러운 장면들도 상당히 많이 등장하며, 오히려 분위기를 따지자면 더티 페어와 동급이고 버블검 크라이시스가 더 무거울 정도입니다. ...이걸 재패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음울한 분위기로 뒤바꿔버린 오시이 마모루의 패기란...=_=;;




오시이 마모루판의 쿠사나기 모토코. 절대로 웃을 것 같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의 얼음여왕님이죠.




하지만 시로우 마사무네판의 모토코는 사실 꽤나 다혈질 + 무대뽀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웃기도 잘 웃고 화도 잘 내요.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소령. 심지어는 과장 뒤에서 "빌어먹을 늙은이가!!" 따위를 내뱉으며 투덜투덜하다가 과장이 멈춰서서 째려보니까 "꺄하하하 >_< 살펴 들어가시라고요. 데헷~" 하는 태도를 보일 때도 있다죠.



오시이 마모루 판에서는 과묵함 + 중년의 매력을 마구마구 뿜어내는 바트지만...



...아직까진 마사무네 판도 별 차이가 없어보인다고요?



마사무네 판에선 시덥잖은 농담을 늘어놓는 수다쟁이 + 모토코에게 실없는 소리 하다 맞을 때가 다반사인 캐릭터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토구사 놀리려고 일부러 턱시도 빼입고는 꽃 들고 찾아오는 센스까지...;;



아마라기 국장은 여전히 음흉한 인물이지만 역시 마사무네판의 캐릭터가 좀 더 유쾌합니다. 외모는 영락없는 캇파고요...=_=;;


어쩄든 이렇듯이 오시이 마모루 판과 시로우 마사무네 판은 꽤 많은 면에서 차이나며 특히 인물의 성격은 오시이 마모루가 제멋대로 뒤바꿔버렸다고 해도 할말 없을만큼 많이 다릅니다. 오시이 마모루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인형사' 사건이라든지 많은 장면들을 원작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왔음에도, 그 분위기와 뉘앙스는 확연히 다르죠. 


...정작 리뷰하려는 작품은 SAC인데 엉뚱한 소리가 너무 길었군요.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일단 시로우 마사무네 원작과 오시이 마모루 극장판을 소개;; 그럼 이제 본격적인 SAC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공각기동대 : 스탠드 얼론 컴플렉스(Ghost in the Shell : Stand Alone Complex, 이하 SAC)는 프로덕션 I.G. 제작, 카미야마 켄지 감독으로 2002년 26부작으로 방영된 TV 시리즈입니다. 이후 2기로 역시 26화 분량인 GIG, 그리고 105분 짜리 단편인 Solid State Society로 이어지게 됩니다. 


사실 SAC가 처음 나온다는 소리가 들렸을 때 많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습니다. 왜냐면 오시시 마모루 덕분에 공각기동대란 작품이 갖는 무게감이 너무나도 커져버렸기 때문이죠.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는 아이디어와 주제의식, 액션과 개그, 심지어 섹시한 코드까지 적당히 결합된 흥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TV 애니메이션이나 OVA로 만들기 꽤 괜찮은 녀석이었죠. 하지만 오시시 마모루는 과감한 재해석과 거의 충격적인 비주얼을 통해 이 작품을 재패니메이션의 살아있는 전설, 가장 철학적인 애니메이션의 경지로 격상시켜버렸고, 7년만에 그 후속작을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는 것은 마모루 판의 그 엄청난 무게와 높아질대로 높아진 팬들의 기대가 결합된 중압감을 먼저 버텨내야 한다는 의미였죠. 


잘해야 본전이고 까딱 잘못했다간 전설에 누를 끼쳤다며 외면당할 것이 뻔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SAC가 택한 길은 결국 마사무네 판과도, 마모루 판과도 선을 긋고 독자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제 3의 길이었습니다. 마사무네 판과 마모루 판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주제와도 밀접하게 연관이 있던 인형사 에피소드를 아예 삭제하고 '인형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펼쳐지는 패러렐 월드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양쪽 모두와 선긋기에 나선 거죠. 원작이 11화에 불과한 분량이라 마사무네 판 원작을 그대로 따르기도 어렵고, 마모루 판의 이야기를 이어받는다는 건 더욱 어불성설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선언에도 불과하고 SAC는 어쩔 수 없이 오시이 마모루의 짙은 그늘 아래 있긴 합니다. 제작사인 프로덕션 I.G.부터가 오시이 마모루와 뗼레야 뗄 수 없는 관계란 점도 있고, 또 마모루 판이 워낙 전설이 되어버린 터라 이를 무시하기엔 너무 버거웠던 거죠. 전형적인 80~90년대 소년만화 풍인 마사무네 판 대신 마모루 판의 실사체 화풍을 사용한 점이라든지, 여전히 냉정한 모토코의 캐릭터 등은 마모루 판의 영향이 뚜렸합니다. 반면 마사무네 판 원작과의 접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은근슬쩍 드러내는 모토코의 레즈비언 설정(사실 마사무네 판에서의 모토코는 비번 때 2명의 여자친구와 함께 화끈한 사이버 섹스를 즐기는 면모도...=_=;;)이나 타치코마의 개그 등이 이런 부분이죠. 물론 마사무네 판과 마모루 판을 둘 다 안고 가려다 삐걱대는 부분도 있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모두 평범한 아저씨 패션인데 나홀로 가슴과 엉덩이가 반쯤 드러난 하이레그 원피스 수영복 패션으로 활보하는 모토코의 모습은 이 삐걱거림의 좋은 예죠;;


SAC는 결국 애초 선언만큼 독자적인 길을 가진 못합니다. 만만찮은 컬트 팬덤을 보유한 마사무네판과 전설이 되어버린 마모루판을 모두 무시하고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나가겠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고, 어쩔 수 없이 마사무네의 색깔과 마모루의 색깔, 그리고 SAC 고유의 색깔 사이에서 미묘한 타협이 이루어집니다. 이 불가피한 타협으로 인해 SAC는 초반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못잡은 듯 어정쩡한 모습을 노출하기도 하죠.


하지만 이는 오래 가지 않으며, SAC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이 지점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SAC는 전설적인 두 원작의 엄청난 중압감을 버텨낼 뿐 아니라 오히려 점점 이겨내고 자신만의 선연한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후반부 이야기에는 굉장한 힘이 붙습니다.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전뇌가 일상화된 미래에 대해 많은 가능성을 던졌던 마사무네의 원작이나 마사무네가 던진 의문을 생명과 존재에 대한 사유로 확장시켰던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을 단순 변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새로이 '관계성'과 '자아'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내며 새로운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저력을 보여줍니다. 


특히 타치코마 관련 에피소드는 SAC가 단순히 두 원작에 기대어 편승하려는 얄팍한 작품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특히 두 원작의 주요인물인 인형사가 애초에 해킹을 위해 만들어진 초고성능의 인공지능이며 네트워크를 통한 수많은 정보 축적을 통해 '고스트'를 획득한데 비해(이녀석은 처음부터 스펙이 좋은 원래 난 놈으로 볼 수 있죠), SAC의 타치코마는 애초에 서포트를 위해 제작된, 그다지 고성능의 인공지능이 아님에도(오퍼레이터를 간단히 말로 찜쪄먹는 걸 보면 성능이 낮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만;;) 경험의 집단공유 과정에서 각기 개별화된 '개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에서 원작만큼이나 묵직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정보의 흐름 속에 매몰되어 자신의 모습을 잃은 채 오리지널 없는 카피가 되어버리거나, 이에 대한 반동으로 소통을 거부한 채 자신 속에 틀어박힌 인간의 모습과 모든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지니게 되고 더 나아가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자아'의 경지에 이르게 된 타치코마의 대비는 SAC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장면이죠. 어떤 의미에서 보면 타치코마야말로 SAC의 진주인공입니다. 


앞서 길게 설명한 것처럼 SAC는 처음부터 어려운 길이 예고되어있던 작품입니다. 전설이 되어버린 두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색깔 역시 보여줘야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놀랍게도 SAC는 이 불가능해보였던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냅니다. 두 원작의 카피나 믹스가 되는 대신 새로운 해석을 통해 독자적인 경지에 오른 거죠. TV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제한된 예산 및 환경과 시청률 등 외풍 속에서 이루어낸 것이란 점을 고려하면 SAC의 성과는 더욱 빛납니다. SAC는 충분히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정말 좋은 작품입니다. 그리고 마사무네판의 팬이든, 마모루판의 팬이든 선배들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돌직구를 뿌리며 정면승부를 거는 이 후배의 우직함이 마음에 드실 겁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2949
442 [라이프 오브 파이] 힌두신화로 해석하는 호랑이의 모험 (스포일러 有) [1] [15] 또롱또롱 2013.02.24 9521
441 [헨젤과 그레텔_마녀사냥꾼] 아무 생각없이 즐길수 있는 좀 지나친 폭력액션! [2] bytheway 2013.02.22 2396
440 [영화] 더 헌트, 거짓과 진실의 싸움... 그 승자는? [2] booak 2013.02.22 2301
439 [콘서트] 볼티모어 심퍼니 오케스트라 - 스트랫모어 홀 2013년 2월 16일. [1] [3] 베베른 2013.02.21 2127
438 [영화] 람보(First Blood, 1982) [5] [401] hermit 2013.02.18 7909
437 [영화] 로보캅(RoboCop, 1987) [17] [2] hermit 2013.02.14 4384
436 [콘서트] 크리스티안 베자위덴하우트 2013년 2월 10일. [22] 베베른 2013.02.13 4310
435 [영화] 저지 드레드 3D(Dredd 3D, 2012) [22] hermit 2013.02.10 4661
434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Music & Lyrics, 2007) ~ 영상 추가 [2] [201] hermit 2013.02.07 5712
433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4] [28] hermit 2013.02.04 6264
432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 The Dark Knight Rises (뒷북 리뷰, 스포일러는 후반부에 모아놓음) [7] [33] Q 2013.02.03 6480
431 [영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2012) 떡밥에 대한 상상의 나래들 [2] [29] hermit 2013.02.02 5897
430 [영화] 7번방의 선물, 아름다운 아버지와 착한 어린 딸의 아름다운 이야기 [2] [14] booak 2013.01.25 4945
429 [드라마] 마지막 승부 [2] [3] 감동 2013.01.23 3628
428 [소설]심플 플랜 [3] [1] overwinter 2013.01.19 3188
427 [영화] 더 헌트 [3] [1] menaceT 2013.01.19 3401
426 [영화] 종교와 이성의 싸움, 라이프 오브 파이 [11] booak 2013.01.18 3353
425 [영화] 야만인 코난(Conan the Barbarian, 1983) [1] [2] hermit 2013.01.16 3566
424 [애니] 주먹왕 랄프(Wreck-it, Ralph, 2012) [2] [3] hermit 2013.01.16 4079
423 [드라마] 다섯 손가락 [1] 감동 2013.01.15 364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