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인생이란 무엇이냐?"

 

"준마를 타고 사냥매를 팔에 올린 채 머리를 휘날리며 황야를 달리는 것입니다."

 

"틀렸다! 코난, 인생이란 무엇이냐?"

 

"적을 부수고, 그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여자의 비명을 듣는 것입니다."

 

"바로 그거다!"

 

영화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아주 간단하게나마 세계관을 먼저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듀게 분들이라면 대부분 아시겠지만, 코난은 요절한 작가 로버트 E. 하워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캐릭터입니다. 로버트 E. 하워드는 공포소설의 거장이자 크틀루 신화로 유명한 H.P. 러브크래프트와도 각별한 사이였으며, 코난의 무대가 되는 하이보리아(Hyboria) 세계 역시 크틀루 신화 세계관의 일부죠.(그러나 두 세계관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적은 편입니다. 수억년을 넘나드는 크틀루 신화 역사에서 20,000여 년에 불과한 하이보리아 시기는 극히 짧은 시기이기도 하고요) 하이보리아는 B.C. 15,000년 경 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가 가라앉은 뒤 새롭게 생겨난 가상의 대륙이며 고대문명이 사라진 뒤 초기 철기시대로 회귀한 야만의 땅입니다. 코난은 이 하이보리아 세계관의 중요 인물 중 하나이며 B.C. 10,000년 경 시메리아(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태어나 전사이자 도적, 용병으로 대륙 각처를 전전하다 나중에는 아퀼로니아의 왕까지 오르는 인물입니다. (mmorpg 게임 '에이지 오브 코난'의 배경이 바로 코난이 왕이던 시절입니다. 왕에는 올랐지만 용병&도둑시절 대륙각처에서 벌여놓은 사건이 많아 대부분의 주변국가와 적대상태 + 부패한 아퀼로니아 귀족 구파세력의 음모 + 남쪽 스키티아에선 사교세력 부활까지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 물론 킹 코난께서는 '까짓거 전부 깨부수면 그만아니냐'라는 사내다운 호방함을 견지하시기에 밑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개고생;;)

 

어쨌든 코난은 J.R.R. 톨킨의 반지의 군주와 함께 판타지 소설의 조상 격에 해당되는 작품인데 다른 판타지 작품들과 비교해서 코난이 갖는 가장 큰 차별성은 그가 고결하지도 심지어 도덕적이지도 않은 인물이란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코난에게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대의명분이나 남의 눈치 살피는 예절 따위는 없습니다. 코난은 그저 보물이 있으면 훔치고, 술이 있으면 마시고, 여자가 있으면 취하며, 적이 있으면 죽이는... 지극히 욕망에 충실한 근육질의 야만인이며, 그가 보여주는 이런 원초적인 야만성과 탈도덕성은 현실에서 결코 이룰 수 없는 수컷들의 욕망을 대리충족시키죠. 그리고 이런 코난을 존 밀리어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당시 최고의 보디빌더였던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주연으로 발탁해 영화화한 것이 본작입니다.

 

존 밀리어스 감독은 코난을 80년대 양산된 하이틴 취향의 판타지 액션영화-'비스트 마스터'나 '스워드' 등의-로 만드는 대신, 고전사극을 연상시키는 투박한 정공법으로 웅장한 분위기의 서사시로 창조합니다. 사실 스토리 라인은 전형적인 복수극으로 꽤나 단순한 편이며 치밀한 개연성도 많이 부족합니다. 액션 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기이하리만치 대사마저 적습니다.(영화 중 등장하는 모든 대사를 옮겨적어도 a4 용지 두세장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배우들 역시 털사 둠 역의 제임스 얼 존스 정도를 제외하면 주연급조차 대부분 신인이며 기본적인 대사처리조차 서투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화면을 가득 메운 광활한 배경에서 터질듯한 근육의 사내들이 뿜어내는 마초적인 야성미와 압도적으로 장중한 음악(코난의 영화음악은 정말로 뛰어납니다. 정말 음악만 들어도 가슴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은 이런 단점 따위를 티끌처럼 보이게 하며, 아놀드의 딱딱하기 그지없는 억양조차 지극히 야만인스러운 리얼리티로 승화시키는 마법을 선보입니다. 영화의 액션장면 역시 분량도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날렵하다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오히려 그 투박함이 작품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잊지 못할 강렬함을 주죠.

 

코난은 투박합니다. 투박하며 무겁습니다. 투박하며 무거운데다 마초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결코 우스꽝스럽지는 않습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이 장중한 투박함은 어느새 보는 사람마저 질려버리게 만들며 심지어는 그 꿋꿋함에 경탄하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요즘의 가볍기 짝이 없는, 그리고 "세련된" 판타지 영화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매력이죠.

 

p.s. 1. 스탭 중에는 밀리어스 감독 외에도 각본에 참여한 또 다른 거장 "올리버 스톤"이 눈에 띕니다. 올리버 스톤은 애초 코난의 각본을 쓸 때 수천의 병사들이 수백의 괴물과 싸우는 거대한 규모의 전쟁 판타지를 계획했지만, 영화의 노선이 리얼리티 쪽으로 잡히며 결국 이 계획은 폐기. 만약 이 계획대로 되었다면 코난은 어쩌면 80년대판 반지의 제왕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뭐 대신 우리가 알고 있는 투박한 리얼리티의 이 작품은 없었겠지만요... 언젠가 발전한 CG기술의 힘을 빌러 올리버 스톤의 이 각본을 영화화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p.s. 2. 로버트 로드리게즈 제작의 코난 더 바바리안 2011은 거대한 똥이었습니다...-_- 어째 레드 소냐 영화화가 무산되며 갑자기 코난 리메이크로 계획이 바뀌고, 로버트 로드리게즈도 감독에서 제작으로 물러날 때부터 불안하더니 이런 졸작이 나올 줄이야... 애초에 원작의 투박한 웅장함을 고스란히 재현해주길 바란 건 아니었고, 영화에서 지나치게 리얼한 방향으로 리파인되었던 코난 대신 원작이나 코믹스 기반의 다소 판타지스러운 또다른 코난을 볼 수 있길 바랬는데 결론은 이도 저도 아님. 분위기는 가볍고 굉장한 스케일이 있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액션조차 형편없었습니다. 화끈하게 판타지로 갈 것이나 아니면 리얼하게 갈것이냐 고민하다 최악의 어설픈 결과물이 나와버린 느낌이랄까요. 주연배우인 제이슨 모모아는 몸만 끝내주게(하지만 정말로 끝내주게) 좋았던 아놀드에 비해 훨씬 무술 액션이 되는 배우이고(사실 소설 원작의 코난이 갈색 피부와 검은 머리이니 오히려 더 원작에 가까운 외모이기도 하고요) 영화의 시작도 잘 흘러갔는데 좋은 소재와 재료를 가지고도 이리 말아먹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p.s. 3. 인기있는 코믹스 캐릭터인(사실 코난이 널리 알려진 건 원작소설보다 마블사의 코믹스 덕분. 레드 소냐도 마찬가지죠.) 코난의 영화화 소식을 접한 미국 굴지의 완구업체 하스브로는 발빠르게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고 코난 완구생산에 돌입합니다. 그러나 막상 발매를 앞두고 영화 완성본 필름을 받은 하스브로는 경악하게 되는데, 이유는 영화가 그들의 기대와 너무도 달랐기 때문. 하스브로는 "당연히" 착한 주인공이 악당과 싸워 미녀를 구출하는, PG-13이나 NC-17 등급의 가족용 판타지 액션 영화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 영화는 건조하고 투박할 뿐 아니라 화면 가득 살색과 유혈이 낭자한 R등급 영화였던 거죠...=_=;; 이딴 영화 완구가 애들에게 팔릴리가 없다는 걸 깨달은 하스브로는 뒤늦게 코난 완구를 취소하려 하지만 이미 금형이 완성되고 시제품까지 나온 상황. 다급해진 하스브로는 궁여지책으로 코난 완구의 머리색을 금발로 바꾸고 소품 디자인을 약간 바꾸어 내놓게 되는데 이렇게 탄생한 캐릭터가 바로 30대에겐 추억이 아련한 '우주의 왕자 히-맨'입니다...-_-;;

 

p.s. 3-1. 하스브로에서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히-맨(He-man, '그남자'라니 이 얼마나 무성의한 작명입니까;;)이지만 의외로 역시 급조된 T.V. 애니메이션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히트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 돌프 룬드그린 주연의 실사영화화도 되지만 이건 흑역사로 취급;; 히맨의 인기에 힘입어 나중에는 자매품(아니 남매품?-_-;) 쉬라(She-ra)도 나오게 됩니다. 코난 짝퉁이었던 히-맨과 달리 쉬-라는 레드소냐 짝퉁이 아닌 오리지널 캐릭터였으며, 80년대까지만 해도 흔치 않았던 여성 액션히어로(게다가 단독주연!)라는 희소성으로 인해 지금도 꽤나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흔히 '싸우는 마법소녀물'의 원조로 세일러 문이 꼽히지만, 굳이 따지자면 쉬-라가 원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외모는 별로 안 그래보이지만 쉬-라도 엄연한 틴에이지 소녀라는;;

 

p.s. 3-2. 코난 영화를 통해 제대로 엿먹은(아니 엿먹을 뻔한) 하스브로는 영화를 스폰할 때 온전히 감독의 손에 맡겨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후 '나도 돈 낸만큼 지분을 행사하겠다!'며 영화 캐릭터와 스토리까지 시시콜콜 간섭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며, 그 결과물이 바로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배틀십'이죠...=_=;; 마이클 베이 감독이 3편에서 정작 주연이 되어야할 오토봇들은 엿먹이고 미군홍보물을 찍어버린 것도 이런 간섭에 짜증났기 때문이라는 카더라통신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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