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

2012.08.30 09:18

menaceT 조회 수:3009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베인과 미란다 테이트의 비밀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토록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베인이 사실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고통을 감소시키는 마스크를 쓴 채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고, 탈리아라는 여자가 배트맨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라즈 알 굴의 과업을 완성시키기 위해 미란다 테이트라는 가면을 쓰고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해 왔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복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혹자는 그 장면에서 베인이라는 캐릭터가 완전히 무너지고 영화가 전체적으로 이상해졌다고까지 이야기할 정도이다. 그 반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선적으로 확인하는 데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베인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마스크를 쓰고 나섰고 탈리아는 아버지의 과업을 완성시키기 위해 미란다라는 가면을 쓰고 나섰다는 점에서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진다면, 그건 아마도 이들의 그러한 점이 ‘배트맨 비긴즈’에서의 브루스 웨인의 모습과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그는 부모님을 쏴 죽인 살인자를 제 손으로 죽이려 한다. 그런 그에게 레이첼은 예전의 브루스가 아닌 것 같다고 나무라며 고담의 현실을 보여주고, 이에 각성한 브루스는 오랜 방황 끝에 라즈 알 굴 밑에서 훈련을 받고 고담으로 돌아와 배트맨이 된다. 그가 배트맨이 된 것은 고담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과업을 잇는 행위이며, 동시에 사랑하는 여인인 레이첼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즉,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베인과 탈리아는 ‘배트맨 비긴즈’ 속 브루스 웨인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이다.

 

  사실 놀란의 배트맨 삼부작 속 악당들은 모두 배트맨을 닮아 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의 스케어크로우와 라즈 알 굴을 보자. 스케어크로우는 배트맨이 박쥐를 공포의 상징으로 이용해 범죄를 제압하려 한 것처럼 공포를 유발하는 약물로 범죄를 행하며, 배트맨처럼 가면을 쓰고 다닌다. 라즈 알 굴은 브루스 웨인의 스승이었던 만큼 여러 부분에서 배트맨의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배트맨의 가면처럼 그도 다른 이를 라즈 알 굴로 내세움으로써 가면을 쓰기도 한다. 심지어 그는 고담을 파괴하려 할 때도 브루스 웨인의 클린 에너지 산업의 산물을 역이용한다. 그렇다면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투페이스는 어떠한가? 조커 역시 배트맨처럼 가면을 쓴 괴짜이며 배트맨이야말로 자신을 완성시키는 존재라 말한다. 투페이스는 하비 덴트일 때엔 배트맨을 대신할 수 있는 고담의 희망으로 떠올랐다가, 조커의 계략에 의해 타락한 뒤에는 마치 배트맨처럼 반쯤 녹아내린 얼굴로 상징되는 위악의 가면을 쓰게 된다.

 

  이들은 모두 브루스 웨인, 배트맨의 또 다른 판본으로 존재하며 그의 정의관에 물음표를 던진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스케어크로우와 라즈 알 굴은 배트맨의 ‘현재’를 공유하며 배트맨의 정의관을 시험한다. 여기서 브루스는 배트맨이 단순히 범죄자들의 공포의 상징일 뿐 아니라 고담 시민의 희망의 상징이자 고담 시민들이 스스로 고담을 정화시키도록 유도하는 의지의 상징으로 기능하게 함으로써 대처하고자 하는데, 여기에 레이첼이 ‘아직 예전의 브루스 웨인이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는 배트맨이 더 이상 고담에 필요치 않은 순간에나 돌아올 것’이라며 그 결심에 의문을 던지는 상태에서 영화가 끝난다. 그 뒤 ‘다크 나이트’는 브루스의 예언이 보기 좋게 빗나간 시점에서 출발한다. 고담의 희망의 상징이자 의지의 상징이 되고자 했으나 그의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 즉, 어설픈 배트맨 워너비들과 더 악랄해진 범죄자들만 낳은 것이다. 브루스는 레이첼에게 배트맨 없는 고담을 선보이기 위해 자신을 대신할 ‘백기사’ 하비 덴트를 돕지만, 이 때 조커가 나타나 배트맨의 신념을 송두리째 흔들며 레이첼을 죽음으로 이끌고 마지막 희망인 하비 덴트마저 타락시킨다. 배트맨이 필요 없는 세상을 구현해 레이첼이 말하는 ‘진짜 브루스 웨인’이 되려고 한 브루스 웨인을 비웃는 듯한 두 악당, 조커와 투페이스는 마치 브루스의 부서진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들에 의해 다시 한 번 시험 당한 배트맨이 행하는 선택은 자신을 희생해 거짓으로 정의를 지켜내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베인과 탈리아 역시 위의 악당들처럼 브루스 웨인, 배트맨을 닮아 있다. ‘배트맨 비긴즈’의 스케어크로우와 라즈 알 굴이 그의 ‘현재’를,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투페이스가 그의 ‘미래’의 일그러진 모습을 대변한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베인과 탈리아는 ‘배트맨 비긴즈’ 시점의 브루스 웨인, 즉, 배트맨의 ‘과거’의 망령이라고 할 수 있다(탈리아가 ‘배트맨 비긴즈’ 속 라즈 알 굴의 딸이라는 점, 라즈 알 굴처럼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산물을 역이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들이 과거를 재현하고 있음이 드러나 보인다. 브루스의 환상에서 라즈 알 굴이 자신은 여러 의미로 불멸이라 말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즉, 삼부작의 마지막에 브루스가 싸워야 할 적은 바로 되돌아온 자신의 ‘과거’인 셈이다. 

 

  ‘과거’, 이것이 바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관통하는 주요 테마이다. 이번 영화는 놀란의배트맨 삼부작 중 가장 플래시백이 잦으며, 새로운 인물들의 과거에 대해서 가장 많은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만큼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데 공을 들이는 영화이다.

 

  그렇다면 등장인물들의 ‘과거’는 과연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는가? 존 블레이크는 부모님이 눈 앞에서 살해당하고 웃는 얼굴이라는 가면을 쓰고 지내왔다는 점에서 브루스 웨인과 겹치며, 셀리나 카일 역시 부모님이 보이지 않으며 가면을 쓰고 도둑질을 한다는 점에서 브루스 웨인과 겹친다. 베인과 탈리아의 경우 브루스 웨인과 유사한 과거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그들 역시 가족이 없다. 더불어 짐 고든 역시 ‘다크 나이트’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로 넘어오는 그 공백의 기간 동안 가족이 그를 떠나 홀로 남았다는 점에서 유사한 ‘과거’를 지니게 된다. 크게 보자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주요 인물인 브루스 웨인, 짐 고든, 베인, 탈리아 알 굴, 셀리나 카일, 존 블레이크는 모두 ‘과거’에 ‘가족’이란 존재를 상실한 실질적 ‘고아’들이다. 한 편, 브루스 웨인이 후원하던 고아원은 그 후원이 끊기면서 재정난을 겪게 되어 나이 든 고아들까지 챙기기 힘들어지고, 그 때문에 밀려난 ‘고아’들은 돈을 벌기 위해 베인의 밑으로 들어가 고담을 점령하고 파괴하려 들기에 이른다. 또한 영화 중반 이후 베인에 의해 고담 시 자체도 외부로부터 고립됨으로써 ‘고아’의 신세가 된다. ‘배트맨 비긴즈’에서부터 이어져 온 브루스 웨인의 모든 행적은 모두 그가 ‘고아’가 된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고아’가 된 도시 위에서 브루스 웨인의 또 다른 얼굴들인 수많은 ‘고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아’ 브루스 웨인의 이야기를 끝내려는 것이다.

 

  ‘고아 브루스 웨인’이 처음 ‘배트맨’이라는 가면을 뒤집어 쓰던 순간에 가장 큰 동력이 된 것은 레이첼과 자신의 아버지였다. 고담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었던 그들은 단순한 복수심에 불타던 브루스에게 복수가 아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브루스는 레이첼과 아버지를 만족시킬 그 길이 ‘배트맨’의 가면을 쓰고 고담을 지키는 일이라 여기며, 자신 역시 아버지처럼 고담의 ‘상징’이 되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배트맨으로 활동하며 그 정체를 숨기기 위해 바람둥이 망나니 설정의 브루스 웨인을 가면처럼 여기는 그 길은 아버지의 길을 온전히 따르는 것도 아닐뿐더러(그의 아버지는 가면을 쓰지 않고 토마스 웨인 자기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고담의 상징이 되었다.), 레이첼 역시 그 길에 의문을 품는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라는 어그러진 상징이 불러일으킨 역효과를 목격하게 된 브루스는, 하비 덴트라는 진정한 상징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고(하비 덴트가 언급한 바 있는 ‘영웅으로 죽는 길’과 ‘악당으로 살아남는 길’ 중 그는 전자를 하비에게 넘겨주고 후자를 택한다.) 거짓으로 진실을 덮음으로써 비로소 아버지와 레이첼 모두를 위한 길을 택한 것이라 자위하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장면은 레이첼이 ‘배트맨이 필요 없게 된 고담이 오더라도’ 결국엔 자신은 하비 덴트를 택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쓴 편지를 알프레드가 태워 버리는, 또 하나의 거짓이 또 하나의 진실을 덮는 장면과 교차 편집되어 나온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이르러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칩거 중인 브루스 웨인이다. 배트맨으로 세상에 나갈 수 없게 되면서 그는 브루스 웨인으로 세상에 나가는 것도 꺼리게 된다. ‘배트맨 비긴즈’ 말미에 그가 말한 바와 같이, ‘배트맨’이 그의 본 모습이고 ‘브루스 웨인’이 그의 가면인 양 여기게 된 그로서는 배트맨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의 브루스 웨인 역시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더불어 ‘하비 덴트 법’의 시행으로 조직 범죄는 거의 소탕되다시피 했지만 빈곤 문제는 여전히 고담 내에 팽배해 있다. 브루스는 레이첼이 자신을 정말 사랑하고 원했는데 자신이 그녀를 죽게 했다는 ‘거짓으로 인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고든은 배트맨에게 누명을 씌우고 자신의 가족에게 총을 겨눈 미친놈을 옹호했다는 ‘진실로 인한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브루스가 내린 해답이 ‘다크 나이트’에서 바로 부정되었던 것처럼, ‘다크 나이트’에서 내린 해답 역시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부정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제 브루스 웨인은 어떤 새로운 해답을 찾아야 하는가? 이 질문이 떠오를 때 베인과 탈리아가 고담을 공격한다.

 

  베인과 탈리아는 가족이 없는 ‘실질적 고아’라는 점에서 ‘브루스 웨인의 시작’을 공유한다. 더불어 위에서 말했듯, 베인은 브루스가 레이첼을 위해 가면을 쓰려 했던 동기, 탈리아는 브루스가 아버지 토마스 웨인을 위해 가면을 쓰려 했던 동기를 각각 상징함으로써 ‘배트맨의 시작’을 공유한다. 이 두 악당은 자연스레 브루스 웨인을 처음 선택의 시점으로 돌아가 고민케 한다. ‘배트맨 비긴즈’에게 레이첼이 브루스에게 보여주었던 고담의 현실은, 범죄로 가득한 도시인 동시에 그 기저에 뿌리뽑기 힘든 빈곤, 계급 문제가 자리 잡고 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브루스는 계급 문제에 직접적으로 대면한 바 없었고, ‘다크 나이트’에서 내린 해답이었던 ‘하비 덴트 법’ 역시 계급 문제로부터 고담을 구원하는 법은 아니었다. 베인과 탈리아는 바로 그 계급 문제를 이용해 배트맨의 시도가 애초부터 극복하기 힘들었던 근본적 맹점을 공략한다.

 

  브루스 웨인은 ‘고아’이지만 동시에 ‘부자’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고아’들과는 그 출발부터 달랐던 것이다. 반면 탈리아와 베인은 그 지옥과도 같은 감옥에서 출발한, 말 그대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고아들이었다(탈리아가 브루스에게 매우 가난하게 살았던 옛날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라즈 알 굴과의 재회 뒤에도 유복한 형편은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이 고담에서 부하로 삼는 이들도 모두 고아원 출신 고아들, 즉, 그 무엇도 가진 바 없는 절망 끝에서 베인만을 유일한 길로 여긴 아이들이다. 브루스 웨인은 자신이 배트맨 가면을 씀으로써 고담의 범죄자들에게는 공포의 상징, 시민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이며 고담을 자체 정화하기 위한 의지의 상징이 되기를 바랐으나, 고담 시민의 대부분은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는 데 큰 몫을 차지한 그 ‘부’를 가지지 못한 이들이다. 누구나 배트맨이 될 수 있다는 그 가면의 메시지는 얼마나 공허한가? 베인과 탈리아는 그 정반대에 서서 프랑스 혁명과 월스트리트 시위의 재현과도 같은 퍼포먼스로 ‘혁명가’의 외피를 뒤집어 쓴다. 그들은 실상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에 기초해(여자를 위해, 아버지를 위해) 고담을 멸하려 왔음에도 폭탄이 자동 폭발하리라는 사실을 숨기고 고담 시민들 앞에서 고담을 해방시키겠다는 그럴 듯한 포장으로 자신들의 테러와 지배를 정당화한다. 나아가 탈리아는 대거트를 이용해 브루스의 경제력을 빼앗음으로써 브루스 스스로 가면이라 여기는 ‘브루스 웨인’이 가지는 의미를 모조리 망가뜨리고, 베인의 테러로 브루스 스스로 본 모습이라 여기는 ‘배트맨’을 도발한 뒤 그 배트맨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붕괴시킴으로써 브루스의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려 한다.

 

  배트맨이 처음 베인과 결투를 벌이게 되는 시점은, 브루스가 레이첼과 관련된 진실을 듣고 알프레드를 떠나 보내는 시점 이후이다. 레이첼이 하비를 선택했음을, 브루스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 순간, 여태껏 자신이 배트맨으로서 존재해 올 수 있었던 이유 하나가 무너지게 되면서 그는 큰 회의에 빠진다. 그런 그가 자기 존재(그는 여전히 ‘배트맨’이 자신의 본 모습이라 여기므로 배트맨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 한다고 여긴다.)를 증명하기 위해 발악적으로 택한 방법이, 무작정 베인에 맞닥뜨리는 것이었고 결국 보기 좋게 패배한다. 베인에 의해 배트맨의 허리가 부러지는 그 장면은, 레이첼의 진실을 알게 됨으로써 배트맨의 존재 의의가 무너진 것을 상징적으로 재확인시키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브루스는 베인과 탈리아가 그들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바로 그 감옥으로 옮겨진다. 그 곳에서 그는, 배트맨으로 활약하기 위해 재산을 쏟아 부었던 웨인 사 응용과학기술부의 작품들이, 더불어 고담을 위해 매달려 왔던 클린 에너지 산업의 산물들이, 즉, 그가 ‘브루스 웨인’의 ‘부’로 이루어 왔던 것들이 이제 고담의 독이 되어버린 것을 목도하게 된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고아 브루스 웨인’라는 그 출발점에 다시 한 번 서게 된 브루스는 다시 스스로를 일으킬 준비를 한다. ‘배트맨’이었을 때 부러졌던 허리를 그는 ‘브루스 웨인’인 상태에서 다시 회복한다. 배트맨은 무너지고 브루스가 다시 일어서는(rise), 다시 말해 그가 다시 ‘브루스 웨인’을 자신의 본 모습으로 인정하는 순간이다. 나아가 그는 옆 방 의사에게서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라즈 알 굴은 ‘상징은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뒤 브루스는 ‘배트맨’이라는 ‘상징’을 취했으나 어느새 그 상징이 존재 자체를 집어삼키는 사태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그는 여태껏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말은 브루스에게 있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 브루스 웨인으로의 삶’을 택하라는 말이며, ‘존재 자체를 지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징만이 남은 삶’을 버리고 ‘존재 자체로 살되 상징을 이용하는 삶’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이는 곧 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의 길, 나아가 레이첼이 브루스에게 그토록 바라왔던 삶과 일치하는 바이기도 하다(브루스는 그 감옥에서 탈출할 때 어릴 적 자신을 우물에서 꺼내 준 아버지의 환상을 본다.). 그 말을 이행하는 그 순간 그는 감옥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으로 올라오게(rise) 된다.

 

  다시 고담으로 돌아온 브루스는 또 다시 배트맨의 가면을 쓴다. 그러나 이제는 브루스 웨인의 본 모습을 지킨 채 ‘배트맨의 가면’을 쓰는 것에 불과하다. 배트맨이 고담의 상징이 되길 바랐으나 막상 ‘다크 나이트’에서 어중이떠중이들이 배트맨 흉내를 내자 마치 자기 자신의 영역을 침해 당한 양 기분 나빠하며 ‘도움은 필요 없다’고 말하던 그는, 이제 짐 고든 뿐 아니라 존 블레이크, 셀리나 카일 등 가난을 등에 업고 살아온 정반대의 ‘고아’들과도 손을 잡고, 자신이 배트맨이 되던 그 순간부터 해결해야 했던 그 숙제들을 상징하는 인물, 베인과 탈리아에 맞선다.

 

  이쯤에서 폴리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비 덴트를 배트맨이 죽였다는 말을 그대로 믿으며 배트맨을 사회 악으로 규정해 왔고 베인이 나타난 뒤론 겁에 질려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가족들 옆만 지키고 있다가, 배트맨의 진실을 알게 되고 후에 그가 돌아오자 용기를 얻어 ‘또 하나의 배트맨’처럼 고담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는(rise) 인물이 바로 그이다. 브루스나 탈리아, 어느 쪽의 ‘고아’도 아닌 그는 평범한 고담 시민을 상징하는 듯한 인물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일반 고담 시민의 모습들을 종종 보여주던 것과는 달리,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 평범한 시민들을 폴리로 응축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폴리는 실질적 고아인 다른 인물들과 반대 편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영화 중반 이후 고담이 고립되어 그 공간 자체가 ‘고아’를 형상화하는 공간이 되었음을 고려하면 폴리로 대변되는 일반 고담 시민들 역시 ‘고아 브루스 웨인’의 또 다른 얼굴이라 할 수 있다. ‘다크 나이트’의 후반부, 조커의 실험에서 고담의 시민들이 그의 예상과 달리 기폭 장치를 작동시키지 않음으로써 고담 시민들에게 자정 능력이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의 폴리는 배트맨의 싸인을 본 뒤 경찰들을 선두지휘하며 목숨 바쳐 베인에 맞섰다는 점에서 배트맨의 상징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희망의 예가 된다. 그러나 폭탄이 존재하는 한 이는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라는 희망처럼 ‘거짓된 희망’으로 사라질 것이다.

 

  한 편, 그 순간에 존 블레이크가 보이는 모습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베인이 하비 덴트와 관련된 진실을 밝히자 고든에게 크게 실망하며 돌아선다. 그러나 다리가 끊겨 고아들의 스쿨버스가 고담을 탈출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다크 나이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고든이 아들에게 ‘괜찮을 거라’ 거짓말을 했던 것처럼, 하비 덴트와 관련해 진실을 숨긴 것처럼,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다시 버스에 태운다. 결국 그도 배트맨이 그랬듯, 고든이 그랬듯, ‘거짓된 희망’이 절망적인 순간에 가지는 의의를 긍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베인과 탈리아는 이미 그 지하 감옥에서부터 미약한 희망이란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깨달아 왔고 그것을 고담에 재현하려 했다. 웨인의 후원이 끊긴 고아원의 ‘고아’들은 그 미약한 희망을 베인에게서 보고 제 목숨까지 바쳐가며 그에게 매달렸고, 이제 또 다른 ‘고아’ 존 블레이크는 자신을 따라온 ‘고아’들에게 살 수 있다는 거짓된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다른 ‘고아’들인 짐 고든과 브루스 웨인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거짓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폴리와 존 블레이크, 고담의 ‘고아’들이 품는 그 희망이 거짓된 희망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브루스 웨인이 그 희망을 실현할 필요가 있다.

 

  우선 브루스 웨인은 베인(브루스가 배트맨이라는 가면에 사로잡히게 된 원인 중 하나인 레이첼을 상징하는 이 악당을 물리치는 것은 또 다른 여성 셀리나이다. 엔딩 장면에도 나오듯 셀리나는 레이첼의 빈 자리를 훌륭히 메운다.)과 탈리아를 일단 처리함으로써 자신이 과거를 온전히 떨쳐냈음을 다시 한 번 증명해낸다. 베인과 탈리아는 모두 죽지만 배트맨이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는 장면은 여전히 나오지 않아, 배트맨이라는 상징이 지니는 의미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그 뒤 브루스는 배트맨이라는 가면을 폭탄과 함께 터뜨려 버림으로써 고담을 구원한다. 이는 폴리가 죽어가면서 지켜낸 희망, 존 블레이크가 아이들에게 심어준 희망, 고든이 늘 바라왔던 희망의 실현인 동시에, 브루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켜내면서 배트맨이라는 상징을 영원히 남기는(배트맨 동상이 세워지는 장면으로 형상화된다.), 배트맨이 되는 순간부터 브루스가 늘 찾아 헤맸던 아버지와 레이첼 모두를 따르는 길이자 알프레드가 그토록 염원하던 바람의 실현이다. 그 후, 브루스는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어 도둑질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셀리나의 전과 기록을 클린 슬레이트로 모두 지워줌으로써 새 출발을 가능케 하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진주 목걸이를 선물함으로써 그 역시 과거를 과거로 둔 채 그녀와 함께 새 출발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확인한다(이 때 그는 배트맨이라는 가면 뿐 아니라, 브루스 웨인이라는 자신의 본질을 가면으로 호도되게끔 했던 그 ‘부’마저 집어 던진다.). 또한 그는 존 ‘로빈’ 블레이크에게 배트케이브의 위치를 알려주어 자신과 달리 계급 문제까지 아울러 고담의 문제를 꿰뚫을 수 있을, 나아가 ‘거짓된 희망’이 배트맨이라는 상징에 의해 ‘실현’되는 것을 직접 목도한 ‘진정한 고담의 고아’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준다(그가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장면-rise-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로써 그는 자기 자신이 배트맨의 가면을 처음 쓰던 당시에 가지고 있던, 고담의 희망과 의지의 상징이 되려던 그 자신의 ‘희망’마저도 오롯이 실현시킬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놀란의 배트맨 삼부작 그 마지막 작품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브루스 웨인이 자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해 그 과거를 극복하고 더 이상 상징에 매몰된 인간이 아닌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서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고담의 수많은 ‘고아’들의 ‘희망’을 배트맨이라는 ‘상징’을 통해 실현시키고 자신의 온전한 삶마저 되찾는 결말로 연결시켜냄으로써 삼부작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훌륭한 마무리를 선사한다. 가면과 본 모습, 진실과 거짓이 끝없이 자리를 바꾸는 가면 놀이, 그 끝에서 고담 시민들과 고담 시 전체를 브루스 웨인과 동일화시킴으로써 브루스의 개인적인 트라우마 극복과 사회적 정의 구현의 과정을 일체화하고, 이를 통해 브루스 웨인 개인 뿐 아니라 고담 전체의 ‘재흥(rise)’을 그려낸 것이다. 비록 시간에 쫓긴 듯 편집이 튀어 산만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꽤 있고, 캐릭터의 매력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한 점이나 마지막 편이라는 태생적 한계 상 ‘다크 나이트’에서처럼 제한된 세계관 안에서 이야기가 마치 스스로 움직이며 확장되어가는 듯한 쾌감을 느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그리고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왕왕 드러나는 놀란의 보수적 성향(아무리 베인이 취하는 혁명가적 스탠스가 허울에 불과하다지만 배트맨의 영웅적 행위가 그런 인물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그려짐으로써 어느 정도 반동적 성향을 띄고 있다는 것, 고담 시민들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고담 경찰 vs 빈곤에 시달리다 베인 측에 붙은 이들의 프레임으로도 볼 수 있게 그렸다는 것, '고아'라는 연결점 하에 계급 간 연대를 그리는 듯하나 실상 기존 질서에 봉사하는 연대로 볼 수도 있다는 것, 여전히 고담의 근본적 문제인 빈곤에 대한 경제적 개혁책은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 등등)이 조금 걸리는 부분들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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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 [소설] 안주(미야베 미유키) [1] [3] 날개 2012.09.13 2792
386 [소설] 은닉(배명훈) [1] 날개 2012.09.13 2108
385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7] [18] 감동 2012.09.10 4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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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 [소설] 2. 은닉_배명훈_김은경?? (3부까지 읽고 난 후의 이야기_스포일러 아주 많이 포함) 3. 조은수 [1] bytheway 2012.09.06 2396
382 [소설] 1.은닉._배명훈_( 은경이를 지키는 나의 이야기.1.2부 이야기. 스포일러 어느 정도 있음.) [10] bytheway 2012.09.06 2574
381 [영화] 걸어도 걸어도 (Still Walking, 2008) [16] 가지-가지 2012.09.04 3954
380 [영화] 범죄의 재구성 [1] [10] ColeenRoo 2012.09.03 2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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