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우스트

2012.12.25 02:38

menaceT 조회 수:2985

 

'파우스트',

12월 7일, 아트하우스 모모.

 

  영화가 끝난 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 직전 다시 한 번 제목이 뜰 때 소제목처럼 아래에 딸려나오는 문구에 쓰인 것처럼, 이 영화는 '몰로흐', '타우르스', '더 선'에서 이어지는 소쿠로프의 권력 4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고3 때였나, 아직 시네코아가 남아있던 시절에 서울 영화제에서 '더 선' 한 편 본 게 고작이지만, '몰로흐'는 히틀러, '타우르스'는 레닌, '더 선'은 히로히토를 각각 주인공 삼아 20세기의 실존했던 세 권력자의 말로를 그렸다는 정보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4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영화 '파우스트'는 전편들과 달리 19세기를 배경으로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그 인물이 점차 권력욕에 이끌려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일종의 프리퀄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파우스트'의 화면비는 요즈음 영화에선 찾아보기 힘든 1.33:1이라 그 자체로 옛 느낌을 내며 4부작의 뿌리로서의 제 역할을 명확히 한다. 게다가 원 씬 원 컷의 '러시아 방주'를 비롯해 영화에서 롱테이크를 자주 쓰기로 유명한 소쿠로프의 영화답게 평균적으로 쇼트 길이가 길어 장면당 호흡이 길고 대사도 그리 많지 않았던 '더 선'과 달리('몰로흐', '타우르스'는 안 봐서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왠지 비슷했을 것 같다...), '파우스트'는 호흡이 짧은 장면들이 주를 이루고 삶과 죽음, 세상과 인간에 대한 대사가 끝없이 쏟아져 4부작 내에서의 그 이질성을 더욱 강조한다.

 

(스포일러)

 

  영화의 첫 장면은 푸른 창공이다. 하늘에 거울이 떠 있다. 마치 앞으로 보여질 세상이 스크린을 마주한 영화 밖 세상의 반영임을 미리 알리려는 듯하다. 이제 카메라가 구름을 뚫고 내려가면, 천둥 소리와 함께 구름 아래 어둑어둑한 세상의 모습이 화면을 메운다. 이미 그 자체로 지옥도 같은 세상을 쭈욱 훑어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그 시작을 알린다.

 

  그 다음 장면은 파우스트가 시체를 해부하는 장면이다. 해부 중 파우스트는 조수인 바그너와 영혼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파우스트는 볼 수 없는 영혼은 믿을 수 없으며, 뇌에는 쓰레기만 가득할 뿐이라 말하지만, 바그너는 인간의 영혼은 아마도 발에 있으리라고 말한다. 무신경하게 장기를 뜯어내던 파우스트가 시체를 다시 세우자 아직 남아있던 장기가 시체에서 후두둑 떨어진다. 잠시 후 시체를 빌려주었던 사람이 나타나는데, 파우스트는 돈이 없어 대가 지급을 나중으로 미룬다. 그 뒤 파우스트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돈이 없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던 파우스트가 그곳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 중 하나는 눈에 보이는 먹거리를 몰래 집어 요기를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돈이 없는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해주지만 파우스트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때 아버지에게 고깃덩이 기부가 들어오는데 파우스트는 그것마저 빼앗아 먹으려다 아버지에게 제지당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고달파진 파우스트는 이제, 악마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는 뮐러에게 돈을 빌리러 찾아간다.

 

  영화 초반부의 이 일련의 장면들에서 우리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소쿠로프의 '파우스트'가 갈라지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소쿠로프의 이 영화에서 파우스트는 앎, 학문을 위해 시체를 돈을 대가로 지불하겠다며 빌려 해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그 해부 과정에서 영혼을 부정하고 뇌를 쓰레기에 비유하며 영혼을 고양시키고 뇌를 채우는 행위 모두를 부정한다. 즉, 신, 종교, 도덕은 물론 지식, 학문까지도 파우스트에게는 더 이상 주된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세상의 지식을 깨우친 인간이 환멸에 빠진다는 점에서는 문학 속 파우스트와 유사하지만, 이제 그가 최우선으로 중요시하는 문제는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이며, 그것을 가능케 해 주는 돈의 문제이다. 그는 문학 속 '파우스트'가 추구하던 세속의 쾌락을 누리기에 앞서 아주 기본적인 생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은 것이다.

 

  파우스트가 뮐러를 찾아 전당포에 들어설 때, 화면이 갑자기 찌그러지는데 이러한 화면의 왜곡은 그 뒤로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종종 등장한다. 화면이 일그러질 때마다 프레임 안에 담긴 세상과 인물들은 마치 어느 한 쪽으로 확 쏠려 나동그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파우스트가 이토록 일그러진 화면 안에서 움직일 때, 이는 마치 식욕, 정욕을 거쳐 권력욕으로 강하게 이끌려가는 그의 이후의 행보를 미리 예견하는 듯 보인다.

 

  파우스트는 뮐러에게 자신의 물건을 내어주며 그것을 대가로 돈을 달라 하지만, 뮐러는 그 물건을 보고 '철학자의 돌'이라며 '삶'에 관련된 물건은 가치가 없어 돈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죽음이 삶보다 높게 가치가 매겨지는 순간이다. 파우스트는 집에 돌아오지만 뮐러는 그가 놓고 간 물건을 돌려주러 파우스트를 찾아오고, 이때 파우스트의 조수 바그너와 가정부 이다 역시 뮐러와의 거래 대기 목록에 이름을 올려두었음이 드러난다. 뮐러는 그 뒤부터 파우스트를 데리고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는데, 파우스트는 그 과정에서 빈곤이 팽배해 희망이 사라지고 삶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도시의 면면을 보게 된다.

 

  파우스트는 그보다 전에 이미 신부가 검은 옷의 신사와 동행하는 모습을 보며 죽음이 성직자와 동행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역시 자신이 발디딘 세상이 뿌리깊은 빈곤으로 인해 생, 구원과 죽음, 타락이 함께 하게 된 세상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뮐러를 따라다니며 그 흔적들을 더욱 명확히 보게 된다. 목욕탕에서는 노동으로 인해 손이 굽은 여성들이 성적 추행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목욕탕의 인파들은 악마 뮐러가 그들 한 가운데에서 목욕을 해도 단지 외면(뱃살이 잔뜩 늘어져 있고 성기가 없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희롱할 뿐, 그가 거리에 나다닌다는 것이 그들의 땅에 팽배한 악과 죽음의 기운을 의미한다는 점엔 전혀 관심이 없다. 술집에서는 사람들이 죄다 난폭하게 굴기 일쑤에, 돈이 궁한 술집 주인은 점성학에 기대어 자신의 운명을 점친다. 아들이 죽어와도 그 여동생과 어머니는 전쟁통에 아들 얼굴을 제대로 본 바가 거의 없는지라 그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한다. 어머니와 딸이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 미쳐버린 여자는 악마가 자신의 배필이라 믿으며 늘상 그를 쫓아다닌다. 이처럼 영화는 사회 곳곳의 암담한 징후들을 전시하듯 계속해서 보여주는데, 이를 보다 보면 악마라는 소문이 파다한데도 대기 목록에 이름까지 올려두며 뮐러와 모종의 계약을 하려는 이들이, 그들의 현실에 지쳐 오히려 악마에게서 희망을 볼 지경에 이르렀던 것임을 알게 된다.

 

  바그너가 후에 재등장하는 장면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파우스트가 마가레테를 만나게 된 이후 바그너는 종종 그들 뒤를 쫓는 모습으로 등장하더니, 갑자기 마가레테의 앞에 나타나 자신의 창조물을 보여준다. 그 창조물은 인간의 얼굴을 갖추고 있지만 팔다리가 없다. 인간의 발에 영혼이 깃든다던 바그너 본인의 말을 믿어 본다면, 바그너의 창조물에는 영혼이 없는 셈이다. 바그너는 그 창조물을 보여주며 자신이 곧 파우스트이며 위대한 바그너라고 말하지만, 그는 마가레테에게 외면당하며 그의 창조물은 바닥에 나동그라져 힘없이 뻐끔거린다. 바그너가 그 창조물을 물 속에 보관하던 것을 고려하면 이제 그 창조물은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파우스트가 영혼을 믿지 않을 때 그는 영혼의 존재를 믿었고, 그런 이유로 남들이 죽음의 가치를 더 높이 칠 때 그는 아직 삶을 긍정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그조차 악마와의 계약을 위해 대기 중이었음이 드러난 바 있다. 그 뒤 그는 창조물을 만들어 내고 거의 발악 같은 몸부림으로 그 창조물을 마가레테에게 인정받으려 하는데, 이 몸부림은 직접 생을 창조하고 이를 인정받는 방식으로 생을 긍정하려는 생의 가치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으로까지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창조물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혼이 존재하지 않고, 그 창조물은 마가레테에게서도 철저히 외면당하며 곧 죽음에 이를 운명에 처한다. 극중에서 가장 생을 능동적으로 긍정하던 이조차도 이처럼 죽음에 가까운 땅이 바로 영화 '파우스트'가 그리는 세상이다.

 

  한 편, 영화는 계속해서 '좁은 문'의 은유를 등장시키는데, 성서에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좁은 문'에 비유했던 반면 이 영화 속 좁은 문은 도대체 구원으로 향하는 길 같아 보이지가 않는다. 장례 행렬이 터널을 지나면서 파우스트를 비롯해 길을 지나던 사람들과 돼지를 실은 수레와 함께 뒤엉켜 끼어버리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인간과 가축은 모두 한 데 엮여 동일한 것들로 치부되는 듯하다. 또한 파우스트와 뮐러가 함께 문에 끼이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이 역시도 파우스트가 뮐러와 함께 몰락해갈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에게로 향하는 길은 이제 악마와 동행하는 길로, 죽은 자와 가축과 같아지는 길로 변질되어 있는 것이다.

 

  뮐러와 서성거리던 도중 마가레테를 만나게 된 파우스트는 자연스레 식욕에서 정욕으로 그 주된 관심사를 옮겨 간다. 지적인 듯 보였던 파우스트가 마가레테를 만나자 갑자기 그녀의 치마를 몰래 들춰 그녀의 다리와 음부를 훔쳐본다. 그는 마가레테를 얻기 위해 신부 대신 고해성사를 행해 신을 능멸하는가 하면(이때 그는 '누가 고해성사를 믿겠냐'고 말하는데, 그때 '나'라고 대답하는 건 바로 악마 뮐러이다.), 그 정욕을 채우기 위해 결국 영혼을 담보로 악마와 피의 계약을 맺기에 이른다. 그렇게 얻은 악마의 힘을 통해 파우스트는 마가레테의 몸을 취한다. 처음으로 파우스트가 권력을 누리게 된 순간이다.

 

  그 뒤 파우스트는 뮐러의 연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마가레테의 오빠이자 자신의 손에 죽은 발렌틴과 재회한다. 발렌틴은 파우스트에게 자신을 암담한 생에서 죽음으로 이끌어 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한다. 그에게도 역시 죽음이 삶보다 값진 것이었다. 파우스트는 그를 뒤로 하고 뮐러를 따라 '좁은 길'을 걸어 점점 높은 곳으로 향한다. 여기서도 '좁은 길'은 신에게로 향하는 구원의 길이 아닌 악마와의 동행길이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을 다 오른 뒤 다다른 탁 트인 공간에서 파우스트는 뮐러를 돌덩어리로 찍어버리곤, 마가레테의 목소리를 따라 혼자 길을 나선다.

 

  '좁은 길'의 끝. 그 '좁은 길(='좁은 문')'은 산 자가 죽은 자, 가축과 같아지는 길이요, 그처럼 삶의 가치가 바닥에 떨어진 세상 위에서 악마와 동행하는 길이다. 그 길을 걸어가며 식욕, 정욕으로 점차 그 방향을 바꾸어 오던 파우스트의 욕구는 이제 자연스레 권력욕으로 향한다. 빈곤과 각종 욕망으로 들끓는, 죽음만도 못한 삶 뿐인 세상에서 악마로부터 빌려온 그 권력은 그에게 결핍되어 있는 그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 좁은 길의 끝에서,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본 인간 파우스트는 악마마저도 짓누르고, 악마로부터 빌렸던 권력을 고스란히 제 것으로 취하려 든다. 좁은 길이 끝난 그 너른 벌판에서 그는 더 이상 악마 뮐러와 함께 하지 않고 온전한 자신의 자유 의지만으로 마가레테를 향해 악마에게서 빼앗아 든 권력을 손에 쥐고 걸어나간다.

 

  소쿠로프는 시적인 영화 언어를 통해 20세기의 권력자들의 말로를 그리고는, 4부작의 마지막으로 인간이 권력욕을 품은 그 상징적인 출발점으로 19세기 문학 속 파우스트를 끌어온다. 여전히 아름다우면서도 좀체 파악하기 힘든 이미지와 말들로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그려내던 영화는 그 결말부에서 악마마저도 이겨낼 정도의 강한 권력욕에 사로잡힌 한 인간을 비춘다. 그는 여전히 뮐러의 연옥 안에 있지만, 영화 맨 첫 장면에서 지상의 세계가 하나의 지옥도처럼 그려진 것을 고려해 볼 때, 그 연옥은 생의 공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제 그 연옥에서 권력을 쥐고 마가레테를 찾아 헤매는 19세기의 파우스트는 20세기가 찾아들면 히틀러, 레닌, 히로히토 등 각자의 마가레테를 위해 권력을 휘두를 수많은 권력자를 통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게 되리라. 그리고 그 이전의 권력 연작들에서 그린 바와 같이, 결핍에서 시작된 그 권력을 향한 욕망의 오디세이는 다시 결핍으로 끝맺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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