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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기자의 호평에 이끌려 엊그제 '세상의 모든 계절'을 보았습니다. 좀 더 따뜻한 영화이길 기대했건만, 영화가 끝난 후 돌아오는 길 내내 가슴이 아렸어요. 쓸쓸하고, 무심하며, 매몰차던 영화였습니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라던, 양귀자의 소설 속 한마디가 생각나는 영화였네요.  

영화는 대학교 입학식 때 만나 평생을 우애좋게 살아온 부부와 그 주변을 맴도는 불행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부와 달리 혼자인 이들은 종종 부부의 집에 초대되어 함께 식사를 하는데, 완벽히 대조적인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 쉴새없이 술을 마십니다. 관심받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불행을 과장해서 이야기하기도, 실은 스스로가 행복한거는 뻔한 거짓말을 뇌까리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본인만 더욱 초라해질 뿐이죠. 그렇게 그들은 늘 부부의 하루를 망치곤 하며, 자신에게 유독 불친절한 삶을 원망합니다. 우린 왜 너희처럼 될 수 없었을까. 난 왜 잘못된 선택만 하는걸까라고 자책하는 눈빛으로 말이죠.

얼핏 홀로맞는 노년의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저는 영화가 '고통의 무감성(無感性)'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하기란 불가능하며, 우리가 오직 나눌 수 있는 건 슬픔 뿐이라는 삶의 뼈아픈 진실을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주변이들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부는 실상 그들을 보듬지 못하고, 더욱 무너져내리게 합니다. 얄밉게도 자꾸 세상만사가 '사랑스럽다(lovely)'고 외치는 아내 제리의 말은 주변이들에게 공허하기만 하죠. 남편인 톰 역시 "삶은 때로 잔인하다"고 말하며,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이들을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죠.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이들에겐 같은 세상이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비춰지며, 누군가의 행복이 남에겐 자신의 결핍을 도드라지게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영화는 우리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라는 김용택의 시처럼, 삶이란 누군가에겐 너그럽지 못한채로 흘러간다는 것. 우리 역시도 어쩌면 진실한 사랑을 만나지 못할 수도, 꿈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음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나봅니다. 그런 삶의 엄혹한 진실이 저는 아프더군요. 세찬 운명을 오직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지나치게 모진 처사인 듯 싶지만, 내 책임이 아니라는 이유가 늘그막의 쓸쓸함에 얼만큼의 위로가 되어줄지는 모르겠어요.

'어웨이 위고'를 기대하고 갔다가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고 온 기분입니다. 좀 더 친절하게, 어떻게 살라고 일러주는 영화였다면 차라리 맘은 더 편했을지 모르겠네요. 사람이 늙으면 혼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걸까요. 좀 더 다양한 행복의 전형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맴돌던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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