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트시네마 “2011 시네바캉스 서울”에서 마이클 만 감독의 대표작 〈히트〉를 보고 왔습니다. 만 감독의 팬이기도 하고 〈히트〉도 좋아해서 종종 보곤 합니다만, 많은 분의 주장처럼 이 영화가 만의 최고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만의 필모그래피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놓고 보더라도 아주 우수한 작품이라고 여기지는 않는 터라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 극장에 갈까 말까 망설인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결국 이때 아니면 언제 〈히트〉를 극장에서 필름으로 보겠나 싶어서 나갔습니다. (사실 김성욱 프로그래머님께서 만의 팬이시기 때문에 서울아트시네마가 존속하고 필름 수급 문제만 해결된다면 만 회고전이 열릴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하지만요.)

 그런데 이 외출이 생각지도 못했던 즐거운 체험을 안겨다 줄 줄이야. 워낙 재미있어서 이렇게 로그인해서 글을 쓰게 되네요.

 영화 전반에 대한 저의 인상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문가주의, 도시라는 풍경, 고독, 남성성 등 만이 천착하는 주제가 가득 들어있기는 하지만, 폼 잡으면서 인용하기는 좋을지라도 솔직히 유치하고 진부한 데가 있는 대사와 전형적이고 얄팍한 캐릭터 조성 및 플롯 구성 탓에 90년대 CF스럽게 낡은 면도 공존하고 있는 영화지요. 이후의 작품들의 하드보일드한 태도와 비교해 보면 〈히트〉의 인물들은 과묵한 척 하면서도 자기 속내를 직설적으로 다 털어놓고 있어서 오히려 심리적 깊이를 사라지게 하고, 여성 캐릭터들은 사실상 남자들의 외로움을 받아주기 위한 존재로만 이용되고 있는데도 러닝타임의 상당 시간이 연인 관계 묘사에 투자되는 터라 단점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우여곡절과 “액션”이 있는 크리스(발 킬머)-샬린(애슐리 저드) 커플이나 빈센트(알 파치노)-저스틴(다이안 베로나) 커플은 상대적으로 매력이 있는데, 어찌 보면 가장 만스러운 인물이라고 해야 할 닐(로버트 드 니로)이 이디(에이미 브래너먼)와 맺는 관계는 상당부분 닐의 “말”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허전합니다. 만의 영화는 장-피에르 멜빌이나 두기봉의 영화처럼 말없이 행동을 통해 자신의 심경과 결단을 체화하는 인물이 등장할 때 가장 빛을 발하지요. 실제로 이 세 커플에 관련된 명장면은 모두 거의 아무 말 없이 이루어지는 이별이나 재회의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또 아역배우 나탈리 포트먼이 연기한 빈센트의 의붓딸 로렌이 몇 장면 나오지도 않는데도 강한 인상을 남기고 관객의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만드는 것 역시 단순히 그게 포트먼이거나 어린 아이여서가 아니라 중심 플롯의 우여곡절과는 동떨어진 부분에서 별다른 대사 없이 짧은 사건만으로 복잡다단한 마음의 일단을 내비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이런 기왕의 감상을 재확인하는 즐거움도 있기는 했습니다만, 진짜 재미있었던 부분은 따로 있었으니― 이번에 서울아트시네마에 온 필름은 극장에 걸린 완성본이 아니라 아직 후반작업이 완료되지 않은 내부시사용 필름이었던 것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우선 이것은 완성본이 아니라 시사용으로 만든 필름이기 때문에 아직 화면과 음향이 완성되지 않았으니 양해를 바란다는 자막이 뜹니다. 그리고 시작된 〈히트〉는, 그래도 전체 얼개는 완성본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아직 많은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엔딩 크레딧도 없고, “히트”라는 제목조차 안 뜨고, 음악이 다른 부분도 있고, 음향도 덜 추가되어 있고, 편집도 완성 단계는 아니며, 색보정도 안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한 쇼트에서는 아직 화면 합성이 완료되지 않아서 그린 스크린이 등장합니다!

 〈히트〉를 이번에 처음 보신 분들, 혹은 예전에 보았던 그 영화를 보러 오셨던 분들께 이것은 예기치 않은 불쾌한 경험이었겠습니다만 제게는 극히 흥미로운 체험이었습니다. 만 감독이 어떤 식으로 영화를 완성해 나가는지를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요. 가령 만의 영화, 특히 〈히트〉의 경우 화면의 주를 이루는 색조는 멜빌의 후기작을 연상케 하는 차가운 푸른색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만 아직 색보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화면을 직접 보니 푸른색 이상으로 주황색 조명을 대단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지요. (그런데 디지털 색보정이 횡행하던 시절의 영화는 아니고, 이런 경우 후반작업에서 어떻게 색보정을 하고 톤을 맞추는지는 참 궁금합니다.) 또 조명의 강도도 생각보다 많이 어두운데, 알 파치노가 등장하는 한 장면은 〈대부〉(The Godfather, 1972)에 대한 오마주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물을 완전히 새까만 암흑에 파묻어 놓고 얼굴에만 조명을 쳐서 찍기도 했습니다. 이런 건 완성본을 볼 때는 한 번도 못 느꼈던 부분이었지요. 한 장면 안에서도 빛의 강도가 달라서 쇼트마다 색조가 바뀌는 일도 왕왕 있으니, 새삼 영화란 평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촬영 이후”의 과정에 많은 것을 맡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필름이 낡아서 그런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물론 아주 새로 찍은 필름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볼만한 질을 유지하고 있고, 단순히 필름 노화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하기에는 색조의 차이가 지나치게 큰 대목이 여럿 있습니다.)

 음향은 화면보다 더 흥미로웠습니다. 영화에서 소리는 영상보다 덜 “눈에 띄는” 요소인지라 화면 내의 동기를 따라 자연히 들어오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고, 후시녹음 같은 거는 기술이 딸렸던 과거에나 쓰던 기술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시는 분들도 왕왕 뵙게 됩니다만, 사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영화 속 음향은 후반작업 과정에서 입혀진 것이지요. 이번 〈히트〉 미완성본은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할 때, 특히 이 작품처럼 음향 효과에 많은 공을 들인 경우 후반작업이 얼마나 많은 영역을 담당하는지 확인하게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 유명한 L.A. 도심 총격전 장면 초반부에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음향 효과가 하나 있습니다. 은행 앞에서 갑자기 총격전이 벌어지고, 한참 총알이 빗발치다가 경찰 측에서 첫 사상자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경찰이 쓰러진 직후 약속이라도 한듯 총성이 잠잠해집니다. 이때 화면에 보이지 않는 도시의 저 멀리 어디선가 구급차 혹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건물의 벽을 타고 울려옵니다. 고층건물이 촘촘히 들어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직선을 많이 만들어 놓는 가운데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적인 무엇이 위협당할 것만 같은 도시의 느낌, 그게 바로 이 사이렌 소리 하나에 응축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이번에 상영되는 미완성본에는 이 소리가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따로 녹음해서 후반작업 과정에 입혔던 소리란 거지요. 그 외 이 영화를 본 모두가 이야기하는 총소리도, 완성본만큼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지금의 음향은 아마도 현장에서 동시녹음한 음향을 주로 쓰고 있지 않은가 싶은데, 총의 격발음이 워낙에 커서 건물 벽을 타고 흐르는 잔향이 많이 묻힙니다. 그리고 거리가 조금만 멀어져도 소리가 작아집니다. 또한 소리가 아예 없이 무음으로 남아 있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자막은 나오는데 아직 대사를 입히지 않아서 목소리는 들을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중요한 대사는 아니고, 대체로 후반작업에서 입힐 수 있는 짤막한 대사들입니다.)

 이러한 요소가 제가 이전에 알고 있던 〈히트〉라는 영화의 핵심을 훼손시키고 영화의 힘을 극감시킬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았기에, 저로서는 마치 아직 작업 중인 미공개 영화를 다루는 영화사 직원이 된 듯한 경험이었고 만 감독의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가 어떻게 덧붙여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즐거운 기회였다고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마 이런 필름이 왔다는 사실을 알고 보신다면 이미 〈히트〉를 보셨던 다른 분들께도 꽤 재미있는 체험이 될 겁니다. 한편 〈히트〉를 한 번도 안 보셨는데 이번 기회에 보려고 하시는 분들은… 글쎄요, 일단 저와 함께 보신 분들은 다들 좋아하시긴 했습니다만 확신은 안 섭니다. 물론 미완성본을 보신 다음 완성본을 확인하신다면 그 또한 충분히 의미 있는 경험이 되겠지요. 다만 이 미완성본만으로 〈히트〉라는 영화에 대한 판정을 내리신다면 영화로서는 아무래도 손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끝으로, “사건” 발생 이후 서울아트시네마의 대처는 아쉽습니다. 물론 이 극장에 꽤 오랫동안 드나들었고 가끔씩 직간접적으로 운영 관련 이야기도 들어왔던 입장에서, 입수한 필름을 상영 전에 검토할 여력이 안 된다는 점은 이해하고 있고, 따라서 “사전에 공지를 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 서울아트시네마 직원분들이 오늘 가장 당황하셨을 테지요. 그러나 필름 맨 앞에 안내문이 나오고, 그린 스크린까지 펼쳐져 누가 보아도 미완성본임이 분명히 밝혀졌다면, 상영 후에 이런 상황에 대한 안내를 하고 불만이 있는 관객에게 환불 조치를 취하는 정도의 대응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히트〉의 경우 평소 서울아트시네마에 잘 오지 않는 관객분들도 많이 오셨을 텐데 저처럼 관대해질 수 있는 관객이 얼마나 계셨을지 의문입니다. 하긴, 설령 만날 오던 관객만 왔다 하더라도 후속조치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고요. 이미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히트〉 7월 31일자 표를 가진 분들에 대한 보상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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