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터, The Fighter]는 헐리우드 스포츠 영화의 단골인 전형적인 언더독 이야기입니다. 마크 왈버그가 연기하는 이 영화의 주인공 미키 워드(Micky Ward)는 아마추어와 프로 초기에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1990년도 초에 들어 연패를 거듭하는 부진한 성적과 손 부상으로 휴지기를 갖다가 90년대 후반, 다시 복귀해 2000년, 만 34이라는 비교적 많은 나이에 WBU 주니어 웰터급 세계 타이틀을 차지합니다. 그를 진짜 유명하게한것은 요절한 캐나다 출신 복서 아투로 개티와의 3연전이라고하는데,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것은 셰이 니어리와의 WBU 세계 타이틀 매치까지입니다.
많은 공식화된 언더독 이야기에서 그렇듯 미키 워드에게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가족과 이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주는 연인과 멘토어가 있습니다. 한때 유망한 복서였지만 지금은 마약 중독자인 이부(異父) 형 디키(크리스찬 베일)는 그의 트레이너이고 아홉 자식 중 큰아들 디키를 가장 편애하는것이 분명한 어머니 앨리스(멜리사 리오)는 그의 매니저를 겸하고 있습니다. 미키는 권투라는 패밀리 비즈니스의 간판 선수이기는 하지만 마약 중독자 형/트레이너는 체육관보다 마약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일수이고, 어머니/매니저가 골라오는 경기에서는 상대편 선수가 다른 경기를 하기 위해 이용하는 디딤돌 역할밖에 되지 못합니다. 동네 바에서 일하는 샬린(에이미 아담스)과 겨우 데이트를 시작했는데 만만치 않은 성격의 이 아가씨와 일곱명의 자매들은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습니다. 디키가 감옥에 가자 미키는 가족보다는 자신을 위한 선택을하고 새로운 매니저를 구해 다시 권투로 복귀합니다. 그가 어떻게 타이틀을 차지하는지, 이 과정에서 어떻게 가족과의 갈등을 극복할지 예상하는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감독 데이빗 O 러셀은 이 뻔한 이야기를 선댄스 출품용 가족 드라마로 풀어갑니다. 디키 에크런드는 중증 마약 중독자에, 폭력 전과범에, 슈거레이 레너드를 다운시켰던 15년전의 짧은 영광을 입에 달고사는 허상에 가득찬 인물이지만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가족만은 끔찍하게 생각하고, 미키의 권투 스타일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좋은 전략가입니다. 디키와 미키 그리고 일곱 자매의 어머니 앨리스는 언듯 악당처럼 보이지만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아픔의 정도는 다를 수 있다는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인간적인 캐릭터이고, 한때 놀던 아가씨이던 미키의 새 여자친구 샬린은 미키가 자신처럼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도록 그와 가족을 갈라놓으려합니다. 이런 강한 캐릭터들 속에서 미키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처럼 보이기도하지만 문제 많은 가족을 소재로한 드라마에는 이런 중간에 끼인 캐릭터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언더독 스포츠 영화 + 선댄스식 가족 영화"의 식상한 소재와 구조를 업그레이드해주는것은 영화의 빠른 속도감과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영화의 빠른 속도가 1993년부터 2000년까지 7년을 두시간이내로 압축해 놓은 때문인지, 아니면 강한 비트의 음악 때문인지 아니면 뜀박질하는 크리스찬 베일의 이미지가 눈에 박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보는 내내 지루해하지 않고 가볍고 흥겨운 마음이 든것도 정말 오랜만인것 같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전혀 다른 장르이지만 "다우트"가 생각났습니다. 연기가 영화의 질을 올려줄뿐만 아니라 각 배우들이 빛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을 골고루 준다는면에서요.
파이터는 익숙한 소재에 뻔한 장르 공식을 따르고 있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경쾌한 리듬과 에너지 덕분에 두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가뿐한 마음으로 극장문을 나설 수 있는 영화입니다.
** 기타 등등:
1. 파이터에는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사람이 둘 있습니다.
마을 경찰이자 미키의 또 다른 트레이너인 미키 오키프는 극 중 비중이 꽤 클뿐만 아니라 연기도 상당히 잘하십니다.
디키가 등장했던 로월의 마약 중독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High on Crack Street의 감독/제작자/촬영감독인 리차드 패럴은 극중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맨으로 등장합니다.
2. 권투 경기 장면은 실제로 90년대 HBO 경기 카메라팀이 동일한 장비를 사용해서 촬영했습니다. 중계/해설자 역시 같은 사람들로 이 영화를 위해 재녹음 했다고 합니다.
3. 영화에 극중극으로 삽입되는 다큐멘터리 High on Crack Street은 인터넷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렸을때부터 알고지낸 로월의 마약중독자 셋 -브렌다, 부부, 디키 - 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에서 사실 미키의 형 디키의 출연 비중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중간에 보석으로 나오기는하지만 촬영기간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기 때문이지요.
임신 5개월째에 로월에서 사라진 브렌다는 아이를 낳았지만 후에 마약과용으로 죽었다고합니다.
다큐멘터리에서 HIV 양성 판정을 받은 부부는 파이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진짜 미키/디키 형제와 함께 등장하기도 하는데 새삼 HIV/AIDS가 완치는 안되더라도 관리는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