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드 RED

2010.11.07 23:44

곽재식 조회 수:5022

"레드"는 얼마전에 그럭저럭 흥행했던 톰 크루즈 주연의 "나잇 앤 데이"와 매우 비슷한 소재를 쓰는 영화 입니다. 이번에는 톰 크루즈가 특수요원이 아니라 브루스 윌리스가 특수요원입니다. 특수요원인 남자주인공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CIA에서 죽이려고 하고, 그 때문에 애꿎게 평범한 시민인 여자 주인공이 대소동에 휘말려들어 모험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남녀 주인공은 눈이 맞기 마련입니다. 두 영화 다 제목에 동음이의어 언어유희도 있습니다.


(왼쪽이 "나잇" 역할. 오른쪽이 "데이"(?) 역할)

그 러면 얼마나 더 재미있느냐, 더 재미없느냐? 제가 보기에는 둘 다 비슷한 정도로 재밌었습니다. 차이점은 "나잇 앤 데이"는 남자 주인공 톰 크루즈가 웃기고, 폼잡고, 감동주고 세 박자 다하면서 갖은 개인기를 보여주는 영화로 되어 있는 반면에, "레드"는 브루스 윌리스 개인기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는 것입니다.

"나잇 앤 데이"의 특징은 이렇다고 느꼈습니다. 극히 무시무시한 지독한 최고의 살인기계 특수요원이지만, 일반 시민을 상대로 대화할 때는 매뉴얼에 실린 그대로의 "고객님" 접대하는 친절 공무원이라는 기괴한 인물을 톰 크루즈가 썩 재미나게 보여 줬기 때문에 재밌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이 역할을 맡은 주인공 톰 크루즈의 비중이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야기의 중심도 마찬가지 입니다. 줄거리 풀이도 톰 크루즈의 선악, 과거사를 하나 둘 파헤쳐 가는 형식입니다.


(살인기계 브루스 윌리스)

" 나잇 앤 데이"가 톰 크루즈 쇼에 초점을 맞춘데에 비해 "레드"는 브루스 윌리스 쇼라는 느낌은 상대적으로 훨씬 약합니다, 그저 브루스 윌리스가 말 못할만큼 기괴한 인물이라는 식이라기 보다는, 은퇴 후에 할일이 없어서 심심해서 무위고(無爲苦)를 겪는 다는 일종의 노인문제 소재 같은 것에 이야기의 발단을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퇴해서 조용하게 지루해서 미칠 것 같이 지내고 있는 퇴물 특수요원이 있는데, 위기에 몰리자 왕년의 친구들을 규합해서,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현역들에게 확실히 보여준다는 소재를 하나 더 엮어 놓은 것입니다.

그 러니 여전히 브루스 윌리스가 압도적인 주인공 역할을 하는 영화이지만, 다른 조연들의 비중도 더 높고, 한 인물의 기괴한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여러 사람들에게 얽힌 사연과 조직, 사람들간의 상관관계나 범죄 사건을 드러내는데에도 좀 더 비중이 실렸습니다.


(다시 모인 왕년의 용사들)

그 래서 이야기의 방향을 이끄는 수수께끼 풀이의 비중도 좀 다릅니다. "나잇 앤 데이"의 나쁜놈들은 그냥 "원래부터 나쁜 놈"들이고 톰 크루즈도 왜 저런짓을 하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레드"는 "도대체 왜 CIA가 새삼스럽게 은퇴한 브루스 윌리스를 죽이려 하나?" 하는 문제를 상당히 궁금하게 만들고, 관객들이 계속 관심을 갖고 그 이유에 고민을 갖도록 이끌어 갑니다. 이점은 무척 성공적으로 잘 꾸며져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 "레드"는 다양한 화면 구성, 시각 연출, 음악과 장면 연결 등등에 재미거리를 조목조목 많이 투입해 놓은 편입니다. "맛이 간 총싸움 장면"이 느린 동작으로 꾸며져 있다거나, 집 풍경을 걸레짝으로 만드는 폭풍 같은 기관총 난사 장면도 적당히 우스꽝스럽고 적당히 힘있게 잘 꾸며 놓았다고 느꼈습니다.

장소의 이동을 책표지나 그림 엽서처럼 꾸며 놓은 것 등등도 눈에 뜨였습니다. "나잇 앤 데이" 때에는 여러 도시를 바쁘게 오가며 벌어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도시와 장소의 독특한 심상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효과가 강한 장면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보면, "레드"는 좀 더 서로 다른 지역의 향토색을 잘 눌러 담아 놓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에서 소와 싸우고, 뉴욕에서는 꼭 브룩클린 다리 근처를 건너간다는 노골적인 수법도 안쓰고, 제작비를 보면 훨씬 덜 썼을 지 싶고, 그래 봤자 다 할리우드 근처에서 찍었겠지 싶은데, 그런데도 미국 각지 이곳저곳을 막 싸돌아다니면서, 미국 이곳저곳이 서로 개성 있게 달라 보이는 맛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냥 지하주자장이지만, 영화상에서는 "시카고"에 있는 지하주차장에서)

음 악은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대목이라 할만합니다. 음악이 영화 전면에 드러나는 "데스페라도"나 "황혼에서 새벽까지" 같은 장면은 없습니다만, 배경음악으로서 계속해서 가지각색으로 연주되고 있는 음악은 무척 듣기 좋았습니다. 이 영화의 장난스러운 웃음의 느낌과 풍자적인 느낌을 팍팍 살려 줍니다. 현대적인 재즈 음악을 중심으로 블루스, 록큰롤을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음악 구성이 그냥 따로 떼어 놓고 봐도 잘 어울리게 흘러가면서 무척 듣기 좋기도 합니다.


(로맨스도 있으니 재즈도 좀 나옵니다.)

다 보고나니, 주인공 영웅이 동료들을 하나 둘 모으면서, 동료 한 명 한 명의 특색에 따라 서로 다른 장소, 서로 다른 성격의 모험을 벌이고, 마지막에 동료들을 모두 모아 크게 최후의 대결전을 벌인다는 정석 그대로의 극히 전통적인 이야기 뼈대 위에, 소재들을 풍자적인 웃음거리로 쓰면서 재치 있는 연출로 잘 엮어 놓은 준작이라 할만하다 싶었습니다. 중세 유럽의 수많은 영웅 서사시들이 영웅이 동료들을 모아 마왕을 물리치는 내용이거니와, "서유기" 같은 고전걸작도 삼장법사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각각을 만날 때 마다 한가지씩 모험을 겪고, 동료들을 다 모은 후에는 패거리로 더 심한 모험들을 겪는다는 구조이니, 써먹을만한 구조를 잘 써먹은 영화였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영화의 독특한 소재가 제대로 끝까지 피어나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노인문제의 중요한 소재인 "은퇴하고 난 뒤에 할 일이 없다"라는 대목은 잠깐의 농담거리로 지나칠 뿐이고, 주인공 브루스 윌리의 활약의 모습은 "나인 야드" 이후 굳건히 자리잡은 "꼬인 농담을 잘 하는 터프가이" 브루스 윌리스 그대로 입니다. 살짝 끼어드는 듯한 정치인들의 행태나 미국 외교의 개입주의에 대한 비판도 그냥 이야기 연결하는 소재로 한 번 짚고 넘어가면서 스쳐 지나가는 수준이었습니다.


(존 말코비치와 브루스 윌리스)

뭐, 그래도 맨날 보던 것이긴 해도 재미나긴 재미납니다. 깝죽거리는 악당들을 상대하기 위해 급정거해서 빙빙도는 차에서 걸어내려서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굳건히 권총을 쏘는 브루스 윌리스의 작렬하는 얼굴 인상쓰기를 보십시오. 게다가 과대망상증적인 CIA 음모론에 빠진 반미치광이역할을 기막히게 해내고 있는 무기 오타쿠 역할의 존 말코비치의 모습은 빼어난 호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결 말을 미리 밝히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다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암살작전의 성패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런류의 영화에서는 주요 인사는 꼭 암살될 듯 될 듯 하다가 안되는 것이 "자칼" 이후의 전통인 듯 합니다. 그런데 스머프를 보다보면 언젠가는 가가멜이 스머프를 잡아 먹는 모습도 좀 보고 싶고, 톰과 제리를 보다보면 언젠가는 톰이 제리를 씹어 먹는 모습도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런 영화에서도 그냥 화끈하게 요인을 뜻대로 확 암살해서 없애 버리는 장면이 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앞뒤 안따지고 시원하게 암살 성공시켜버린 영화가 무엇이 있겠는고... 생각해 봅니다만, 결국 쿠엔틴 타란티노가 감독을 맡은 영화 하나 밖에 생각이 안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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