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8 22:25
수정의 눈 Occhi di cristallo
이탈리아-스페인, 2004. ☆☆☆★★★
A Rai Cinema/Cattelya Alquimia Cinema/Nimar Studios/The Producers Ltd. Co-Production. 화면비 1.78:1, 1시간 47분.
Director: Eros Pugilelli
Music: Francesc Gener
Editing: Mauro Bonnani
Cinematography: Luca Coassin
Production Design: Antonello Rubini
Executive Producer: Matteo De Laurentiis
Screenplay: Franco Ferrini, Gabriella Blasi, Eros Puglieli
Based on the novel “L’Impagliatore” by Luca Di Fulvio
CAST: Luigi Lo Cascio (쟈코모), Lucia Jimenez (지우디타), Jose Angel Egido (프레세), Simon Andreu (아자시오), Carmelo Gomez, Eusebio Poncela (시비타 교수)
[수정의 눈] 은 유럽 호러영화를 선호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리뷰를 다 읽으시지 않아도 좋으니 무조건 손에 넣으실 것을 강력 추천드리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최근에 드물게 보는 역작입니다.
이 영화에서 에로스 퓨리엘리 감독이 해낸 것은 2000 년대의 현대적인 기술과 노우하우를 하나도 희생시키지 않고 60년대와 70년대에 반짝했다가 사라져갔다고 여겨지는 “지알로” 장르를 완벽하게 재생한 것입니다만 그 완성도는 깜짝 놀랄 정도로 높습니다. 까놓고 얘기해서 다리오 아르젠토 자신도 제가 보기에는 [디프 레드] 이후에는, 바꿔 말해서 지난 35년 동안, [수정의 눈] 보다 더 나은 지알로 계통 작품을 내놓은 바가 없습니다. 북미 시장에는 가장 최근에 공개된 에이드리언 브로디 주연의 [지알로] 가 알선생의 최근작 치고는 그래도 가장 좋다고 하는데, 실제로 [수정의 눈] 과 비교해보면 죄송하지만 상대가 안됩니다. 아예 제목에 [지알로] 라고 달려 있고 원조 알선생께서 손수 감독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까마득한 후배인 퓨리엘리가 스페인 캐스트 고용해서 아마도 훨씬 적은 예산으로 뚝딱 찍어낸 이 영화보다 퀄리티 뿐만 아니라 지알로라는 장르에 대한 충실도, 즉 “정통성” 에서 한참 떨어진다는 겁니다. ([지알로] 는 이 작품에 비교하면 그냥 연속 살인범 쫓는 경찰 범죄물입니다) 아이러니칼하지만, 어떻게 보자면 당연한 결과이지요. 알선생은 계속해서 자신의 화법을 고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오히려 조금씩 동시대적 영화의 별로 달갑지 않은 측면을 자꾸 받아들이는 듯 한 반면 퓨리엘리 감독은 요즘 세상에 걸맞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지알로라는 이탈리아 고유의 서브 장르를 재창조하고 있으니까요. 지알로란 이런 거다, 하고 책상물림으로 공부한 감독이 그런 요소들을 얼기설기 끼워맞춰서 “조립” 한 “포스트모던” 한 영화가 전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정의 눈] 에는 이탈리아 호러 영화 팬들이 예상할 수 있는 지알로의 공식들이 거의 다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얼굴은 안 보여주지만 손은 열심히 화면에 나오고 (살인을 할 때 끼었던 가죽 장갑을 벗는 것까지 보여줍니다) 또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엽기적인 신체 훼손 범죄를 저지르는 연속 살인범. 그 범인의 어릴 적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살인의 동기. 엽기적이면서도 “예술적” 인 살인의 방법과 그 결과물의 관음증적인 현시. 여자 주인공과 약간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심리적인 갈등을 겪는 남자 주인공. 혐오감과 탐미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을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비주얼. 그리고 “보는 것” 과 “시각 기관” 즉 “눈,” 그리고 “기억” 특히 “부정확하거나 핵심적인 디테일이 빠져있는 기억” 에 대한 거의 편집증적인 집착.
빼먹은 거 뭐 있습니까?
아 심지어는 마리오 바바 지알로에 등장하곤 하는 “마네킹/인형” 이 소도구 정도가 아니고 아예 플롯의 중요한 요소로서 출연하기까지 합니다.
지알로를 재미있게 보시려면 관객으로서 정말 하지 말아야 하는 행위의 1 순위는 “내용” 타령인데, 이 [수정의 눈] 의 “내용” 도 정말 지독하게 “뻔” 합니다. 살인의 방법에 무슨 독특한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범인을 특별히 지목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며 (그러나 일부러 범인이 지닌 육체적 특징을 크게 부각시키는 충격적인 도입부를 집어 넣어서 관객들에게 도전하는 것을 보면 푸질렐리 감독은 배짱이 든든한 분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무대 마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육체적 특징에 집중하다 보니까 다른 개연성 있는 요소들을 놓치게 만드는 고단수 트릭으로 기능하고 있기도 합니다) 범인의 연속 살인 뒤의 동기는 다른 영화도 아니고 한석규-심은하 나오는 [텔미 썸싱] 과 거의 동일합니다. 그러나 누가 고기와 야채가 남다르다고 그 맛을 보려고 지알로를 찾습니까? 셰프의 멋들어진 요리솜씨에 도취되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 찾지.
퓨리엘리의 스타일은 요즈음에는 지겹도록 쓰여지는 수사인 “오페라틱” 한 작극법입니다. 연출의 필치는 굵고, 색채는 강렬하며, 카메라는 날카롭기 그지없게 날이 서 있습니다. 클라이맥스에서 처럼 어떤 장면을 보는 인물의 눈동자로 카메라가 들어가는 정도로는 성이 안차서, 그 눈동자로 들어간 카메라가 거기에 비춘 다른 존재의 눈동자로 또 들어가는 이중 “투시” 효과를 전시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스타일 말씀이죠.
그러나 (오우삼 빼고) 오페라틱하다는 소리 듣는 뛰어난 감독들 (예를 들자면 대런 아로노프스키!) 이 그렇듯이, 푸질렐리도 과욕만 부리고 실속은 없는 그런 호흡을 고를 줄 모르는 영화 만들기를 하고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급속하게 위기를 불러 올 것 같은 긴장된 상황을 두고, 폭발적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써늘하게 옆에서 잽만 탁 날리고 빠지는 그런 얄미운 통제력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쟈코모가 병원의 살인 현장을 발견하고 큰 정신적 타격을 입은 채 범인의 뒷모습을 기를 쓰고 추격하다가 어느새 수술실에 (장갑을 끼고 칼을 든 남자!) 뛰어들어간 채 얼떨떨한 상황을 맞는 장면 같은 데에서 그런 냉랭한 위트를 동반한 연출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인공 쟈코모 형사역의 루이지 디 카시오 연기자가 감독을 두고 “(쉬르레알리스트가 아니고) 하이퍼 리얼리스트” 라고 규정하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견 물리적 현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붕붕 날라다니는 것 같지만 의외로 핵심은 (특히 사람의 “몸” 에 초점을 맞춘) “리얼리티” 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60-70 년대 지알로와 차별점이라고 한다면 연기자들이 모두 굉장히 논리적인 대사 ( ^ ^) 를 읊으면서 상당히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하고 있다는 건데요. 디 카시오연기자는 검색을 해보니 굉장히 늦깍이로 데뷔해서 주로 인텔리역을 맡아온 분인 모양인데, 백종학프로듀서가 원래 조재현연기자를 설정하고 쓰여진 역할을 맡아서 맛이 가기 일보직전의 캐릭터 연기를 하는 것 같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주연 여우 루시아 히메네스를 비롯한 몇몇 중심적 조연들이 스페인 사람들입니다. 거기다 더해서 영화 중간에 한 중요 캐릭터의 어린 시절을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그 “고아원” 의 묘사는 영낙없이 델토로 그런 분들한테서 익숙한 스페인 호러영화의 그것이에요 또. 내용상으로의 연계는 무리가 없지만 영상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확연히 차별이 되더군요. 이런 이탈리아 영화안의 “스페인적” 요소가 본바닥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결론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도 할 줄 알았으면 좋겠어요 ㅜㅜ )
지알로 장르의 계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무지막지하게 변태적이고 막가는 듯 하면서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멜랑콜리한 뒷맛을 남긴 다는 점에서, 처음 보기 시작하면 추잡스런 에로영화같은 인상을 주지만 끝판에는 쓸쓸하게 길을 걸어가는 주인공의 복잡한 심정에 공감하게 되는 [타란튤라의 검은 배때기] 의 제자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타란튤라] 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전 지알로를 실력면에서 능가하는 아주 잘 만든 스릴러입니다. [양들의 침묵] 보다는 좀 떨어지지만 [세븐] 이나 [맨헌터] 정도의 수준은 충분히 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제 주관적인 시점에서 보는 거니까 그걸 고려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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