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폰 베라는 제2차 세계대전 시절 나치 독일의 공군 소속 상급 중위였습니다. 군인으로서의 업무 수행 능력도 괜찮았고, 자기 포장도 할 줄 알아서, 괜찮은 전적을 올렸고 그 전적을 부풀려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정말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하늘이 아니라 땅 위에서 발생했습니다. 1940년 9월 5일, 그는 영국 영공에서 전투를 벌이다 격추된 뒤 전쟁 포로 생활을 시작합니다. 여러 차례의 탈출 시도와 실패를 겪은 뒤, 폰 베라는 1941년에 영국에서 캐나다로 이송됩니다. 캐나다에 도착한 그는 포로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기차에서 탈주, 당시만 해도 아직 중립국이었던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캐나다와 미국 정부는 그를 다시 캐나다로 되돌려 보내는 문제에 대해 교섭을 진행했지만 그러는 사이 미국 주재 독일 대사는 폰 베라를 멕시코로 빼돌리고, 그는 브라질, 스페인, 이탈리아를 거쳐서 1941년 4월 18일 마침내 독일로 돌아와 국민의 영웅으로 추대되며 히틀러에게 철십자 기사 훈장을 수여 받습니다. 캐나다의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독일로 돌아온 유일한 추축국 포로인 그의 이야기는 1956년 영국 작가 켄달 버트와 제임스 리조의 손을 통해 The One That Got Away라는 책으로 옮겨지고, 이듬해인 1957년에 역시 영국에서 책을 바탕으로 로이 워드 베이커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가 개봉됩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10여년이 지난 상황에서 탈출에 성공한 나치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영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아주 생각 못할 기획은 아닙니다. 이미 한창 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시절에도 영국 감독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가 캐나다를 가로질러 미국으로 도망가고자 하는 나치 독일의 U-보트 승무원들을 주인공으로 한 선전 영화 〈위도 49도선〉(49th Parallel, 1941) 같은 영화를 만든 전례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영화는 독일군이 다양한 캐나다인들을 만나면서 이념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각개격파 당한다는 식의 방향을 취하고 있었던 반면, 이 〈탈주자〉는 자긍심 높은 나치 장교가 탈주에 기어이 성공하고야 만나는 내용이니 파격적인 맛은 있습니다. 승자의 여유도 누렸겠다, 더불어 특히 유럽 대륙의 여러 국가들과 달리 독일에 국토를 빼앗긴 일이 없는 영국에서 손을 댔기에 가능했던 ‘관대한’ 기획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당연한 선택이지만, 영화는 이념 대립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에는 별 관심이 없고 탈주 과정 자체에만 주목하는 오락물의 형태로 완성되었습니다. 이미 패전 이후 공인된 악의 축으로 낙인찍힌 나치를 상대로 사상을 교환한들 탈주극 만드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실제로 초반부에 잠시 폰 베라가 독일인들은 강인하며 따라서 너희 영국은 질 수밖에 없다, 는 식의 논의를 펴지만 영국인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뿐더러 폰 베라 스스로도 심문을 앞두고 상투적인 논리를 읊어 본 것일 뿐 실제로는 나치의 신념에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는 단지 하염없이 콧대 높고 자신만만한 인간이라 이쯤은 나에게는 별 것도 아니라고 선언하기라도 하려는 듯 탈주에 나설 뿐입니다.

 그렇다고 〈탈주자〉가 무슨 〈대탈주〉(The Great Escape, 1963)처럼 하염없이 유쾌한 오락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단 관객이 주인공의 매력에 흠뻑 빠질 필요가 하는데, 만약 그 선까지 나갔더라면 아무리 정치색을 배제하고 만들었다 한들 거센 비난을 피하지 못했겠지요. 그래서 영화는 폰 베라의 인간적 매력을 찬찬히 짚어주는 대신 탈주 과정의 아슬아슬함을 사실적으로 따라가는 쪽에만 몰두합니다. 물론 탈주 과정에서 서스펜스를 느끼기 위해서는 관객이 어느 정도 폰 베라의 편에 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알프레드 히치콕이 그의 많은 영화를 통해 증명했듯, 어떤 상황에서 한 인물에 대해 이입(identify)하도록 하는 것은 그 인물에 대해 공감(sympathize)하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이입은 사상적인 동의가 아니라 영화적인 운동이 주는 쾌감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다음 운동에 대한 기대를 통해 이뤄지기 마련이며, 〈탈주자〉를 보는 관객이 폰 베라에게 이입한다는 사실은 곧 그 관객이 쫓기는 자와 쫓는 자가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상황 자체가 주는 쾌락을 원하고 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를 위해서 폰 베라라는 한 인간의 과거, 속내, 취미, 인간관계 따위까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관객에게 제공되는 그의 심리는 대체로 탈주에 대한 자신감과 불안감 사이만을 오가며, 그걸로 충분합니다. 폰 베라의 동료들에 대한 묘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통상 연합군 포로들이 탈출하는 내용을 다루는 영화들이 팀플레이에 참여하는 다양한 군상들의 유대 관계를 즐기는 반면 〈탈주자〉에서 폰 베라의 동료들은 철저히 탈주를 돕기 위한 장치로서만 사용됩니다. 너무 ‘인간적’일 필요는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물 자체를 아끼기 보다는 행동을 세밀히 관찰하며 따라가는 데에 방점을 찍는 식의 ‘냉정한’ 접근법은 폰 베라에 대한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영화의 모든 요소에 스며들었습니다. 그 결과 장르 전쟁 오락물 특유의 낭만과 여유가 사라지고 건조한 사실주의가 자리를 잡습니다. 모든 장면, 모든 인물이 극성을 배제한 채 언제나 효율을 우선으로 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유형의 영화에서는 죄수의 탈출 소식을 들은 간부가 ‘무엇이 어쩌고 저째?!’하며 화를 내거나 입술을 깨무는 등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 그리고 탈출 경로나 방법이 뒤늦게 발견되는 장면 따위가 흔히 나오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그런 데에는 눈길 한 번 안 줍니다. 〈탈주자〉는 도망가는 자와 잡으려는 자의 수법에 관한 영화일 뿐, 둘 사이의 감정적인 격돌에 집중하거나 도망간 쪽의 우세에 손을 들어주면서 씨익 웃어 보이는 데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긴장을 늦춰주기 위해 집어넣은 개그용 장면이나 대사도, 서로 다 아는 사실을 굳이 관객에게까지 확인시켜주기 위해 만들어 놓은 대화도 없습니다. 〈탈주자〉는 단 한 순간에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한 다음 굳이 반복하는 일 없이 다음 장면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근면하고 검소한 영화입니다.

 이런 접근법은 대체로 감시자 쪽이 불리하기 마련인 탈주극 장르 안에서 영국군의 위신을 지켜주는 동시에 서스펜스의 강도를 높여주었습니다. 폰 베라의 탈주는 숫자만 많을 뿐 결국 하는 짓은 스톰 트루퍼보다 조금 나은 수준인 적군을 골탕 먹이듯이 유쾌하게 이뤄지지 못합니다. 그가 상대하는 영국인들은 모두 폰 베라 만큼이나 상식적이고 자신의 일에 성실합니다. 영국군들은 포로가 탈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막상 일이 터졌을 때 당황하거나 화를 내는 따위의 상상력 빈곤한 인간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포로의 탈주에 대비한 수색 계획을 몇 개씩 마련해 두고 있으며, 그 계획을 잘 활용합니다. 더구나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적군의 장교를 상대하는 영국군의 경우, 성실하다는 말은 곧 폰 베라와 맞먹거나 그를 능가할 정도로 교활하다는 의미입니다. 영국군 장교가 폰 베라의 치부를 하나씩 들춰내면서 궁지로 몰아가고, 완전히 한 방 먹은 폰 베라가 땀을 뻘뻘 흘리고 말을 더듬으면서도 ‘이번에 제대로 맞기는 했다만 정말 네가 원하는 건 따로 있지?’하는 태도로 끝까지 버티는 심문 장면은 정보를 풀어내는 타이밍으로 심리를 농락하는 것만으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서스펜스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액션 장면에만 정성을 들입다 퍼부을 뿐 정보-심리전은 흉내 수준으로 끝내고 마는 수많은 첩보영화들은 이런 걸 보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농촌 아낙부터 기차역 역장까지, 일반 시민들 역시 자기네 땅에 적군을 가두고 있는 포로수용소가 있고 지금이 전시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신경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를 늘어놓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의심하는 게 자연스럽고, 주변의 눈길 한 번이나 잠깐의 침묵 하나하나가 폰 베라를 궁지로 몰아가며, 관객을 더욱 깊이 몰입하게 만듭니다.


 명암 깊은 흑백 촬영, 단촐한 실내 세트와 영국의 척박하고 날씨 궂은 교외 풍광을 능수능란하게 오가는 연출, ‘지금 여기서는 관객 여러분께서 긴장을 해주셔야 합니다’하고 티 내지 않으면서도 심장을 쥐락펴락 하는 편집, 결말부의 거의 무성영화처럼 전개되는 긴 대목을 제외하면 웬만해서는 음악을 철저히 배제하고 음향 효과에만 집중하는 선택 모두 영화의 사실성을 강화해주는 가운데, 특히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입니다. 크루거야 애초에 영화의 중심에 서서 상영시간 내내 온갖 고생 다 하며 인상을 쾅쾅 박는다 치더라도 그의 주변에 포진해 있는 조역 및 단역을 맡은 배우들은 어쩜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표정 하나 제스처 하나에서 복잡한 심경이 느껴지는 연기를 해내고 있는지? 비밀리에 시험 운용 중이던 신형 폭격기를 조종하다가 추락했다는 폰 베라의 거짓말을 들은 영국 공군 훈련 비행장 당직사관이 이런 소리는 도대체가 얼토당토않지만 한편으로는 또 전시이고 하니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정중함과 불안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어떻게든 상대에 대한 확신을 가져보려고 애쓰는 모습 같은 걸 보고 있노라면 ‘웬만한 장르 전쟁 영화에서는 남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기나 하는 이런 중간 관리자 계급 캐릭터를 가지고 이 정도의 긴장과 희열을 끌어내다니’ 하는 놀라움에 절로 고개를 숙이면서 세상은 넓고 영화는 많으며 명연은 어디에나 있다는 진리를 새삼 되새기게 됩니다.

 로이 워드 베이커 감독은 듀나 님께서 예전 사이트에서 리뷰하신 바 있는 타이타닉 침몰 영화 〈기억에 남을 밤〉(A Night to Remember; 타이타닉 호의 비극, 1958)이라든가 Q 님께서 자주 다루셨던 해머 스튜디오의 후기 공포 영화들을 통해 알려진 장인형 연출자입니다. 저로서는 그의 연출작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 정도 수준의 성취라면 비록 ‘작가적 야심’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연출가의 경력 안에서 특별히 되새길 만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대충 속 편한 전쟁포로 탈주극을 기대하고 본 작품이고 어느 정도 그런 영화이기는 하나 〈제17 포로수용소〉(Stalag 17, 1953), 〈대탈주〉, 〈폰 라이언 특급〉(Von Ryan's Express, 1965) 등의 할리우드식 유쾌함과 화려함이 배어든 오락물보다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1965)처럼 영국식으로 착 가라앉은 채 진행되는 첩보-심리전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 보신다면 더 만족하실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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