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일하고 있는 영화사 블로그에서 연재 중인 ‘빛결의 영화 이야기’에서 가져왔어요. 원본 링크는 여기에요. https://m.blog.naver.com/kimuchangmovie/222610019645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영화를 본 사람만 읽기를 바란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는 히치콕이 만든 가장 오락적인 영화 중의 한 편이자 히치콕 영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첩보 스릴러의 걸작이다. 이 영화는 007 시리즈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007 영화에서 반복되는 원형적인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첩보 요원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미녀와 협력해서 악당을 처단한다는 내용인데 <북북서로…>는 007과 비슷한 인물 구도로 전개된다. 007 시리즈와 차이점이 있다면 <북북서로…>의 주인공의 경우에 원래는 첩보 요원이 아니었으나 누명을 벗기 위해 첩보 요원처럼 행동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북북서로…>는 히치콕이 야심차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흥행에 실패하고 평론가들에게도 외면받았던 <현기증>(1958)이 완성된 바로 다음 해에 만들어졌다. 히치콕은 가벼운 마음으로 오락영화를 한 편 찍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북북서로…>는 히치콕의 5대 걸작에 들어갈 정도의 빼어난 완성도를 가진 작품이 되었다.

광고 회사의 중역인 로저 손힐(캐리 그랜트)은 우연한 계기로 인해 조지 캐플란으로 오인되고 괴한들에게 납치된다.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괴한들로부터 탈출한 손힐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조지 캐플란의 정체를 밝히려는 과정에서 살인범으로 몰리게 된다. 경찰과 괴한들의 우두머리인 밴담(제임스 메이슨)에게 동시에 쫓기는 신세가 된 손힐은 도주하던 중 시카고행 열차 안에서 이브 캔들(에바 마리 세인트)을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북북서로…>는 첩보 스릴러의 외양을 띤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히치콕의 많은 영화들이 사실 스릴러의 외양을 띤 멜로드라마인데 두 남녀가 사랑을 이루는 게 핵심이고 사랑을 이루는 과정에서 스릴 넘치는 모험을 하기 때문에 스릴러적 요소가 동반된다. <북북서로…>에서도 손힐과 캔들이 맺어지기 위해서 두 남녀는 죽을 위기에 처할 정도의 모험을 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히치콕의 영화에서 많은 경우에 두 남녀의 사이에는 또 다른 여성이 개입을 한다. 그 여성은 남자의 어머니이거나 남자와 가깝고 모성애적 성향이 강할 때가 많다. 한 여성이 두 남녀 사이에 개입함으로써 삼각 관계가 형성되고 히치콕 영화 속 주인공 남자는 그러한 삼각 관계에서 한 여성의 통제에서 벗어나 그가 사랑하는 여성과의 사랑을 쟁취해내야 한다. 이러한 삼각 구도가 등장하는 영화들로는 <오명>(1946), <현기증>(1958), <싸이코>(1960), <새>(1963) 등이 있다. 

<북북서로…>에서도 손힐은 강력한 어머니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는 다 큰 마마 보이인 것이다. 그가 조지 캐플란으로 오인을 받게 되는 것도 어머니가 걱정되어 웨이터를 부르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그가 인생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원인 제공을 하게 된 게 바로 그의 어머니이다. 손힐의 어머니는 그가 음주 운전과 관련하여 결백을 주장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때에도 마치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에 대해 냉담하게 반응한다. 손힐은 어머니로부터 벗어나 홀로 행동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오인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모험을 하게 된다.

<북북서로…>는 카프카적인 스릴러이다. 손힐이 조지 캐플란으로 오인을 받고 영화 내내 쫓기는 상황 자체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마치 카프카의 ‘심판’에서 주인공 K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유죄 판결을 받은 상황과 유사하다. 프랑수아 트뤼포도 ‘히치콕과의 대화’에서 히치콕의 영화들이 카프카적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히치콕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쫓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많은 영화들의 경우 주인공의 누명이 벗겨지면 영화가 끝난다.

또한 <북북서로…>는 히치콕 특유의 서사 장치인 맥거핀을 전면적으로 활용한다. 좀 과장해서 얘기를 하자면 이 영화 전체가 거대한 맥거핀처럼 보이기도 한다. 맥거핀은 간단히 얘기를 하자면 서사적으로 봤을 때 일정 부분의 기능을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39계단>(1935)에서 암호인 ‘39계단’과 <오명>에서의 우라늄이 이에 해당한다. <북북서로…>의 경우에 밴담이 조각상 안에 숨기는 마이크로 필름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조지 캐플란이라는 인물이 맥거핀이다. 마이크로 필름의 경우 영화의 말미에 가서야 맥거핀임이 밝혀지는 반면에 조지 캐플란의 경우 영화의 초반에 이미 조지 캐플란은 허구적 존재라는 것이 밝혀지지만 이 인물은 극을 계속 끌고 나가는 역할을 한다. 

조지 캐플란이 극 속에서 계속 기능을 하는 것은 히치콕이 그가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을 오직 관객에게만 알려주기 때문이다. 손힐은 CIA 관계자를 만날 때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밴담 일당 또한 손힐이 조지 캐플란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극중 인물들이 공유하는 정보의 차이로 인해 조지 캐플란은 계속 극을 이끄는 동기 부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북북서로…>는 실재하지 않는 인물에 의해 작동하는 영화인 것이다. 

그런데 히치콕의 영화에서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하는 건 <북북서로…>가 처음이 아니다. <북북서로…> 이전 영화들로는 <레베카>(1940)와 <현기증>이 있으며 <북북서로…> 다음 영화로는 <싸이코>가 있다. <레베카>에서 레베카는 막심(로렌스 올리비에)의 전 아내로 죽은 존재이지만 영화 내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현기증>에서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는 실재하지 않는 매들린과 사랑에 빠져서 정작 매들린을 연기하고 있는 실제 인물인 쥬디와는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 <싸이코>에서 노먼 베이츠(안소니 퍼킨스)는 죽은 존재인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흥미롭게도 실재하지 않는 존재는 영화와 연결될 수 있다. 영화는 초창기부터 뱀파이어와 비교되어 왔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에서는 이러한 유령성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영화는 2차원의 평면에 투사되는 이미지를 3차원적으로 받아들이는 착시 효과에 의해 성립한다. 애초에 착시 효과에 의해 성립한다는 것 자체가 영화가 허상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이렇게 본다면 <북북서로…>에서의 조지 캐플란은 영화적 존재로 영화와 유사한 속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조지 캐플란에 의해 <북북서로…>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의 메커니즘을 메타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조지 캐플란과 같이 텅 비어 있는 존재가 사람들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냉전 시대를 바라보는 히치콕의 고도의 유머일 수도 있다. 히치콕이 볼 때 이데올로기란 실체가 없으며 실체가 없는 것이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지배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조소하고 있는 것이다. 손힐이 광고 회사의 간부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제대로 규명하는 광고를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또한 미국 자본주의 사회를 신랄하게 비꼬는 히치콕의 냉소적인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체가 없는 것을 쫓고 쫓는 한바탕의 소동이 끝나면 이혼남인 손힐과 사연이 많은 여성인 듯 보이는 캔들은 부부가 된다. 마이크로 필름을 둘러싼 이 소동은 남녀의 짝짓기에 들러리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아니 실제로 손힐과 캔들이 부부가 된 것과 첩보전이 어떤 관계에 있는 건지 밝히기도 쉽지 않다. 기껏 점잖은 척 폼을 잡아가며 두뇌 싸움을 하고 죽을 위기를 넘겨도 남녀 짝짓기만도 못하다니 참 당황스러울 노릇이다. 이렇게 히치콕은 빅 엿을 날리며 19금 유머로 영화를 우아하게 마무리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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