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세계문학단편선 대실 해밋

2014.12.03 20:07

곽재식 조회 수:1943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본격적인 개척자라 할 수도 있고, 동시에 그 바닥에서 가장 명망 높은 거장이라할만한 작가의 단편집이, 세계문학단편선 제4권 “대실 해밋”입니다. 진작에 “말타의 매” 같은 대실 해밋 소설이 소개되어 나왔던 것에 비하면, 대실 해밋의 또다른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단편선이 뒤늦게 이제야 출간된 것은 무척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말타의 매” 보다 이 책을 훨씬 더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런 만큼, 대실 해밋의 대표작, 하드보일 탐정소설의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는 멋진 소설들이 모여 있는 책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대실 해밋 소설 중에 이름이 없이 그냥 1인칭 주인공 “나”라고만 나오는 컨티넨탈 탐정 회사의 직원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즉 컨티넨탈 탐정 시리즈인데, 상당수 이야기가 거의 중편 수준의 분량입니다.

이야기들은 훌륭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탐정소설이라고 하지만, 추리소설에서 기대할 만한 정교한 범죄 속임수, 예리하고 통찰력 넘치는 추리 기법 같은 점은 별로 강조된 편은 아닙니다. 대신에 평범하다면 평범한 수준으로 차근차근 사건을 수사해 나가는 주인공의 시각으로 범죄에 얽혀 있는 가해자, 피해자들의 사연, 성격, 감정이 드러나면서, 그 와중에 애잔한 부분도 있고, 반전도 있는 소설들이었습니다.

그런 절절한 감정을 다루는 이야기이지만,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인 만큼 그걸 굳이 절절하게 긴 문장으로 파헤친다거나 끈끈한 서술로 장황하게 늘어 놓는다거나 하는 대목은 적었습니다. 비정하게, 쓸쓸하게 한 두마디 툭툭 내뱉으며 읊어 대는 사이에, 그 몇 마디로 훌륭한 인물의 타락이나, 끓어 오르는 욕망의 허망함이 간단히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덕분에 탐정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먹고 살자고 일하는 직장인일 뿐인 주인공의 개성은 더욱 강조되었고, 한편으로는 짤막짤막한 일견 정이 부족해 보이는 서술 속에서 인간사의 쓸쓸한 면이 더 잘 느껴지는 맛도 좋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개성 넘치는 묘사들이 울적하지만 낭만적인 풍경, 다들 특성이 뚜렷한 등장인물들은 똑똑히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1인칭 주인공 "나"의 독백이 간간히 나오는 운치는 과연 그 시절 하드보일드 탐정소설과 고전 느와르 영화 느낌이 아주 짙게 났습니다.

대체로 이야기들은 진상이 드러나면서 범죄자, 또는 반대로 범죄피해자들의 어두운 면이 서서히 밝혀지는 형태인 것들이 많습니다. 그 어두운 면이라는 것이 극적으로 잘 어울리게 갖춰져 있는데다가, 결정적인 형국에서는 처절해 지는 것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무서운 범죄자라고는 하지만, 망한 인생 먹고 살자고 죄를 저지르는 그 감상이 잠깐 불쌍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한편으로는 힘이 넘치고 압도적인 범죄자가 아니라 그런 밑천 없는 인생들이라는 생각에 더 폐인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 재미난 이야기들이었습니다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두 편만 골라 보자면, “불탄 얼굴”과 “국왕 놀음”입니다.

“불탄 얼굴”은 발단과 전개에서 흥미롭게 인물들을 보여 주고, 그러면서 보여 주었던 복선을 결말에서 몇 마디 말로 화려하게 반전으로 이끄는 재주가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의 덤덤한 서술과 행동 속에서 그야말로 비정한 하드보일드 탐정의 면모가 드러나지만, 그러면서도 직장인으로서 일을 처리하는 탐정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 오히려 더 인간적인 감성이 가깝게 느껴지는 맛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국왕 놀음”은 이 책에 실린 다른 이야기와는 약간 다른 특이한 면이 더 눈에 뜨여서 기억에 남은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배경이 미국이 아니라 먼 외국에서 펼쳐지고, 다른 이야기들 보다 유머, 농담이 조금 더 강조된 형태였습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번역된 “데이먼 러니언” 단편선에 나오는 "국왕 폐하를 위해 건배!" 와도 비슷한 소재였고, 영화 중에는 “테일러 오브 파나마” 같은 이야기와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혼자서 한 나라의 흥망을 뒤흔들 수도 있는 문제와 다투는 스파이 소설 같은 정취도 있었습니다. 정치, 외교적인 문제까지 같이 풍자하는 깊이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국적인 배경에서 펼쳐지는 동화 같은 환상적인 맛도 있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78507
596 [영화] 무서운집 [3] menaceT 2015.08.20 2280
595 [영화]무도회의 수첩[스포일러!] [2] ally 2015.08.13 1661
594 [시집] 나는 왜 네 생각만 하고 살았나 [1] underground 2015.08.11 1596
593 [영화] 환상동화 Horsehead <부천영화제> <유로호러-지알로 콜렉션> [6] Q 2015.07.28 2009
592 [영화] 나를 찾아봐 We Are Still Here <부천영화제> Q 2015.07.25 2098
591 [영화] 쌍생령 Twin Spirit (차예련 주연) <부천영화제> [2] Q 2015.07.23 2243
590 [영화] 하빈저 다운 Harbinger Down <부천영화제> [2] Q 2015.07.21 2571
589 [영화] 흑면 The Black Sleep Q 2015.07.11 2077
588 [영화]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 Q 2015.07.11 4858
587 [드라마] 맨도롱 또똣 [4] 감동 2015.07.03 2883
586 [드라마] 프로듀사 감동 2015.06.21 10702
585 [영화] 미이라 The Mummy (1958) (크리스토퍼 리, 피터 쿠싱 주연) [1] Q 2015.06.16 2421
584 [영화] 매기 Maggie (아놀드 슈워제네거, 애비게일 브레슬린 주연) Q 2015.05.22 3302
583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2] Q 2015.05.21 4618
582 [드라마]슈퍼대디 열 [2] 감동 2015.05.03 2489
581 [영화]미스터 터너-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예술가의 초상 [1] ally 2015.04.17 2270
580 [영화] 팔로우 It Follows [1] Q 2015.04.12 3600
579 [영화] 내가 잠들기 전에 Before I Go to Sleep (니콜 키드먼, 콜린 퍼스 주연) Q 2015.04.02 3570
578 [영화] 채피 -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이군 2015.03.15 2618
577 [영화] 더 블롭 (1988년도판) The Blob [3] Q 2015.03.08 310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