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일하는 영화사 블로그에서 연재 중인 ‘빛결의 영화 이야기’에서 가져왔어요. 원본 링크는 https://m.blog.naver.com/kimuchangmovie/222652072985 입니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영화를 본 사람만 읽기를 바란다.)


히치콕의 예찬자였던 프랑수아 트뤼포가 ‘가장 사랑하는 흑백 영화’라고 했던 알프레드 히치콕의 <오명>(1946)은 히치콕의 대표작 중의 한 편으로 빼어난 첩보 스릴러이자 멜로드라마다. 벤 헥트가 쓴 각본도 높게 평가받을 만한데 그는 이 영화의 각본으로 오스카 각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 영화는 남녀 주연으로 출연한 잉그리드 버그만과 캐리 그랜트의 대표작 중의 한 편이기도 한데 그들은 이 영화에서 빼어난 외모를 통한 스타성을 입증하는 한편 로맨틱한 커플로서의 연기도 완벽하게 해냈다. <오명>은 히치콕의 또 다른 대표작인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와 관련이 있기도 하다. 일정 부분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는 <오명>의 변주로 느껴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오우삼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 2>(2000)에 의해 거의 리메이크되다시피 한 적이 있고 2020년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2020)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나치 첩자의 딸로 오명을 얻은 알리시아 후버만(잉그리드 버그만)은 감시를 받는 가운데 향락적인 파티에서 매력적인 남자인 데블린(캐리 그랜트)을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는 데블린이 미국 정보부 요원인 것을 알게 되고 그의 제안에 의해 리오데자네이루에 가서 나치 일당들을 상대로 첩보 활동을 펼치게 된다. 급기야 첩보 활동을 위해 나치 일당 중 한 명인 세바스찬(클로드 레인즈)과 결혼하게 된 알리시아는 어느 날 세바스찬의 저택에 있는 와인병에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되고 데블린과 함께 그 비밀을 밝히려고 몰래 와인 창고에 숨어들게 된다.

<오명>의 외양은 분명히 첩보 스릴러이지만 이 영화는 사실 멜로드라마의 성격이 더 강하다. 이것이 히치콕 영화의 흥미로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히치콕은 일반적으로 서스펜스 스릴러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고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영화들을 잘 살펴보면 그의 많은 영화들이 사실은 스릴러에 방점을 찍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멜로드라마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히치콕 영화에서의 스릴러적인 측면은 멜로드라마를 더 잘 구현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 대표적인 영화가 <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명>에서 서스펜스를 구사하는 장면들은 멜로드라마적인 감정들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첩보 스릴러가 진행되는 과정은 동시에 영화 속에서 삼각 관계에 빠져 있는 세 인물들인 알리시아와 데블린과 세바스찬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알리시아와 데블린은 서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알게 되며 세바스찬은 자신이 알리시아에게 속아서 거짓 결혼을 했음을 알게 되어 배신감을 느낀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히치콕 영화의 이중적인 특성, 즉 스릴러와 멜로드라마가 절묘하게 결합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는 방식을 그의 영화에 적용해서 <부드러운 살결>(1964)과 같은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부드러운 살결>은 표면적으로 멜로드라마인데 영화 내내 스릴러적인 긴장감이 작동된다.

<오명>에서는 히치콕의 영화에서 자주 반복되는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다. 히치콕의 많은 영화에는 누명 쓴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영화들 중에는 누명 쓴 남자가 누명을 벗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다. 초기작부터 쭉 살펴보자면 <39계단>(1935), <누명 쓴 사나이>(1956),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프렌지>(1972)까지 그의 경력 내내 이러한 작품의 경향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명>에서는 누명 쓴 남자가 등장하지 않지만 오명을 얻은 여자가 등장한다. 오명을 얻은 여자는 일종의 ‘누명 쓴 남자’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오명>은 오명을 얻은 여자가 오명으로부터 벗어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알리시아의 오명은 알리시아와 데블린 사이에서 가장 큰 갈등 요소이다. 데블린은 알리시아를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문란한 여성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알리시아를 온전히 믿지 못한 나머지 그의 마음을 그녀에게 완전히 내주지 못한다. 알리시아에 대한 데블린의 불신은 그녀가 그녀를 흠모해온 세바스찬과 결혼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더욱 심화된다. 하지만 세바스찬에 의해 알리시아의 정체가 밝혀져 그녀가 독살당할 상황에 처한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그제서야 그녀의 오명을 넘어서서 그녀에 대한 진실한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삼각 관계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 또한 히치콕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 영화에서 삼각 관계는 두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알리시아와 데블린과 세바스찬 사이의 삼각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알리시아와 세바스찬과 세바스찬의 어머니 사이의 삼각 관계이다. 전자의 경우 히치콕의 초기작인 <링>(1927), <레베카>(1940),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후자의 경우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싸이코>(1960), <새>(1963)를 예로 들 수 있다. 전자의 삼각 관계는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성립되고 후자의 삼각 관계는 사랑하는 남녀와 그들 사이에서 개입하는 남자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성립된다. <레베카>와 <현기증>, <싸이코>의 경우에 남녀 사이에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 개입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녀 사이의 삼각 관계는 인간의 내면을 보다 깊이 있게 탐구하기 위한 수단이 되며 남녀와 그들 사이에 개입하는 남자의 어머니와의 삼각 관계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히치콕 영화에서의 남성은 어머니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성인이 되어 그가 사랑하는 여성과 진정으로 결합할 수 있다. <오명>은 이와 같은 삼각 관계를 영화적으로 매우 잘 활용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순수영화를 향한 히치콕의 의지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히치콕은 그의 영화 경력 내내 대사에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로지 시각적인 방식으로만 전달되는 영화를 만들기를 추구했는데 <오명>은 그러한 히치콕의 이상이 실현된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명>의 순수영화적인 측면은 히치콕의 서스펜스 연출 방식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영화의 초반에 알리시아와 데블린과 세바스찬이 말을 타고 가던 도중에 데블린이 알리시아가 타고 있는 말을 살짝 건드려 질주하게 만들고 이를 본 세바스찬이 그 말을 빨리 쫓아가서 알리시아를 구하는 장면이나 알리시아가 와인 저장소를 열기 위해 세바스찬으로부터 몰래 열쇠를 훔치는 장면, 세바스찬이 알리시아가 그를 속이고 와인 창고에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 세바스찬과 세바스찬의 어머니가 알리시아를 서서히 독으로 죽게 만드는 장면 등이 모두 대사 없이 시각적인 묘사를 통해서만 탁월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사례들이다.

이 영화에서 히치콕이 서스펜스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사물들은 주목할 만하다. 그 사물들은 단순히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서사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리시아가 세바스찬에게 훔치는 열쇠는 단순히 와인 창고를 여는 용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 열쇠는 처음에 세바스찬이 가지고 있고 이것을 알리시아가 훔친 다음 다시 그녀에 의해 데블린에게로 넘어간다. 이렇게 됨으로써 열쇠는 삼각 관계에 빠져 있는 세 인물을 연결하며 이 열쇠의 이동은 거짓 결혼과 진정한 사랑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이 세 명의 관계 또한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와인 창고를 여는 열쇠가 세 인물을 오가는 사이에 펼쳐지는 드라마가 그들 사이에 얽혀있는 감정의 문제들을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와인병의 사용도 인상적이다. 우연히 알리시아가 와인병에 나치 일당의 계획과 관련된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와인병 속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히치콕의 탁월한 서스펜스 연출이 빛을 발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서의 와인병은 히치콕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맥거핀이라는 사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와인병에 들어있는 우라늄 가루가 맥거핀의 기능을 한다. 와인병에 우라늄 가루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알리시아는 와인 창고 열쇠를 훔치고 데블린과 함께 몰래 와인 창고에 들어가서 와인병에 우라늄 가루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알리시아가 와인 창고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세바스찬에게 발각되면서 알리시아는 독살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와인병은 이 영화 속에서 서스펜스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서사를 추동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 와인병 속에 들은 우라늄 가루의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다.

이 영화에서 와인병과 관련된 서스펜스 연출에서 히치콕의 모던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알리시아와 데블린이 몰래 와인 창고에서 와인병 안에 든 비밀을 밝혀내려 할 때 히치콕은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 놓여있는 와인병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알리시아와 데블린이 와인 창고에서 진행하는 일과 파티에서 와인병의 갯수가 점차로 줄어드는 모습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줘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와인병이 다 떨어지면 와인병을 가지러 세바스찬이 와인 창고로 내려오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알리시아와 데블린은 세바스찬에 의해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것은 파티의 손님 중의 한 명으로 히치콕 자신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히치콕은 이미 <오명> 이전 영화들에서도 카메오로 등장하는 것을 즐겨왔었는데 <오명>에서의 그의 출연은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히치콕 스스로 영화 속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한 장면에 등장해서 술 한 잔을 쭉 들이키고 사라지는데 와인이 소진되는 것은 알리시아와 데블린의 발각 여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히치콕이 술을 마신 행위는 히치콕 스스로 서스펜스의 일부로 참여한 셈이 되어 버린다. 즉 그는 영화에 단순히 출연한 것을 넘어서 서사의 진행에 개입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러한 히치콕의 참여는 196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모던 시네마에서 감독들이 자의식적으로 관객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의식하게 만드는 장치들을 동원한 것을 10여년 전에 선취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오명>의 자기 반영성은 놀라운 점이 있다.

영화 내내 알리시아를 믿지 못하던 데블린은 영화의 말미에 결국 그녀의 오명을 넘어서 스스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데블린의 자각으로 인해 비로소 그녀는 구원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히치콕은 알리시아와 데블린이 열렬히 사랑에 빠진 가운데 이 두 남녀가 여러 번 키스를 주고 받는 모습을 타이트한 얼굴 클로즈업과 함께 롱 테이크로 보여준 이후로는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계속 분리시키는 숏들을 사용해서 이 둘의 관계를 묘사한다. 그런데 알리시아와 데블린이 서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다시 이 두 남녀를 얼굴 클로즈업을 사용해서 롱 테이크로 보여준다. 이렇게 이들의 사랑은 부활해서 비로소 결실을 맺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배신을 당한 세바스찬에게는 죽음이 닥친다. 이 부활의 클로즈업 숏과 함께 히치콕의 가장 로맨틱한 멜로드라마는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2685
661 [영화] 더 바 El Bar (2017) <부천영화제> Q 2017.07.31 1263
660 [영화] 인터체인지 Interchange (2016) <부천영화제> Q 2017.07.23 813
659 [영화] 누명 A martfüi rém (2016) <부천영화제> Q 2017.07.21 1447
658 [영화] 체리 리턴스 Cherry Returns <부천영화제> Q 2017.07.20 841
657 [영화] 하이퍼솜니아 Hypersomnia <부천영화제> Q 2017.07.18 809
656 [영화] 옥자 Okja [3] Q 2017.07.14 2141
655 [영화] 원더 우먼 Wonder Woman (2017) [2] Q 2017.06.18 2303
654 [드라마] 마이 온리 러브송 감동 2017.06.18 1258
653 [영화] 멜라니: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소녀 The Girl with All the Gifts (2016) Q 2017.06.07 1712
652 [영화] 겟 아웃 Get Out [2] Q 2017.05.14 8225
651 [영화] 판타즘 Phantasm (1978) Q 2017.04.30 1803
650 [TV] 육백만 불의 사나이 The Six Million Dollar Man (로봇의 날/ 로봇 메이커의 귀환) [3] Q 2017.03.30 75214
649 [영화]엑스/엑스 XX (2017) Q 2017.03.24 4292
648 [영화]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1] Q 2017.02.19 2843
647 [영화] 판타스틱 4 Fant4stic (2015) Q 2017.01.28 1585
646 [드라마] 역도요정 김복주 [2] 감동 2017.01.16 1493
645 [영화] 2016년 최고의 블루 레이 스무 타이틀 [6] Q 2017.01.07 9833
644 [영화] 워락 Warlock (1989) Q 2016.12.30 1294
643 [영화] 로그 원:스타 워즈 이야기 Rogue One: A Star Wars Story [1] Q 2016.12.24 2039
642 [영화] 신체강탈자들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78) Q 2016.12.19 2056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