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폴 Skyfall


영국-미국, 2012.   ☆☆☆☆


An Eon Productions/Danjaq LLC Film, distributed by MGM and Columbia Pictures. A Sony Pictures Release. 2시간 23분. 화면비 IMAX 1.9:1 


Director: Sam Mendes 

Screenplay: Neal Purvis, Robert Wade, John Logan 

Cinematography: Roger Deakins 

Editing: Stuart Baird 

Production Design: Dennis Gassner 

Costume Design: Jany Temime 

Music: Thomas Newman 

Sound Supervisor: Stuart Wilson 

Producers: Barbara Broccoli, Michael G. Wilson 

Executive Producer: Callum McDougall 


Cast: Daniel Craig (제임스 본드), Javier Bardem (실바/ 로드리게스), Judi Dench (엠), Naomie Harris (이브), Ralph Fiennes (말로리), Rory Kinnear (태너), Albert Finney (킨케이드), Berenice Marlohe (세버린), Ben Whishaw (Q), Ola Rapace (파트리스), Helen McCrory (클레어 두와 장관) 



 


 

“이제 모든 것은 끝이에요/ 숨을 멈추고 열까지 세어봐요.” 

--[스카이폴] 주제가 


한참 뒷북 리뷰가 되었지만 이런... 한편을 보고도 회원리뷰를 올리지 않는다면 듀게에다가는 아무 글도 안쓰는게 낫겠죠. [다크 나이트 라이즈] 도 2주일후에 블루 레이 나오면 뒷북 리뷰 쓰겠습니다. 


이미 보실만한 분들은 보셨겠고, 보셔도 싫으신 분들이 내 칭찬글을 읽고 다시 좋아지실 리도 없겠지만, 어쨌든 스포일러에 해당되는 내용들은 다 중간에 박은 사진 밑으로 돌려놓았으니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전반부의 리뷰 내용만 읽으시고 후반부는 영화를 보신 이후에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내 사견을 한마디 하자면, [스카이폴] 은 너무나 뛰어난 영화기 때문에 스토리의 스포일러를 읽었다고 해서 이 한편의 파워가 그렇게 감퇴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민 케인] 에서 찰스 포스터 케인의 “장미꽃 봉오리”의 의미를 미리 알고 본다 한들, (물론 모르고 보는 것보다는 감흥이 덜하기야 하겠지만) [시민 케인] 의 “실력” 을 논하는데 별 지장이 없듯이.... 그러나 여전히 내용을 모르고 보는게 낫다는 원칙을 저는 고수하려고 합니다.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는 물론 내가 출생하기 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영화속의 본드는 금년으로 5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내 생물학적 나이와 거의 일치하는 세월을 은막에서 보낸거죠. 너무나도 바쁜 교직 생활을 보내셨으면서도 사실은 영화광이셨던 부모님 덕택에, 그리고 그분들에게서 물려받은 영화사랑 덕택에 [007은 두번산다] 를 제외하면 60년대의 숀 코너리 본드도 (심지어는 우디 앨런 나오는 패러디판 [카지노 로얄] 까지!) 극장에서 대사의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다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므로 성정치적인 공정함이나 무슨 좌파 먹물 입장에서 꼬나본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찬양의 담론 비판 이런 논의들은 일단 제쳐놓고, 제임스 본드가 존재하지 않는 영화계라는 것은 줄곶 나에게는 상상하기가 무척 힘든 그 무엇이었습니다. 실제로 제임스 본드같은 사상을 지니고 행동거지를 하는 백인 남자색기하고 무슨 관련이 생긴다면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흠 어쩌면 아닐수도? 가만히 따지고 보면 내 주위에도 “머리가 디게 좋고 매력이 넘치는데 속은 좀 나쁜넘인 백인아색기들” 꽤 포진하고 있는 건 아닌지 ^ ^) 문학작품속의 그리고 영화속의 이녀석은 마치 가족의 일원처럼 친해져서 그가 갑자기 사라지면 문화 생활의 한 구석이 텅 빈 공허감을 느끼게 될 거라는 확신이 항상 있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 영화계가 얼마나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에 의해 좌지우지 당하고 있었는지, 78년에 [조스] [스타 워즈] 그리고 [나를 사랑한 스파이] 가 동시 공개 되었을때 대한민국의 주류 관객이 (그리고 영화평론가와 미디어가) 얼마나 철저하게 스필버그와 루카스의 작품을 무시하고 (60년대적 스파이영화의 팬이였던 내 입장에서 보면 007시리즈의 “퇴락” 의 단서를 제공한 전범이었던) [나를 사랑한 스파이] 에 경도되었었는지 기억하고 있는 나같은 일개 영화팬의 입장에서는, 톡까놓고 얘기하자면 피어스 브로스난이 “제임스 본드” 로 각인되어있는 젊은 세대분들의 “뽄드 인식” 이 약간 초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뭔가 “이건 내가 자란 세계가 아냐” 라는 아구가 안맞는 느낌이 존재하는거죠. 


  사실 브로스난이 그 역할을 맡고 난 이후의 일련의 작품들이 점점 날렵하게 “톡톡튀는” 모습으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뽄드도 결국 타잔처럼, 일세를 풍미하던 기세를 다시 누리지 못하고 노스탈지어를 그리는 팬들의 지지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뽄드의 불안한 운명이 (이렇게 말하면 젊은 분들은 웃으실지도 모르지만 ^ ^) 당시에 40대를 바라보면서 더이상 “젊음” 을 구가할 수 없게 된 나 자신의 피곤한 인생과 겹쳐지면서 아, 나의 어린 시절, 청년 시절 그렇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던 너도 결국 이제 퇴보하는구나, 세상의 변화에 적응한답시고 어린애들 취향 흉내내면서 주책을 떠는데 결국은 잘 안되는구나. 저것이 또한 내가 어린 학생들에게 비추어지는 나의 모습이겠지, 라고 좀 우울한 생각을 하게끔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카지노 로얄] 을 시점으로 이언 프로덕션은 급진적인 리부팅을 시도합니다. 단순히 새 본드역 배우를 구하고 설정을 더 리얼하게 바꾸는 것 등의 성형수술 수준이 아니고 정심정명 초심으로 돌아가는 혁명적인 변화였습니다. 그것이 놀라 자빠지게도 [닥터 노] 이래로 40년이 넘는 세월을 거쳐서 만들어진 수많은 제임스 본드 영화중 그 어느것보다도 이언 플레밍의 원작 소설에 충실한 한편으로 귀결될 줄은 나만 몰랐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스카이폴] 은 [카지노 로얄] 이 앞장서 다루었고, 일반 액션영화로의 기준으로만 보자면 잘 만든 수준에 속했던 [퀀텀 오브 솔레스] 가 (지금도 나는 [본 레가시] 같은 작품보다는 [퀀텀] 을 한번 더 보기를 선호합니다. [본 레가시] 가 나쁜 영화라는 의미도 물론 아님) 실망스러운 방식으로 서둘러 처리해버린 제임스 본드의 내면적인 고뇌와 갈등을 다시 불러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역시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새로운 제임스 본드의 탄생기 (“그가 어떻게 마침내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과 허무함의 그림자를 떨쳐낼 수 있었는가” 의 기록) 임과 동시에 과거의 모든 제임스 본드작품들에게 최상의 형식으로 경의를 표하는 한편이 되었습니다.  나같은 올드 팬들에게는 거의 생각할 수 있는 최상치의 선물입니다. (자칭 올드 팬이라고 하면서, 마치 크로넨버그 감독의 최근 영화들을 보고 “과격한 호러영화가 아니다” 라고 비판하듯이 [스카이폴] 이 미적지근하다고, 뽄드걸 안나온다고, 액션이 모자란다고 [머시?] 비판하는 분들은 도대체 쩸스 뽄드 영화를 뭘 보셨는가? 차라리 실바가 너무 게이라서 싫다, 이런 비판은 찬성은 못해도 납득이라도 가지--- 까놓고 얘기하자면 이런 말 하시는 분들도 [위기일발/러시아에서 사랑과 함께] 헛 보신 거지만. 한탄스럽도다. 쩸스 뽄드 영화 볼때만 “평론가적 시각” 을 안경집에 거둬놓고 신자유주의 옹호영화라고 개무시해놓고 보시나들? 만일 그렇다면 그런 태도가 [괴물] 을 보고 좌파 빨갱이 영화라고 거품을 무는 2MB적 시각이랑 뭐가 그렇게 다른가?)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샘 멘데스가 이미 전작을 만든 마크 포스터의 “영화학도” 적인 예술적인 영화만들기를 일체 배제하고 (의회 청문회 신등의 [다크 나이트] 적인 교차 편집을 제외하면) 로저 무어기의 본드 시리즈 제작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는 고전적인 구도와 페이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이 한편의 액션과 세트 피스들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정교함과 더불어 치밀하게 설계되고 수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언제 블루 레이를 구입하시게 되면 [스카이폴] 의 도입부 이스탄불 추격신에다가, 한번 제이슨 본 시리즈에 나오는 액션장면을 임의로 추출해서 비교해 보세요. 카메라가 캐릭터들을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찍는지, 어느 순간에서 본드의 클로스업이 들어가는지, 어느 장소에서 본드와 다른 캐릭터들과의 “통신” 이 이루어지는지, 한번 비교해 보시면 이 두 접근 방식의 차이를 뼈저리게 인지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스카이폴] 의 액션이 “느린” 게 아닙니다. 액션이 관객들에게 롤러 코스터를 탄 것과 같은 폭발적인 감각적혼돈의 경험을 주는 것이 목적인지, 아니면 액션을 어디까지나 캐릭터들의 감정적, 내면적 동인에서 우러나오는 캐릭터의 존재양식의 표현으로 그려낼 것인지 그 차이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영화 만들기의 접근 방식 뿐만 아니라, 이 한편의 존재론적 철학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어째 얘기가 이상하게 거창해지는데... ;;; 아무튼) [스카이폴] 은 본드 영화들을 미주알 고주알 다 찾아보고, 그 영화들이 가진 고전적인 설정과 장면들을 자기 머리속에서 골백번 돌려보고 그걸 더 어떻게 업데할 수 있는지 생각해본 골수 팬이 만든 한편이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속한 시리즈에 대한 팬심이 뚝뚝 듣는 007 영화는 보기 드뭅니다. 아니, 감독 샘 멘데스는 단순한 팬심의 발휘에서 몇 발짝 더 나아갑니다. 오리지널들의 설정과 설계를 최대한 존중하되 그것을 가장 멋지고 납득이 갈 수 있는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작업을 벌려내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듭시다. 듀나님께서 비판하신 (저도 비판에 공감합니다) 한 캐릭터의 묘사 방식이죠. 제가 이 시퀜스들의 일부시종을 보면서 가장 놀란 것은 이런 캐릭터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고,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캐릭터의 묘사 방식의 기본 구조는 (숀 코너리도 아니고) 로져 무어 본드 영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에 거의 완벽하게 고대로 나옵니다. 심지어는 “권총 차고 목욕하시오?” 라는 본드의 대사까지도 [황금총] 에 이미 기성품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서, 멘데스는 연기자들과 상황설정을 통해 여지껏 이러한 장면들이 가능성으로만 남겼던 수면밑의 정서적인 에너지와 (그리고 그 에너지의 상당한 부분은 “오락영화” 를 매끈하게 뽑아내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될 수 있는 불균질적인 것입니다) 새로운 미적인 퀄리티를 들어냅니다. 이 시퀜스를 보고 여러분들의 상당수는 무엇인가 껄끄러움을 느꼈을 지 모릅니다만, 이러한 “껄끄러움” 은 로저 무어의 제임스 본드가 스카라망가의 여인의 팔을 비틀고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그런 종류의 것입니다. 


우리는 제임스 본드 영화의 이런 장면에서 적측의 여인캐릭터가 본드를 유혹하는 미소를 띄우면서 마티니가 어쩌구 하는 대사를 읊을 때 그 눈꼬리에 처절한 절망과 더불어 배신당할 것이 뻔한 실낯같은 희망이 어려 보이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카이폴] 에서는 그것이 보입니다. 


반대로, 그렇다고 해서 [황금총] 의 기본 플롯의 동력과 목적지를 [스카이폴] 이 무시하고 밀어붙이냐하면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셜록 홈즈 영화에서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를 머리부터 붕괴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갑자기 아일린 아들러와 홈즈의 19금 섹스 신을 볼 수 없는, 아니 넣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스카이폴] 은 궁극적으로 주인공 캐릭터의 오랜 내력에서 생성된 세계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팬심 가득한 섬세한 업데이트의 작업이 백 퍼센트 성공했느냐 하면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아주 잘 된 곳 (말로리와 Q 캐릭터의 설정과 배치) 도 있고 더 잘할 수도 있었던 곳 (나오미 해리스 캐릭터의 설정과 배치) 도 있고 그렇습니다만 이런 시도 자체가 이루어졌다는 것 자체가 벌써 올드 팬을 해까닥 미치게 하는 것이죠. 아, 얼마나 수도 없는 제임스 본드 영화들의 아이코닉한 장면들을 보면서 “이런 상황을 내가 업데이트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것인지! 거기다 더해서 이러한 클래식한 설정들이 적절한 시기에는 모 자동차의 등장과 같은 방식으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절묘한 타이밍과 함께 뇌수를 때려주니, 이건 뭐 날 밟고 지나가주 하고 바닥에 널브러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까지만 해냈다 하더라도 벌써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최고작에 올라가느니 마느니 하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스카이폴] 은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M 캐릭터의 강화와 실바라는 악당의 존재를 통해서 본드 자신의 개인사에 파고 듭니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입소문을 들었을 때 (심지어는 듀나님의 리뷰를 읽었을 때)만 해도, 전사 (前史) 를 파헤칠 필요성이 전혀 없는 캐릭터에 쓸데없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만들어다 붙임으로써 현재의 강박을 설명하는 그런 투의, 잘해봤자 (셜록 홈즈의 예를 다시 들자면 [명탐정 등장/7퍼센트 용액] 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만난다는 희한한 설정을 통해서 이루어낸 것과 같은) 근사한 파스티셰로 귀결되고, 잘 못하면 캐릭터를 말아먹게 되는 그런 류의 전개를 예상했었습니다. 


그러나 웬걸... 난 샘 멘데스 뿐만 아니라 존 로건, 닐 퍼비스, 로버트 웨이드 각본팀이 본드라는 캐릭터에게 지닌 존중심을 얕잡아 보고 있었어요. [스카이폴] 의 종반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그대로 이언 플레밍이 창조해낸 그 인물에 기초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어떻게 그 배경을 토대로 냉혹하고, 권위에 도전하면서도 항상 죽음의 영지를 헤집고 들어가려고 하는, 인간 관계가 파탄된 살인기계가 되었고, 또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지 그 비젼까지 제시합니다. 


이것은 파스티셰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존중심을 가지고 어디까지나 정통적인 제임스 본드-- 이언 플레밍이 창조했던 불완전한 스파이-- 캐릭터를 재구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죠. 원래부터 제임스 본드가 아무리 배기싫은 평론가나 관객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 레벨의 존중심은 절대로 폄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 여기까지 갔어요. 이미 [다크 나이트] 가 수퍼히어로 영화전반에 대해 해놓은 무지막지한 짓거리에 도전하는 수준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 또 또 한 주걱 더 푸어서 [스카이폴] 은 눈알이 사그르 타 없어지는 게 아닌가 겁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예술을 구가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영국 출신인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가 잡아내는, 상하이 도시의 파란빛 해파리가 유유히 헤엄치는 네온과 디지탈 영상의 빛과 어두움의 교집합속에서 접근하는 본드와 적측의 암살자 파트리스, 스코틀랜드의 어디부터가 안개이고 어디부터가 언덕인지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는 경외스러운 풍경, 그리고 종장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채 자기가 죽여야 하는 대상을 향해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내딛는 캐릭터들이 어둠의 하늘속으로 치솟는 오렌지빛의 화염에 뚜렷이 부조 (浮彫) 되는 그 모습들. 아 이렇게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프고, 장엄하고, 가슴을 뒤흔들어놓는 영상들을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보게 되다니! 


그러나 물론 당대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는 이미 [아라비아의 로렌스] 의 촬영감독이었던 프레드 영, [모든 계절에 맞는 사나이] 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테드 무어 등의 초초일류 영상예술가들이 참가했었죠. 그런 아름다운 영상들이 빛을 마음껏 받아서 꽃봉오리들을 만개 (滿開)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는 정원사를 이제서야 제대로 만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성기의 스탠리 큐브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의 아름다움이 고전 헐리웃영화의 서부극이나 찰턴 헤스턴 주연의 사극에 맞먹는 정도의 중후함과 절실함을 지닌 캐릭터들과 절대로 따로 노는 일이 없이 완벽하게 유기적으로 맞아들어가면서 서사를 이루어 클라이맥스로 치닫으면서, 그 서사에 한 캐릭터의 성장에 매듭을 지어주는 결말을 가져다주고, 또 그 캐릭터에게 새로운 장래를 약속하는, 이러한 장관을 봤을 때 느끼는 “재미” 를 뭐라고 표현해야 좋습니까? 


[스카이폴] 을 보고 있노라면 아, 옛날의 거장들-- 하워드 호크스는, 알프레드 히치코크는, 쿠로사와 아키라는-- 은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는데, 라는 넋두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오 이 기쁨이여! 


이런 미적 성취 (“영화적 재미” 는 제쳐놓고!) 를 이룬 한편을 놓고 겨우 어 뽄드영화 아직 망하지 않은 가보네, 정도 수준밖에 할 말이 없다면 그야말로 서글픈 일이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스카이폴] 은 감탄스럽게 재미있는 스릴러-스파이영화고, 본드 팬으로서는 포복감읍을 몇 번 해도 모자랄 정도의 시리즈에 대한 최고최대의 헌사이고, 그것만으로도 지나칠 정도로 충분하지만, 그것에 더해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과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당장 받을 자격이 있는 뛰어난 예술영화입니다. 


무슨 왕가휘하고 소피아 코폴라한테는 줘놓고 [스카이폴] 에게는 못주겠다고? 풋.   젊으신 영화팬들, 제발 제발. [스카이폴] 같은 한편은 그냥 오락영화다 하는 식의 미디어와 잡지와 방송들의 세뇌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젊으신 여러분들께서 뭐라고 하시건, 결국 나는 다시 새로운 트릭을 배우고 싶은 늙은 개의 팬심으로 돌아옵니다. 


뽄드 이 얄미운 나쁜 놈. 네가 추하게 늙지 않고 이렇게 멋있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나도 내 인생을 서뿔리 포기할 수 없겠다. 


반세기를 이제 지냈으니 100살이 될때까지만 흥해라!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의 영역에 속합니다.   


줄좀 긋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럼 위에서 언급한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재능이라고는 사람 죽이는 기술밖에는 없고 우리가 심정적으로 응원할 수 있는 히어로가 되기 위해서는 몇 단계 더 인간적인 성장을 거쳐야 하는 과묵한 깡패색기 제임스 본드의 기본적인 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카지노 로얄] 에서 (베스퍼 린드와의 로맨스를 통해) 본드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이 성장통의 서사는 [스카이폴] 에서는 본드, M 과 하비에 바르뎀이 연기한 실바라는 캐릭터를 통해 삼각구도를 그리면서 벌어집니다. 


[다크 나이트] 에서 조커가 배트맨의 대극적인 존재가 아니고 고담 시민들을 가운데 놓고 기본적인 인간관 (“인간들은 남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에 관한 실랑이를 벌였던 [제 7의 봉인] 의 "죽음"에 더 가까운 그 무엇이었다면, [스카이폴] 의 실바는 사실 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국가의 안위” 라는 그 무엇을 위해 희생당한 본드의 적들의 원귀의 집합체이자, 본드 자신이 조금만 잘못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타천사 (墮天使) 같은 존재입니다. (“무엇때문에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척 위선을 떨면서 남의 밑에서 일할 필요가 있는가? 어차피 우리들은 서로를 잡아먹도록 길러진 쥐새끼들인데” 라는 실바의 유혹은 다른 본드영화의 대 자본가 내지는 기업가 사장 스타일의 악당들이 던지는 “내 밑에서 일하라” 는 식의 대체 가부장적인 권고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절실한 것입니다) 


일부의 리뷰어들이 본드와 실바의 직접적인 대결이 없다는 것을 [스카이폴] 의 결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일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이 삼각구도의 해결점이 만일 본드와 실바의 대결에 맞추어져 있었다면 궁극적으로 [골든아이] 꼴이 났을 겁니다. [골든아이] 의 막판에서 본드가 “나라를 위해서냐 제임스?” 라는 적의 질문에 “아니 나를 위해서다” 라고 대답을 하긴 하지만, 그 영화에서의 피어스 브로스난판 본드의 대답에는 절실함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그냥 본드를 다시 (대영제국의 수호자로서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지요. 


[스카이폴] 의 제작팀이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바로 본드가 아닌 M 을 “국가의 안위” 의 수호자의 위치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캐릭터 배치의 구도를 통해 본드를 살리기 위해서는 M 이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른 자의 위선 때문에 오로지 파괴와 죽음밖에는 모르게 된 불쌍한 탕자 아들을 물리치는 것은, 적통의 계승자인 본드의 역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냥 위선의 연속이 되는 거죠. 


이 가족 멜로드라마에 합당한 엔딩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탕아가 기른 자를 죽이고, 자기도 죽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입이 딱 벌어지는 점은 그것이 바로 실바가 처음부터 원하던 목표라는 것입니다! 세계정복이고 나발이고 그런 거는 관심도 없어요. 그리고 본드가 실바를 단도로 찌르건 말건, 실바는 그 원하는 바를 달성합니다. M 을 죽이고 자기도 죽어요. 


그 과정에서 제임스 본드를 자유롭게 풀어주고. 


만일 지금까지의 모든 피어스 브로스난 본드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퀀텀 오브 솔레스] 가 그렇게 끝났듯이, 주디 덴치가 냉엄함과 어느정도는 비인간적인 권위를 흐뜨러트리지 않으면서 연기해온 M 이 실바를 물리친 본드를 다시 받아들여서, 모든 권위와 질서는 다시 회복되었다는 식으로 매듭지어졌더라면 그것은 좋지 않은 의미에서 007영화의 공식으로 봉합되는 실망스러운 결말이었을 것입니다. 본드가 태어나서 자란 집까지 가서 이 캐릭터의 내면을 탐구할 정도의 위험을 감수한 한편이 이런 보수적이기 이를 데 없는 엔딩으로 끝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 과정에서 대니얼 크레이그의 본드가 [카지노 로얄] 에서 에바 그린을 상대로 보여주었던 만큼의 속 깊은 연기를 피로할 수 없었다는 것은 아쉽지만, 실바를 연기한 하비에 바르뎀의 괴력은 그런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바르뎀은 위협적이고도 매혹적인 성적 매력과 어딘가 오장육부에 벌레가 스멀거리는 것 같은 그로테스크함을 동시에 발산하면서 우리의 눈을 스크린에서 뗄 수 없게 합니다만, 그는 (사실 이 영화의 모든 연기자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이지만) “본드영화의 표준적 악당” 을 연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르뎀의 실바가 M 을 마주하고 자신의 과거사를 어필하면서 M의 위선을 폭로할때 그는 자신을 이죽거리는 파충류적 냉혈한이나 감정표현력이 없는 소시오패스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자꾸 한니발 렉터와 비교하지 마시라고 ;;;;) 


그 반대로 자기의 어머니와 같았던 기른이 M 한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일이었는가 하는 것을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온 몸으로 연기해서 절실하게 전달합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악당은 이러면 안되는 겁니다. 아니 그 자신도 불쌍하기 짝이 없는 여성을 벌레 밟듯이 쏴죽이는 악당이 이렇게 우리가 그놈의 파멸적인 증오에 공감을 느끼는 존재여서는 안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말씀입니다. 사실은 이러한 본드와 본드가 속한 조직과 시스템에 그 위선의 죄값을 물을 수 있는 악당은 거의 모든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항상 가능성으로서 존재해 왔거든요? 심지어는 누구의 최고 제임스 본드 영화 리스트에도 들어갈 일이 없을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의 스카라망가조차도, 자신이 왜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청부업자가 되었는가를 제임스 본드에게 담백하게 얘기할 때, 최소한 그 순간에서만큼은 우리는 스카라망가의 편이지 본드의 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중 대부분은 나래도 그 코끼리를 때리는 조련사를 쏴 죽였을 거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리 선생님의 연기 공력은 이런 순간에 진정으로 발휘됩니다. 그것도 두말하면 잔소리). 


결론적으로 히스 레저의 조커가 그러했듯이 바르뎀의 실바도 “본드 영화의 악당”을 넘어섰지만 그를 포괄하는 어떤 위치에서 존재하는 적입니다.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완벽한 “본드 영화의 악당” 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스포일러 끝.  다시 줄 긋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차기작에서 바르뎀의 실바와 맞먹는 본드의 적수를 배치하고 또 그에 걸맞는 연기자를 섭외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크리스 놀런 팀은 결국 조커를 등장시키는 것을 포기했지만 이언 팀은 포기하지 말고 실바를 넘어설 수 있는 본드의 적수를 반드시 등장시키도록 노력하기를 빕니다. 


위에서는 로저 디킨스 찬양만 하고 다른 스탭들은 얘기 안하고 넘어갔는데 데니스 가스너의 프로덕션 디자인, 스투어트 베어드의 편집 그리고 너무나 유려할뿐 아니라 그대로 하나의 상징주의 단편영화의 걸작이라고 불러도 좋을 대니얼 클라인먼의 메인 타이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술적인 성취는 그저, 다, 모두, 하나같이 초일류의 예술입니다. 더이상 뭐 잡소리가 필요하겠어요. 


유일하게 내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토머스 뉴먼의 음악이었습니다. 그것도 이 분의 재능과는 관계없습니다. 단지 오페라를 듣고 싶었는데 비발디를 계속 틀어주었다는 그런 느낌? 음악이 유일하게 존 배리옹이 살아 계셨더라면... 하고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게 되는 그런 요소였습니다. 


아델의 주제가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저 그랬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더없이 어울리는 노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다시 사는 길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나니. 



– (실바) 그래 자네의 취미는 뭔고? 

  (본드) 다시 살아나는거. 


You said it, you old bast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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