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 속의 암탉(1948)

2011.06.22 01:55

지오다노 조회 수:2267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바람 속의 암탉>

 

비극에 이르지 못한 오즈의 여성 수난극

 

황폐하다. 거리는 한산하고, 낡은 판자집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한 손엔 아이의 손을 쥐고, 다른 한 손엔 보따리를 쥔 여성이 걸어간다. 전장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재봉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도키코는 마지막 남은 기모노를 팔 만큼 가진 것이 없는 여자다. 그런 그녀의 품 안에 유일하게 남은 것이 있다면 하나뿐인 아들 히로. 애지중지하는 외아들이 식중독을 앓자 도키코는 재정 상황을 고려할 여지도 없이 치료를 받게 한다. 그리고 뒤늦게 인지한다. 납부해야 할 병원비가 수중에 없다는 걸. 하지만 최소한의 세간을 제외하면 더 이상 팔 물건이 없다. 가진 것이 없지만 여자들도 눈여겨볼 정도로 예쁜 외모의 여성이 단기간에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도키코는 ‘그 일’을 단행한다. 아들의 병원비는 선하기 그지 없는 도키코로 하여금 부도덕한 매춘 행위를 감수하게 만드는 냉담한 힘이다. 한번, 단 한번이지만 아주 작은 엇갈림과 부정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이 도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은연 중에 짐작한다. 그리고 그 비극의 시작은 막연하기만 했던 남편의 귀환이다.

귀여운 아들의 재롱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남편은 자연스럽게 묻는다.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아이의 건강을 궁금해하는 남편의 다소 집요한 질문에 도키코는 매춘 사실을 고백한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더버빌 가의 테스』에서 사촌에게 순결을 잃고 사생아를 낳아 직접 땅에 묻었던 연쇄적인 비극을 겪은 테스가 결혼 첫날밤, 남편에게 얼룩진 과거를 털어놓았던 것처럼 얼마든지 가슴 속에 비밀로 묻어놓을 수 있었던 ‘그 일’을 도키코는 밝힌다. 테스의 남편이 그랬듯, 도키코의 남편은 분노한다. 그러나 분노에 대응하는 두 여인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브라질로 떠나버린 남편에게 편지로 ‘자신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분통을 터뜨리는 테스와 분을 이기지 못해 집 안에 머물지 못하고 거리를 맴도는 남편에게 무조건 용서를 구하는 도키코. 이 차이에서 영화는 잠재된 비극에서 일방적인 수난극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 디킨즈와 새커리 같은 빅토리아 조의 대표적인 소설가들이 주어진 사회 환경의 세밀한 묘사와 함께 그 안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물들을 그릴 때, 오히려 당대 사회의 묘사를 최소화하거나 그 흐름에 역행하여 인간 행동의 본질에 직접적으로 부딪쳤던 하디의 소설은 무수한 비극적 인물을 낳았다. 감수성 예민하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테스와 야망에 찬 시골 청년 쥬드ㅡ토마스 하디의 1895년 작, 『이름없는 쥬드 Jude the Obscure』의 주인공ㅡ가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함정에 빠져 파멸에 이르렀듯이 선의의 거짓말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정직을 고집한 도키코는 비슷한 고통을 겪게 된다.

 
수납장 밑으로 튜브 공이 떨어지고, 남편이 도키코를 향해 집어 던진 깡통이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등 카메라는 낙하하는 사물의 무게와 마찰음을 늘려가며 수난의 전조를 심화시킨다. 그 전조의 표적은 다름아닌 사람이다. 남편의 분노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수난을 당하던 도키코가 계단에서 떨어질 때 수난의 가혹함은 정점에 달한다. 지면에 머물렀던 사물과 달리 일어나 비틀거리며 계단 위로 올라가 남편을 꼭 끌어안고 깍지를 낀 도키코의 손은 분노와 죄책감으로 점철된 부부의 공황을 해소하는 것을 넘어서 어떤 절실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들은 진정한 부부가 되기를 다짐하며 암울한 기억을 잊기로 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도키코 부부가 사는 집 앞에 모여든 사람들을 멀리서 비추는 장면은 처참한 결말을 상상하게끔 암담한 의구심을 남긴다.

영화는 지금까지 봐온 오즈의 영화 가운데 가장 우울하다. 도키코의 남편처럼 전쟁에서 돌아온 오즈의 내면을 드러내듯 뼈대만 있는 거대한 원형 철제 구조물의 잇따른 포착은 영화에 더욱 건조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부여한다. 답답할 정도로 순종적인 도키코의 태도는 40년대의 일본 사회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이 반영된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힘겹게 2층으로 올라와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앉아있던 남편 앞에서 다리를 절며 걸어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는 건 라스 폰 트리에 영화 속 여주인공이 겪는 고통을 보는 것만큼 견디기 힘들다. 가혹하기로는 이에 뒤지지 않는 하디의 소설과 그 안의 인물들이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던 이유는 비정한 사건과 상황에 휘둘리는 가련한 이들이지만 그들이 끝까지 운명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도키코가 남편의 오랜 공백에 대한 원망과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선택한 나름의 최선책을 한번이라도 강변했더라면 그토록 비참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오즈가 만든 이 수난극은 아름답지 않다. 다만 아름다운 장면이 있다면, 강가에서 도키코의 남편 옆에 앉아 도시락을 먹던 어린 매춘부의 의연한 미소일 것이다.

  

 

 

* "The characteristic Victorian novelistㅡe.g., Dickens or Thackerayㅡwas concerned with the behavior and problems of people in a given social milieu, which were described in detail; Hardy preferred to go directly for the elemental in human behavior with a minimum of contemporary social detail. Most of his novels are tragic, exploring the bitter ironies of life with an almost malevolent staging of coincidence to emphasize the disparity between human desire and ambition on the one hand and what fate has in store for the characters on the other."

 

From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 Vol. 2: Introduction to Thomas 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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