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소설] 순대국 그녀 (19?)

2010.09.07 19:45

유니스 조회 수:7066

'역시 그윽해'
탑탑한 국물 한 수저를 떠 넣으며 그녀는 읊조렸다. 처음 찾은 순대국집은 기대 이상으로 솜씨가 좋았다. 유리창 안으로 자전거 동호회로 보이는 아저씨들 일행이 보이길래 들어왔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저런 동호회 사람들이 낯선 집을 가지는 않잖아. 총무가 있으니까 맛집을 찾아놓았을 테고. 뭣보다 다들 집중해서 먹고 있군. 술 한잔 안하고도 행복한 표정이야.'


무엇이든 처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녀지만 순대국집에 대해서는 예외 법칙을 둔다. 전국의 모든 순대국집을 가 보겠다는 일념으로.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김정호의 집념으로. 그녀는 처음 보는 순대국집이라면 성큼성큼 걸어들어간다.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것에 익숙치 않은 그녀지만 미묘하게 다른 여러 종류의 순대국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각각의 순대국 그릇에서 장점만을 뽑아 올린다.

 

 '이 건 좀 맑은 맛이군. 괜찮아. 숙취로 괴로울 때라면 괜찮겠어'

'역시 난 진한 맛이 마음에 들어. 원기 회복에 딱이겠어'

'여긴 당면 순대만 넣었군. 대신 싸잖아. 주머니가 가벼울 때 들르자'

 

맛에 대한 판단은 적확하지만, 결점은 기억하지 않으려 애쓴다. 사랑하는 순대국에게 실망한다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순대국집에 들어갈 때만이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자각하는 하루 중 유일한 순간이다. 질끈 묶은 머리에 추리닝. 가끔은 ACDC 카키색 빅 사이즈 티셔츠에 쇼츠, 해진 컨버스. 그래도 모두가 쳐다본다. '여자'인데다 그것도 '혼자'이라서일까.

 

다대기에 들깨가루를 뿌리고 새우젓 한 스푼을 떠넣고 착착 섞은 것에 순대와 고기를 찍어 먹고, 국물에 느끼해질때면 풋고추를 아삭아삭 베어 먹고. 먹는 일에 열중하다가 땀이라도 닦으려고 고개를 들면 옆자리 손님의 시선이 느껴질 때도 있다.

 

순대국 맛을 알아버린 때는 약 삼년 전. 섹스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때와 같다. 레오파드와 올블랙, 순백의 속옷 세트에 대한 사랑은 다양다종한 순대국에 대한 탐구로 바뀌어갔다. 탐스럽게 모인 가슴과 올라붙은 힙, 제모로 관리된 매끄럽게 빛나는 다리에 대한 노력을 잃고 얻은 것은 꽉꽉 찬 순대처럼 터질 것 같은 뱃살과 허벅지.

 

처음 순대국을 먹은 때를 정확히 기억한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아침이었다. 물에 빠진 순대를 먹기 싫다는 그녀를 끌고 간 그는 수저에 순대를 얹어 한 알 한 알 입에 넣어주었다. 시장에서 파는 순대보다 고소하고 깊은 맛이 났고, 무엇보다 사골을 우린 국물이 숙취와 피로로 지친 위를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하룻밤에 여섯 번의 섹스를 치르느라 지친 몸에 고영양을 칠해 주었달까. 안 먹겠다고 버틸 땐 언제고, 뚝배기를 세워 국물을 모으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 그는 자꾸 웃었다. '거봐 맨날 안해보고 하기 싫대'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적당히 느끼한 섹스 매너를 지닌 그는 순대국의 느낌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뜨거웠다. 그녀를 탐하는 눈빛과 손의 느낌, 섹스에 대한 열정, 다른 남자들이 쳐다만 봐도 화를 내는 강렬한 질투심, 뒤에서 안을 때 느껴지는 몸의 체온까지도.

 

샐러드나 파스타같은 가벼운 음식을 좋아하던 이십대 중반의 그녀에게 그는 너무 과했다. 뜨겁고 진했다. 헤어질 때 쯤엔 '눈빛이 느끼해서 싫다'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 그녀에게 그의 오셀로같은 질투는 너무 버거웠다.

 

한달에 한번씩 헤어지자는 말을 달고 살다가 결국 소년같은 남자와 만나게 되어 이별을 고했다. 섹스를 상상할 수 없는 식물적인 남자였다. 운동과 책을 좋아했고 샤넬 스포츠 향기가 잘 어울렸다.

 

천벌을 받았지. 그와 헤어진 후 삼년 정도 그녀에게 기억할만한 섹스는 없었다. '섹스를 상상할 수 없는 남자와의 실행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위를 할 때마다 그를 떠올렸다. 끈적끈적한 땀과 동물같은 체취가 섞이던 순간. 그 아찔한 느낌. 자아를 잃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 부끄러움 없이 야한 말을 할 수 있는 상대는 그뿐이었다. '덜 세련된 상대가 더 야해' 란 진리는 너무 늦게 알았다.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들깨가루를 우수수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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