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분소설] 악마는 니체를 읽는다

2011.01.14 17:04

유니스 조회 수:4257

편집자는 언제나 옳다. 편집은 신의 영역이다.

-스티븐 킹

 

편집자 중에 나만 언제나 옳다. 나의 편집은 신의 영역이다.

-그

 

 

 

 

# 1

“내가 널 왜 뽑았는지 알아? 난 항상 똑같은 애들을 고용했었어. 머리 좋고 야무지고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한 그런 애들. 그런데 종종,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런 똑똑한 애들은 성실성 면에서 날 조금 실망시켰지. 난 그래서 뭐랄까, 좀 모자란 애들은 우직하기라도 할 줄 알았어.”

네가 무슨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라고. 입가 거품이나 좀 닦고 말했으면 좋겠다. 아, 정말 드러워서.

 

화장실에 다녀온 내 의자에 그가 앉아있다. 새로 산 전기방석은 뒷자리 영은씨에게 줘버려야겠네. 고작 십오분 비웠을 뿐이다. 배가 뒤틀렸고 설상가상으로 마법 주간이었다. 교정 스트레스인지, 술 못 먹는 편집자는 편집자도 아니라며 저놈이 어제 억지로 마시게 한 양맥 폭탄주 때문인지는 몰라도 죽다 살아났다.

아아. 몇 달전만 해도 여기서 식은 땀을 삐직거리며 서 있게 될지 몰랐지. 몰라몰라, 내 팔자.

 

 

 

 

# 2

한때는 패션매거진 에디터를 꿈꿨다. 기획회의 때는 에지있는 블랙수트에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도도하게. 인터뷰 때는 인터뷰이에 맞는 스타일로. 인디밴드를 만나면 가죽라이더재킷이나 에스닉 원피스에 어깨죽지에 새긴 날개 타투를 슬쩍 드러내고, CEO를 만나면 샤방한 레이디라이크룩으로 호감을 사고.

열없이 서서 올풀린 심슨 슬리퍼만 내려다 본다. 얘도 날 비웃는 거 같다.

 

 

지방 명문대 문예창작과 출신의 나. 나름 학보사 편집장도 하고 문학상도 받았었다. 서울을 삼켜주마, 다짐하고는 여러 잡지사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래, 그럼 일보후퇴. 출판사란 출판사에는 모조리 이력서를 넣었다. 내 이력서에 답한 곳은 오직 이 곳 뿐이다.  고교생용 논술책을 만드는 작은 출판사. 내가 항시 소신이 좀 없다. 이 길이 아니면 저 길인가벼,가 내 모토다. 안됨 돌아가야지, 암. 여기서 일 좀 하며 매거진 쪽도 찔러보자. 철학은 자신 없었지만, 왠지모를 자신감만큼은 충만했다. 비록 내 A컵이지만, 총질량 불변의 법칙으로 간댕이는 크니까. 최소한 뒷자리 디자이너 은영씨가 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언니가 일곱번째예요. 지난번 언니는 결석으로 수술했대나? 지지난번 언니는 갑상선에 이상생겨 나갔고. 럭키 세븐이네, 언니. 잘해봐요.”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악마를 보았다.

 

 

 

 

# 3

“이거 한번 읽어봐. 이거 틀린 거잖아?”

첫날 그가 건넨 건 전임자가 편집했던 원고였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을 고등학생들의 빵셔틀 문제와 엮어서 흥미롭고 신선했다.

“딱히 틀린 거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게, 저, 요새는 원래의 의미에서 확장해서 이런저런 사회적 상황에 철학적 용어를 연결시키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기도 하고....."

“틀리다, 아니면 맞다, 흑이면 흑이고 백이면 백이지. 이거 회색분자도 아니고, 자기 주장이 없어?  헤게모니가 그렇게 코에 걸고 귀에 걸고 할 만한 개념인 줄 알아?”

 

원고뭉치가 포물선을 그린 후 내 코 앞에 터억, 낙하한다. 이 회사의 헤게모니는 이따위인가. 그건 그렇고 갑자기 왠 반말이니. 화르륵 눈에 불이 난다. 애써 표정관리를 해본다. 원고에 맞아 죽을 수는 없으니. 공격스킬 연마 전에는 일단 예스맨 라이프로 가자. 그래요, 니 말이 다 맞아요. 전임자가 다 틀렸어요.

 

마라톤 회의가 끝났다. 터덜터덜 패잔병처럼 걸어나온다. 문득 어깨에 축축한 무엇이 닿는다.

“엄청, 재밌지 않아? 이런 게 회의의 묘미지.”

손 안 치워? 악. 새로 산 실크블라우스가 흠뻑 젖었다.

 

 

 

 

# 4.

인정한다. 사실 그는 꽤 잘났다. 문제는 다른 사람도 잘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을 모른다는 데 있었다.

 

“조 편집장님, 서울대 철학과 수석이었다면서요? 근데 왜 이거 하고 있대요?”

“몰라요? 대학원은 갔는데 졸업을 못했대. 회의 때 자기편 안 들었다고 선배한테 욕하고 반말하고. 논문 태클 건다고 교수 머리 톡톡 치면서 제대로 살라고 충고하고. 그뿐이야. 대학원 뛰쳐나오면서 뭐랬대나? ‘니체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 나는 말한다. 대학은 죽었다’ 허세 쩔지? 저러니 마흔 넘도록 엄마밥 먹고 다니잖아.”

신이고 대학이고 나발이고 내가 죽을 지경이다.

“내일 출근 전까지 볼 수 있게 해줘? 자신있지, 자기?”

 

6시 1분에 퇴근하시며 그가 던지신 교정지는 서른장이 넘었다. 애교 담뿍한 윙크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그냥 사직서 내라는? 그동안 즐거웠다는?

어차피 원고 피드백한거랑 나중에 컬러지 피드백한거랑 다를 거잖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고민하느라 교정시간이 배로 든다. 몰라몰라. 일단 아사히 한 캔 들이키고 잠깐 자자. 2012년에 멸망한다는 이놈의 세상, 그냥 오늘 망해버려라.

 

 

 

 

 

# 5

어젯밤은 말아먹었다. 말그대로 말아먹었다. 아사히 한 캔을 원샷한 후, 뛰쳐나가 2차로 동네친구와 참이슬에 카스를 말고, 3차로 막걸리에 사이다를 말고, 그래도 기어코 교정을 보겠다며 친구를 데리고 집에 기어들어온 나. 첫 책 나오는 날 마시겠다며 보관해 둔 보드카를 꺼내 오렌지주스에 말아먹으며 꺼이꺼이 울었단다.

 

덕분에 교정지는 어제 그대로다. 오후 네시, 아직까지 교정지 보잔 말이 없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그는 금요일마다 소개팅을 하니까 다섯시반부터 향수를 뿌려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까 두시간만 버티면 되는 것.

기분이 좋은가보다. 트실금, 방실금이 오늘따라 더 경쾌하네? 건강하기도 하지.(트실방실이란 요실금과 비슷한 현상으로 자기의 생리현상을 사무실내 모든 직원에게 알리는 행위를 말한다.)

 

 

 

 

# 6

나는 단언한다. 그가 소개팅녀에게 차인 건 스타일 때문만은 아님을. 물론 그의 스타일이 끔찍하긴 하다.

발가락 양말을 신었다면 바닥에 앉는 전통찻집은 가지 말았어야 했다. 십년은 입은 듯한 모직바지 엉덩이의 보푸라기 정도는 정리해줘야 했다. 거북목을 강조하는 두껍고 짧은 넥타이는 차라리 풀어버렸어야 했다. 게다가 사향이 포함된 머스크 계열의 향수를 뿌렸다면, '누구 손이 더 큰가 우리 손 한번 대보자'며 다가가지는 말았어야만 했다.

 

그가 모르는 건 자기가 차인 이유뿐이 아니다. 대개의 여자들이 메뉴판을 들고 찻집주인과 싸우는 남자를 남자답다고 여겨 주지는 않는다는 냉정한 사실도, 그는 아직 모른다.

“지적인 여자라 그래서 만났는데 영 아니드라고. 그른 건 그르다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가 좋은데 말이지. 나쁜 여자라고 하지, 왜. 근데 그 여자는 둥글레차라고 써 있는 메뉴판을 보고도 가만 있더라니까. 둥글레가 모야, 둥글게도 아니고, 무식하게. 둥굴레차라고 고치쇼, 딱 지적하니까 사장도 그냥 나한테 고마워가지고는, 하하.”

 

 

 

 

 

# 7

내부 역량을 높일 겸 20개의 원고를 내부집필하겠다고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한다. 자기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겠다 하길래 마지못해 그러자 했다. 그런데 지금 나 혼자 17개째 쓰고 있다. 알고보니 인력비 줄이려고 내부인력 돌린 격. 고생은 내가 하고 사장한테 이쁨은 니가 받냐.

내 원고 검토하면서 뱉는 ‘ㅆ’ 소리가 아스라히 들려온다. 잠을 자는 법을 잊어버렸다. 깨어있은지 이틀은 넘은 것 같다. 여기가 어딘지, 나는 누군지. 자꾸 실수를 해서인지 벌써 7교째.내가 이 자리에 일곱번째랬지. 언제 이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점점 의식이 흐려진다.

 

“괜찮아요? 정신 들어요? 어머. 입술이 새파래.”

잠깐 정신을 잃었었나 보다. 놀라 모여든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 본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쟤, 내일까지 마감인건 다 마친거야?”

 

바로 다음날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이제 안녕하다. 그도 아마 안녕할 것이다. 내 자리에는 여덟 번째 직원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니체’라는 제목의 엄청나게 지독한 바이러스메일을 그에게 익명으로 보냈다.

이별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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