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소설] 대륙이동雪

2011.01.13 16:40

fuverus 조회 수:2079

  대륙이동雪

 

 

 

 

     K는 B를 바라봤다. 외롭게 흐르던 그의 시간이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B도 자신을 바라보는 K의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경쾌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됐음을 깨달았다. 주변은 여느 때처럼 고요했다. 말하자면 둘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둘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기껏해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K와 B 모두 더 이상의 섹스파트너는 원하지 않았고, 도저히 서로를 그렇게 여길 수도 없었다. 단지 상대와 성관계를 갖고만 싶다면 당장 소형 봉화를 불을 피워 정부의 ‘P-BOAT’를 부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영혼과 몸을 맞대고 일상을 보냄으로써 쌓아가는 사랑이었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했다.

 

 

     바로 20년 전 시작된 비극 때문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대륙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변혁이 목전에 임박해서까지 세계적인 지리학자들도 그 스케일을 감지해내지 못했다. 지구의 핵이 망가졌다거나, 태양이 대폭발했다거나 하는 등의 할리우드산 영화에서 즐겨 쓰는 전조도 없었다. 아주 천천히, 아래서부터 대륙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콰르릉- 하며, 6개 대륙은 거대한 30만개의 섬으로 분리됐다.

 

 

     대도시는 빌딩이 무너져 내리면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숨졌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은 비교적 평화롭게 섬이 됐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땅이 갈라지고, 그 틈으로 천천히 물이 차오르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예컨대 서울시 강남구의 사람들은, 서초구 이웃들이 다른 대륙 주민이 됐다는 사실을 결국 받아들여야 했다. 종말론이 대두되고 미쳐버린 장군들이 고장 난 미사일 버튼을 누르면서 몇몇 도시가 잿더미이 된 것을 제외하면 변혁은 무난한 편이었다. 사람들은 절망에 익숙해졌고, 지구가 순식간에 붕괴하지 않은 것에 안심했다. 이후에도 1년간 대륙분리가 2-3차례 이어졌고, 결국 지구는,

 

 

     10억 개의 섬에 10억 명이 살아가게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더 이상의 재난은 없었고, 이윽고 세계정부연합이 ‘분리의 종말’을 선언했을 때, 자그마한 논과 밭을 두고, 이부자리를 깔 수 있는, 딱 그만큼의 크기의 아주 작은 섬 같은 땅이 한 사람에게 주어졌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애를 써도 한 사람의 땅에서는 한 사람이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곡식만 거둘 수 있었다. 나눠진 대륙은 끊임없이 빠르게 지구의 표면에서 이동했으므로, 섬을 이어서든, 바다 위에든, 첨단 기술을 활용해 대형 시설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섬의 개수와 면적이 살아남은 인간의 수와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혼자 살라는 신의 계시로 믿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무질서한 세계를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소형 쾌속정과 무기를 보유한 세계정부연합은 변화한 세계를 통제하려 애썼다. 어차피 착취하려 해도 할 것이 없었으므로, 연합은 그렇게 악독한 지배자로 군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합은 인류의 존속을 심각하게 고민한 편이었다. 하나의 땅에서는 한 명분의 곡식만 나왔으므로, 섬의 수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게 인구를 관리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다.

 

 

     결혼과 가족제도가 폐지되고, 섹스는 허용하되 동거는 불허(혹은 불가능하게)됐다. 남녀가 눈이 맞으면 천막으로 내부가 가려진 P-BOAT를 요청해 양측의 섬이 그리 멀리 이동하지 않을 2시간동안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시간이 너무 짧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길다는 사람도 있었으므로 기각됐다. 아이를 갖고 싶다면 신청을 한 뒤 사망자가 발생해 무인도가 등록될 때를 기다려 주변의 적정한 연령대의 지원자와 동침을 해야 했으며, 아이는 어머니가 10살까지 키운 뒤 우선은 ‘아이를 위한 공동 섬’으로 강제로 보내졌다. 각자의 ‘섬’은 일종의 성역이었고, 드넓은 지구에서 한 번 마주친 섬은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속적인 모든 관계는 거부되고, 금지됐다.

 

 

     K와 B는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 곧 두 섬은 1미터 가량 거리를 두고 스쳐 지나가게 된다. 만약 둘이 동거를 택한다면 일시적으로는 행복할 수 있겠지만 보유한 식량이 몇 개월 안에 떨어질 것이고 곧 굶어죽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 버려진 ‘빈’ 섬이 우연히 옆을 지나간다면 살 수도 있겠지만, 곡식이 준비되지 않은 빈 섬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구나 한 번 버려진 섬은 자동으로 연합에 귀속되기 때문에 빈 섬을 발견한다고 해서 차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다시 말해 동거를 택한다는 것은, 한 쪽이 자신의 삶의 전부를 토대를 상대방에게 맡긴다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 서로를 보낸다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다. 지구의 표면은 섬의 면적에 비해 너무나 넓어서 한 번 지나친 사람을 다시 찾거나 우연히 마주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세상은 참 좁아, 따위의 말은 인터넷과 비행기가 있던 정신 나간 시절에나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흐르고, 다시 흘러 지구의 다른 곳으로 향한다. 자연은 인간에 비하면 너무나 거대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는 길의 방향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한 번 멀어지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이제는 편지를 쓸 종이도 없고, 학을 접을 종이도 유리병도 없다. 순간을 놓치면 재현할 길이 없는 음악을 들려주는 라디오도 없고, 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녹음해도 전해 줄 수도 없다. 그녀가 쓴 글의 흔적을 두근거리며 추적할 PC통신도 없고, 스카이러브 같은 친목 사이트도 없다. 이제는 그녀를 우연히 만날만한, 밤늦은 시각 독서실 앞도 거리도, 두 명이 나란히 서서 라면을 먹던 편의점 탁자도, 때때로 80년대 말 이문세의 음악이 흘러나오던 동네 음반가게도, 어디선가 햇살이 스며들던 지하철 2호선 강변역 승강장도, 붙어있는 두 학교의 정문으로 이어지는 봄바람 불어오는 등굣길도 없다. 그러니까 만일 지금 헤어진다면 그녀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 K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사람을 만나면 때로는, 주변의 모든 것이 사소해 보이기 마련이다. 어쩌죠? K가 젖은 눈으로 말했다. 어떻게 하나요. B는 떨리는 입술로 답했다. K의 심장은 파도처럼 들썩였고, B의 다리는 고백처럼 주춤거렸다. 왜 사랑에 빠진 걸까. 한동안 인적 드물기로 유명한 해역을 외롭게 지나, 은은한 해무 너머로 그 사람의 흑발이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였을까. 아니면 여기가, 이성이 곧잘 실종되고 사람들이 성욕에 휩싸인다는 미스터리를 지닌 태평양 한가운데 ‘성애의 삼각지대’쯤 되는 것일까.

 

 

     그들은 한 뼘 밖에 되지 않는 자신의 섬 해안에 위태롭게 선 채로 서로를 바라봤다. 섬은 어느새 눈에 띠게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순간의 선택뿐이다. 몸을 던질 것인가, 사랑을 견딜 것인가. 그들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둘은 이미 직감했다. 눈으로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내가 그리로 갈까요, 아니면, 내가 그리로 갈까요. 너무나 우연히, 하지만 운명적으로 찾아온 사랑은 그 자체가 감동이었다. 우리의 사랑의 적은 세상이며, 우리의 사랑의 장애는 자연이다. 비극은 사랑을 더욱 가치 있게 했다. 아니 사실, 그런 것 따위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단지 나는 당신을 뜨겁게 사랑할 뿐이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할 뿐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눈으로 말했다. 그 눈길이 어찌나 뜨거웠는지,

 

 

     깜짝 놀란 신이 지구를 식히려 눈을 뿌렸다.

 

 

     눈이 내렸고, 쌓였다. 펄펄 빛나는 눈이 토닥토닥 세상을 두드리듯 내려앉았다. 하나가 된 그들의 몸과 마음이 너무 뜨거워 신은 계속 눈을 내렸고, 인간의 사랑이 있는 대지에 내린 눈은 녹았지만, 바다의 표면은 눈이 쌓이면서 천천히 얼기 시작했다. 옅게 얼은 바다의 표면 위로, 다시 눈이 내렸고, 쌓였다. 쉬지 않고 내린 눈은 너무나 단단해서, 흐르던 섬을 붙잡아 주었다. 세상은 다시, 사람이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곳이 됐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서히,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더 따스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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