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 소설] - 똘이와 순이의 밤

2010.10.19 07:06

disorder 조회 수:2681

 

똘이와 순이는 동거중이다. 똘이는 순이의 부드러운 뱃살이 좋아서, 순이는 똘이의 다리털이 적다는 점에 끌려 동거하고 있다.

똘이는 밤9시쯤 퇴근길에 생각한다.

 

집에 가면 순이 역시 퇴근을 해 있겠지. 순이는 어떤 자세와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혹시 자주 그러는 것처럼 얼굴에 팩을 한 채 티비의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입도 제대로 못 벌리고 웃고 있는걸까.

그 모습이 싫든 좋든 나는 집에 들어가 순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 

현관 문을 열면 정면에 바로 침대가 있고 침대 맞은편엔 티비가 있고 티비의 옆엔 순이가 붙어앉아 티비를 보고 있고. 이 광경을 미리 끊임없이 상상하고 있어도 좋다.

실제 상황에 맞딱뜨려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똘이가 현관문을 여니 은근한 어둠이 눈 앞에 밀려다니고 똘이는 맞은편 침대 위에 위 아래 속옷만 입은 순이가 현관문쪽으로 몸을 향해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확인한다.

순이의 모습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둠 속에서 희부옇게 희미한 빛을 반사하고 있는 순이의 하이얀 뱃살이다.

뱃살은 몇번인가 접혀있고, 접힌 각 층의 두께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꽤 일정하고, 똘이는 일정한 두께로 잘린 고기와 상통하는 순이의 규칙적인 뱃살을 보며 '기계 문명'이라는 표현을 무심코 떠올린다. 

그 때 순이가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켠다. 노란 불빛이 순간 순이의 배에 옅은 금박을 입힌다. 순이의 배는 투명하고 고전적이고 짙고, 비싸보인다.

똘이는 그 배를 보고 순간 정신적으로 어떤 시퍼런 숭고함을 느껴 각성하였고, 이와 함께 순이의 배가 불상의 그것과 닮았다는 착상에 이른다.

황금박을 입힌 불상의 배는 접혀있지 않다. 대부분 그렇다. 그러나 적어도 순이의 금빛 뱃살은 어떤 종류의 불상과 완벽히 상호작용하고 있다. 

혹시 순이 자체가 불상인 것은 아닌가. 순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똘이는 무의식과 의식의 모호한 중간 상태에서 순이의 머리 스타일을 얼른 확인한다. 

다행히 머리통에 딱 달라붙은 곱슬머리가 아닌, 긴 생머리이다.

 

순이는 옅게 웃으며 인사한다.

 

"안녕, 똘이."

"그래, 안녕, 순이."

"나 똘이 기다리느라 애가 탔었어. 똘이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걱정됐거든."

 

하지만 똘이는 돌아왔고 이 점은 순이를 크게 만족시켰다. 순이는 그대로 앉은 상태에서 아이같이 칭얼대는 표정으로 똘이를 향해 양 손을 뻗는다.

양 손을 뻗어 생긴 순이의 양 팔 사이의 공간에 짜릿한 향기가 휘감겨 있다. 똘이는 그 공기 안으로 녹아드는 대신 눈을 똑바로 뜨고 순이에게 말한다.

 

"거울을 봐봐, 순이. 꼭 불상같아서 사실 나 아까 놀랐어. 대체 왜 그렇게 불상같이 앉아있던거야?"

"나 불상 맞아. 똘이. 내가 불상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똘이는 순이가 불상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진지하게 생각할 뻔 하다가 우롱당한 듯한 느낌에 언성을 높인다.

 

"장난 마, 순이. 내가 그런 거 무서워하는 거 알면서 그래. "

"나 정말 불상이야. 몰랐어?"

"정말이야?"

"응. 그러지 말고 이리 와, 똘이" 순이가 꽤 달콤한 목소리로 재촉한다.

"싫어, 지금은." 똘이가 불편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순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 쪽으로 다가간다.

화장대의 거울을 바라보며 순이는 똘이의 특정 반응을 기대하여 마련한 듯한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마치 소극장 붉은 조명 아래에서 연기를 하는 연극 배우의 것과 같은 표정이다. 똘이는 그런 순이의 표정에서 다시 한번 두려움을 느낀다. 거울에 비친 순이는 다행히 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똘이는 불상 역시 부처를 닮지 않았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다.  순이는 고개를 돌려 똘이를 보며 맑으면서도 어두운 음색으로 짧게 웃음을 내뱉은 후 다시 화장대 거울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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