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타는 냄새

2013.08.04 01:16

파라파라 조회 수:2402

 내 고향에는 아름다운 억새밭이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갈대라고도 하지만 억새는 갈대보다 키가 작고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이 뭔가 더 단단한 느낌이다. 그 대가리에는 흰 솜털처럼 나풀거리는 것이 붙어 있어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억새밭에 바람이 불어 수천, 수만의 억새풀들이 파도처럼 휘몰아칠 때의 광경은 장관이다. 특히나 석양을 받아 억새밭이 붉은 금빛으로 물들 때는 더욱 그렇다.
지금 내가 있는 이 별장은 살던 내가 살던 옛 시골집을 허문 터에 지은 것이다. 돌아가신 나의 부친께서 이곳을 떠나시며 이 주변의 땅과 함께 친척에게 넘긴 후 지어진 것이다. 이 별장도 실은 작고 볼품 없는 것이지만 판자집과 다름없었던 옛 집에 비하면 최신식의 건물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예전의 집과 함께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도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래도 이 별장의 좋은 점은 여기서 넓은 억새밭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근처의 억새밭들은 농지나 밭으로의 개간을 통해 많이 사라졌지만 이 주변은 땅이 척박하여 그런지 거의 예전과 같은 넓은 억새밭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나는 고향의 풍경을 즐기려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지금은 더 이상 여기에 없는 내 여동생을 만나고자 함이다. 여기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내가 이전에 겪었던 일을 이야기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한달 전 나에게는 기쁜 일이 있었다. 4년간의 공부 끝에 드디어 공무원 시험에 최종 합격한 것이었다. 가정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3년간이었다. 그간은 아내가 수입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떨어지기를 수 차례. 올해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공부에 매달렸고 그 결과 2차까지 무사히 통과에 성공했다. 기뻤지만 마지막 면접에서도 떨어지는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준비했고 면접이 끝난 후에는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초조하게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최종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했을 때의 기분은 아들인 지우가 무사히 탄생했을 때의 기쁨 이상의 것이었다. 나는 아내와 서로 부둥켜 안고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방방 뛰었고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지우도 뭐가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를 따라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아내의 눈물을 닦아주며 지금까지의 고생을 앞으로 갚아주리라 다짐했다. 
 나는 곧이어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홀로 사시는 어머니께서는 소식을 듣자 기뻐하셨지만 곧 눈물을 흘리시며 말하셨다.

 "얘야, 이런 날에 네 동생이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나는 가슴이 곧 먹먹해졌다.

 여진이와 나는 다섯 살 차로 우리는 나이차이가 좀 있는 남매였다. 부모님은 나에게 몸이 약했던 여진이를 맡아 보살펴 줄 수 있는 책임감 있는 보호자가 되기를 바라셨지만 나는 여진이에게 좋은 오빠였던 적이 별로 없다. 

 여진이는 어머니를 닮아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졌었지만 도드라진 광대뼈에 눈꼬리가 지나치게 치켜 올라가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예쁘다는 소리는 별로 듣지 못했다. 마른 몸과 또래에 비해서도 유난히 작은 키도 외모를 볼품없어 보이게 했다. 하지만 외모보다도 더 문제였던 것은 바로 동생의 건강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미숙아로 출생했던 여진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병원을 들락거리는 일이 잦았다. 또 여진이는 다른 애들보다 가슴 부위가 쑥 들어가 있었는데 의사는 이걸 오목가슴 증이라고 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진이는 조금만 운동을 해도 금방 숨이 차 했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밖에서 뛰어 노는 것도 버거워 했다. 자연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친구도 별로 없었다.

 여진이는 나에게 놀아달라고 보채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여진이는 고집이 세서 무슨 놀이를 하던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화를 내었고 즐거운 놀이는 서로 윽박지르는 싸움으로 마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님께서는 동생을 두둔하셨다.

 "너는 나이 먹은 오빠가 되어 가지고서는 동생에게 양보는 못할 망정 뭐 하는 짓이야!"

 그럴 때마다 나는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점점 더 동생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나이가 더 먹으면서는 친구들과 함께 밖에서 공을 차며 노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여진이는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어 같이 공을 차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여진이의 폐는 격한 운동을 견디지 못했고 조금만 운동장에서 뛰어도 곧 여진이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그러면 나는 동생을 집에 데려갈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그날 공놀이는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여진이가 나를 좋아해서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날 죽도록 미워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여진이는 축구를 하고 있는 나를 쫓아다녔고 나는 여진이가 한편으로는 얄미워 여진이가 뭐라고 하던 무시한 채 공만을 찼다. 소리를 지르며 운동장을 달리던 여진이는 곧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땅에 쓰러졌고 나는 놀라서 여진이를 들쳐 업고 집으로 뛰었다. 가슴이 쿵쾅대며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여진이가 내 등 뒤에서 고개를 들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너 좀전에 숨찬 척 하던거, 다 연기였어?"
 "오빠가 내 말 안 들어주니까 그렇지."

 난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등에 업었던 여진이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여진이는 얼굴을 아래로 한 자세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손으로 먼저 땅을 짚을 수 있었지만 충격이 컸는지 바닥에 엎어져서는 울음을 떠뜨렸다.

 "엄마한테 이를거야!"

 나는 벌컥 겁이 났다. 어머니께서 손과 무릎의 상처를 보시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궁하실게 분명했다. 나는 동생을 달래기 시작했다. 동생은 엎드린 채로 통곡을 하다 나에게 말했다.

 "콩 구워줘."

 전에 나와 내 친구들이 콩서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여진이는 그 때를 기억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여진이는 그 때도 끼고 싶어했지만 우리가 못하게 했었다.

 "알았어."

 나는 일단 동생을 달랠 목적으로 말했다. 나는 근처 콩밭에 가서 아직 여물지 않은 콩대를 몇 줄기 꺾어왔다.

 때는 여름이라 아직 추수를 하지 않아 주변에서 태울 만한 짚을 구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집 근처 억새밭에는 바짝 말라있는 억새풀들이 많았다. 나는 동생을 거기로 데리고 가서 불을 피울만한 곳을 찾았다. 적당한 널찍한 공터에 마른 억새를 모아놓고 집에서 가져 온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는 콩을 대채로 불 속에 던져 넣었다. 시간이 지나자 투닥거리는 소리가 나며 흰 연기와 함께 불길이 올라왔다.

 매캐한 탄내가 코를 찔렀다. 우리는 억새풀이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 콩깍지를 꺼냈다. 비록 겉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지만 껍질을 벗기어 내자 잘 익은 콩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동생은 코와 턱에 그을음을 묻혀가며 콩을 잘도 먹었다. 여진이는 정말로 행복해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동생에게 품고 있었던 원망이 마음 속에서 사라졌다. 평소에는 보기 싫었던 쭉 찢어진 눈매마저 귀엽게 보였다. 우리는 얼마 안 되는 콩을 다 까먹고 땅바닥에 누웠다. 동생이 물었다.

 "오빠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글쎄? 회사원 같은 게 되지 않을까?"
 "오빠는 분명 사장님이 될 수 있을 거야. 오빤 뭐든지 잘하니까."
 "그래?"

 여진이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나는 되물었다.

 "여진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나는 가수가 될 거야, 아주 인기가 많은 가수."

 여진이의 외모로는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여진이의 얼마 안 되는 폐활량으로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나는 여진이가 실망할 까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디에선가 탄 내가 코를 찔렀다.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억새밭에서 흰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분명히 불을 껐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었다. 

불은 다행히 멀리 번지지는 않았지만 불길은 매우 거세었다. 나는 미친 듯이 불을 발길로 밟아서 껐다. 불길이 뜨거웠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불길은 새로 산 운동화와 바지 끝단을 태워 먹고서야 비로소 꺼졌다. 불을 냈었다는 증거가 너무도 명백해서 어머니께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동생은 제껴두고 나에게만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다. 나는 어머니께 종아리를 맞았지만 나를 더 속상하게 했던 것은 여진이가 불을 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어머니께 말했을 때였다. 나는 너무나도 분해 어머니의 꾸지람이 끝난 후 동생에게 달려가 모진 말을 해 대었다. 동생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조금도 그녀가 불쌍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동생에게 그 증상이 생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 사건이 있고 다음 날 동생이 갑자기 한밤중에 내 방으로 달려왔다. 동생은 나를 깨우더니 말했다.

 "오빠! 집에 불이 났나 봐. 타는 냄새가 나!"

 나는 잠결에 고개를 들어 냄새를 맡아 봤지만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냥 잠이나 자라."

 나는 돌아누웠다. 여진이는 내가 반응이 없자 안방으로 달려갔다. 밤중에 아버지께서 여진이와 함께 집 이곳 저곳을 돌아보셨지만 불탄 흔적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가끔씩 동생은 나에게 뭔가 타는 냄새가 난다고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냄새를 맡아봐도 타는 냄새는 나지 않았고 타는 곳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여진이의 말을 무시하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여진이에게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라고 말씀 하셨다. 자신의 말이 가족들에게 먹히지 않자 여진이도 그런 말을 꺼내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고, 언젠가 부터는 더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여진이가 결국 그 냄새를 맡지 않게 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게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즈음부터 여진이는 더 이상 나를 따라다니거나 같이 놀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말을 거는 빈도도 점차 줄어들었다. 나는 학교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그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특별히 새로 사귄 친구들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바빴고 동생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는 못했다. 여진이와 나는 이렇게 멀어져 갔고 나는 언젠가는 동생과 다시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몇 년 후 여진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나는 여진이의 마지막에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 그 때 나는 서울에서 특목고 입학을 위해 한참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께서는 혹 시험에 방해가 될까 나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난 시험에 합격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여진이가 그런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면 난 당장에 시험을 때려치고 내려왔을 것이다. 내가 서울로 올라가기 전 여진이는 병원에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나빠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여진이는 어릴 때부터 이런 일들로 병원을 수없이 들락거렸고 그때마다 회복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고열에 기침이 평소보다 더 심하기는 했지만 여진이가 늘상 겪어왔던 그런 일들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었다. 
 난 정말 조금도 여진이가 잘못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진이는 내가 서울로 떠날 때 시험 잘 보라며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게 내가 본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여진이는 내가 떠난 다음 날 갑자기 호흡곤란이 심해져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고 한다. 부모님께서는 동생을 더 큰 병원으로 옮기고 싶어하셨지만 산소 호흡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러는 와중에 동생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동생은 결국 제대로 손 써보지도 못한채 중환자실에서 각종 호스와 기계들 사이에 둘러싸여 차갑게 변해버렸다.

 나는 당시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난 동생의 죽음을 미리 알리지 않은 부모님께 화를 냈다. 사실 이 세상 모든 것에 다 화가 났다. 난 원하던 학교에 입학했지만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시간만 흘려 보냈다. 모든 것이 다 허무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그 때 큰 사고를 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난 고 3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책을 손에 잡았다. 그러나 그 동안 벌어진 동기들과의 학업의 격차는 컸다. 난 간신히 수도권 내 4년제 대학에 들어갔지만 나와 부모님이 어렸을 때 기대하던 수준에는 많이 못 미치는 곳이었다.

 그간 허무하게 보낸 세월을 대신하려는 듯이 대학에서 열심히 학점을 쌓았고 이런 저런 자격증도 따 모은 끝에 4학년이 될 때쯤에서는 이력서에 꽤 괜찮은 스펙을 써 넣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취업전선에 뛰어 드니 학력의 벽은 높았고 여러 군데서 좌절을 겪은 끝에 나는 대기업 대신에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중소기업에 합격하게 되었다. 그래도 입사 후에는 아쉬움을 잊고 열심히 일했다.
 아내는 회사에 나보다 1년 먼저 입사한 선배였다. 같이 일을 하던 중 내가 호감을 가지게 되어 먼저 사귀자고 했고 아내도 나를 평소 꽤 괜찮게 보고 있었는지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결혼을 한 건 그로부터 1년 후, 지우를 가지게 된 건 그로부터 또 1년 후였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가정생활이자 직장생활이었지만 난 이곳에서 일을 하는데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고민을 한 끝에 직장을 그만 두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보겠노라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많이 걱정했지만 내 결심이 굳은 걸 알자 승낙해 주었다. 나이도 있고 가정도 있는 입장에서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이 시험을 통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항상 믿어 주었다. 심지어 내가 나를 믿지 못할 때에도 아내는 항상 나를 믿어 주었다. 아내는 그런 여자였다. 그리고 그 믿음 덕분에 내가 결국은 해 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합격 발표 당일날 밤 늦게까지 많은 축하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정이 넘어서야 비로소 전화기가 멈추었고 나는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 지쳐 쓰러져 있는 나를 아내가 꼭 안아주었다.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타는 냄새를 맡기 시작한 것은.


 한밤중에 나는 강렬한 타는 냄새에 잠에서 깨었다. 주위가 온통 매캐한 연기 냄새로 가득했다. 나는 놀라서 아내를 깨우고는 지우에게로 달려갔다. 다행히 지우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불이 났을 만한 곳을 찾아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내는 지우를 데리고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불이 다른 곳에서 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집 밖으로 나가 아파트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불길도 연기도 볼 수가 없었다. 허탕을 치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자 아내가 말했다. 

 "여보, 난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나는 믿을 수가 없어 지우에게 무슨 냄새 나지 않냐고 물었다. 하지만 지우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타는 듯한 냄새는 아침이 되서야 사라졌다. 
 나는 다음 날 관리실에 어제 밤 뭔가 태우지 않았냐고 전화해 물어봤다. 그런 일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던 나는 옆집과 아래, 위층 집을 다니며 어제 밤 불을 피우거나 한적이 없는지 물었다. 역시 그런 적이 없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혹시 도시가스가 새는 건지 걱정되어 가스 검침도 받아 보았다. 밸브는 새는 곳이 없이 정상이었다. 나는 그 때의 그 타는 냄새는 무엇이었을까 자문해 보았지만 답변이 나올 턱이 없었다. 하지만 특별히 피해 본 것도, 피해 본 사람도 없으니 큰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만 이 일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며칠 후 나는 저녁 식사자리에서 타는 냄새를 또 맡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지독한 냄새였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우리 집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나는 현관 문을 열고 나가 맞은 편 집 문을 두드렸다. 반 대머리가 벗겨진 옆집 주인은 자기 집에는 아무 일도 없다고 했지만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막무가내로 집을 살펴 볼테니 들어가게 해달라고 말했다. 나는 옆집을 모두 헤집어놓다시피 했지만 불난 곳은 커녕 그을은 자국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는 내 등 뒤에 옆집 주인의 경멸어린 시선이 꽂혔다. 그건 마치...미친 사람을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타는 냄새는 점점 심해졌다. 나는 아랫층으로 뛰어갔다. 바로 아랫집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종일 집에서 농땡이만 피우는 젊은 백수놈이 살고 있었다. 분명 그놈이 담배를 피우다 불을 낸 것일 것이다. 나는 문을 두들겼다. 녀석이 세수도 하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쓰레빠를 끌며 나왔다.

 "나 윗층 사는 사람인데, 여기서 뭔가 타는 냄새가 나는데?"
 "예? 아무 냄새 안나는데..."

 나는 녀석이 순순히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난 집을 조사해볼테니 문을 열어달라고 말했다. 녀석은 안된다고 하면서 필사적으로 나를 막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몸으로 녀석을 밀어내고 들어가려고 했다. 몸싸움이 벌어졌다. 녀석이 욕을 하면서 나를 밀어냈다.

 "꺼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거야, 이런 미친 놈 같으니!"
 "부를 테면 불러봐라 니가 저 안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 지 다 알수있게 말야!"

 녀석은 문을 꽝 닫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씩씩대면서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끌어 안았다.

 "당신 뭐하는거야! 나 무서워 죽겠다구..."
 "여기 불이 났다고! 당신 이 타는 냄새 맡지 못하겠어?"
 "아무 냄새도 안나! 안난다고!" 

 아내는 울먹이며 말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그럼 내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밤이 깊어서야 타는 듯한 냄새는 사라졌다. 

 날이 밝자마자 나는 관리실의 전화를 걸어 아랫집에서 어제 저녁 불이 났던 것 같다고 검사 좀 해달라고 말했다. 관리인은 그러마고 대답했지만 목소리에는 미심쩍은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오후가 되어 관리실에서 연락이 왔다. 조사해봤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고 했다. 믿기지 않는 결과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기업자를 불러 집의 누전 검사도 받아 보았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 나는 초조해졌다.
 아내는 내 후각에 뭔가 이상이 있을 지 모른다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내의 권유에 못이겨 결국 동네 이비인후과를 갔다. 의사는 이것 저것을 물어보더니 엑스레이를 찍고 코에 기구 같은 걸 넣어서 검사를 했다. 의사는 내 코 안에  작은 물혹이 있기는 하지만 별 다른 문제는 없다고 했다. 

 "그럼 이것 때문에 저... 타는 냄새 같은 게 날 수도 있나요?"

 의사는 별 대답 없이 잘 모르겠다는 표시로 고개만 갸우뚱할 뿐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내 코는 별 이상이 없다고 말했지만 냄새의 원인은 결국 알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종종 나는 그 타는 듯한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주위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가 불안해 할 것이 분명했고 무엇보다 나만 타는 냄새를 맡는다는 사실 자체가 내 정신 이상의 징후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미친 사람일리가 없었다. 한 가족의 가장이자 어려운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지적 능력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공무원 연수원에 들어갈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나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었다.

 그 후로 한 주쯤 후 나는 고등학교 동창들이 합격 축하 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해서 모임에 나갔다. 우리는 모두 명문고의 낙오자들로 나를 포함한 세 명 모두 한참 방황하던 시절에 함께 몰려다니던 녀석들이었다. 이들은 공부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번듯한 직장을 잡고 나름 잘 지내고 있었다. 우리는 시내의 한 호프집에서 만났다. 맥주를 나누며 한참 사는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증세가 찾아왔다.
 매캐하고 독한 타는 냄새, 여기 어디선가 유독한 연기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코를 붙잡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친구 하나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왜, 몸이 안좋아?"

 코를 막았지만 냄새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런 냄새라니 분명 어디선가 지독한 것이 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카운터의 종업원에게로 달려갔다.

 "여기 불 난거 아냐?"
 "예?"

 갓 스물 정도 먹어 보이는 남자 종업원이 반문했다. 음악 소리와 떠드는 소리로 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지금 타는 냄새 나잖아!"

 그 애는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보더니 말했다.

 "아뇨 아무 냄새 안 나는데요."

 이렇게도 확실하게 타는 냄새가 나는데 모른 척을 하다니 나는 화가 났다.

 "여기 불 났다고!"

 주위에서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여기 불 났다고요!"
 "뭐 하는 거야?"

 친구들이 나를 만류했다. 그러던 중 입구 쪽에 가깝게 앉아 있던 여자 한 명이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이 사람들이 우루루 입구로 몰렸다. 

 "여긴 괜찮아요, 그냥 나가시면 안돼요!"

 종업원 애가 사람들을 막아보려고 소리 질렀지만 소용 없었다. 입구에서 뚱뚱한 남자 하나가 어딘가에 걸렸는지 앞으로 넘어졌고 그 뒤로도 술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몇 사람이 이미 넘어져 있던 사람에게 걸려 넘어지며 주위의 의자며 식탁을 쓰러뜨렸다. 깨진 접시와 음식물이 튀며 주위는 난장판이 되었다. 소동이 커지자 안경 쓴 중년 남자 하나가 카운터 뒤에서 놀란 얼굴로 나왔다. 아마 이곳의 주인인 듯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아저씨가 여기서 불이 난대요."

 종업원 애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서 불이 난다는 거에요?"
 "이 냄새 안나요? 불 나는 곳을 찾아봐야 할 것 아뇨?"

 사장과 종업원은 가게 이곳 저곳을 뒤졌지만 불난 곳은 찾을 수 없었다. 손님들은 이미 모두 빠져나간 뒤였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소방차를 부른 모양이었다.

 소방관이 도착해서 가게 곳곳을 뒤졌지만 불이 난 곳은 찾을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가게 주인은 나에게 화를 내며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친구들이 대신 사과를 한 후에야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대리운전을 부른 친구의 차를 얻어타고 집에 도착했다. 친구가 나를 데려다주며 아내에게 말했다.

 "말도 마세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세요? 무슨 타는 냄새가 난다고 어찌나 그러던지..."

 아내는 놀란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당신 그 증세 또 시작 된거야?"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할 말도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맡은 냄새는 진짜였다. 만약 그게 진짜가 아니라면 세상에 진짜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아내는 풀죽은 나를 위로하며 말했다.

 "당신 그 동안 공부하느라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예민해져서 그럴 거야."

 아내의 말 대로 내가 예민해 진 것은 맞다. 하지만 그건 시험 때문이 아니라 이 냄새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냄새.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서 옛날에 동생에게도 이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네가 그런 건 네가 너무 예민한 탓이라고. 동생의 일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머리를 어딘가에라도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생도 이것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타는 냄새가 난다고. 그때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지금은 나만 맡을 수 있는 이 냄새를. 내 표정을 읽은 아내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냄새와 관련된 일이라면 거의 모두를. 동생에 대한 얘기는 거의 아내에게 들려준 적이 없었다.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왔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당신 동생의 병이랑 이 증세가 관계 있는 게 아닐까? 그럼 당신도 혹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동생은 폐렴으로 사망했지 유전 질환 같은 게 아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아내는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도 병원에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정밀 검사를 받아보자."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전에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알았어, 하지만 그 전에 나 고향에 내려가 보고 싶어."
 "고향에는 왜?"
 "동생을 찾아가 보고 싶어, 못 가본지 오래 되었거든."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읍내에는 새 건물들이 들어섰고. 예전에 방앗간이었던 곳은 피씨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살던 곳 주변은 워낙 시골이어서 그런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억새밭도 그대로였다. 내 고향에 처음 와본 아내는 억새밭의 아름다움에 새삼 경탄했다. 지우가 특히 이곳을 좋아해서 자기 키만한 억새풀 사이로 뛰어다니며 놀았다. 시간이 늦어 돌아가게 되자 지우는 많이 아쉬워했다. 억새밭이 석양을 받자 붉은 빛으로 물드는 것이 기억보다도 훨씬 강렬했다. 

 다음 날 우리는 꽃을 한 다발 사들고 납골당을 방문했다. 여진이의 몸은 검은 빛이 도는 작은 항아리에 담겨져 있었다. 생전에 몸집이 작았던 여진이처럼 항아리도 조그마했다. 우리는 꽃을 놓고 명복을 빌었다. 지우가 여진이의 사진을 보며 누구냐고 물어 보았을때 고모라고 대답해 주었다. 납골당을 나설 때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듯 마음이 가벼웠다. 
 이걸로 내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이 문제가 스트레스든 뭐든 정신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내게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난 아내에게 내가 다녔던 학교와 추억이 어린 장소를 이곳 저곳 소개해 주고는 별장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어느 때보다도 맑고 또렷했다. 내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아들을 옆 방에 재우고 큰 방에서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가 집 만큼 편하지는 않았지만 낮에 돌아다녀 피곤해서 그런지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잠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그 느낌이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나를 찾아왔다. 온 방안이 불타는 듯 한 지독한 타는 냄새. 이곳에 와서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이건 정말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되뇌이며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냄새는 점점 강해졌고 나는 결국 참을 수 없게 되어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놀랍게도 방이 환하니 밝았다. 너울거리는 파도와 같이 빛이 창문 쪽에서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켜 창문 밖을 내다 보았다. 밖은 온통 불바다였다. 넓은 억새밭 전체가 이글거리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 광경이 꿈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워 잠시 굳은 채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로도 전해져 오는 화끈거리는 열기가 꿈이 아님을 실감케 했다. 나는 급히 아내를 깨웠다. 아내는 깨어나서는 밖의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당신은 빨리 지우 깨워서 데리고 와, 여기서 나가야 해!"

 아내가 지우를 데리러 간 사이 나는 귀중품을 가지고 온 가방 속에 집어 넣었다. 곧 아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혼자였다.

 "지우가 없어!"

 아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는 내 표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정신 없이 별장 안을 뒤졌다. 지우는 아무 데도 없었다. 현관에 놔둔 지우의 신발이 사라지고 없었다. 지우는 밖에 나간 것임에 분명했다. 나는 창문을 통해 불타는 억새밭을 바라보았다. 어제 억새밭에서 놀던 지우를 모습이 떠올랐다. 지우가 지금 저 안에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짐을 아내에게 맡기고 샤워실로 들어가 온 몸에 물을 쏟아 부었다. 아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여보, 어떻게 하려고."
 "지우를 찾아와야겠어."

 아내는 나를 꼭 껴안았다. 제발, 제발 무사하게 해달라고. 나는 수건에 물을 묻혀 입을 가리고 밖으로 나갔다. 불은 아까보다도 더 번져 있었다. 주위는 환한 대낮보다도 더 밝았도 화염은 세상을 모두 태워버릴 기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밖에서의 열기는 집 안에서 느끼던 것과는 차원이 달라서 제대로 눈을 뜨고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억새밭으로 들어서자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쉴새없이 기침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지우야!"

 사방이 불바다였다. 머리 속에서는 지우가 불길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게 된 모습이 떠올랐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미친사람처럼 돌아다니며 지우를 찾았다. 거센 불길에 얼굴과 손에 화상을 입고 머리카락이 그슬렸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길은 점점 더 거세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나도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절망감이 폐부를 찌르듯 아프게 조여왔다.

 "아빠!"

 너무나도 반가운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지우였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찾아가 드디어 지우를 만날 수 있었다. 난 아들을 부둥켜 안았다. 지우는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감격을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이미 불길이 우리가 있는 곳까지 접근해 오고 있었다.

 "아빠 손 꼭 잡고 잘 따라와야 돼!"

 지우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반드시 여기서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내가 지나왔던 길은 이미 불바다로 변해 있었다. 나는 불길이 덜 미치는 곳을 향하여 발을 옮겼다.

 가는 데마다 불길이 앞을 막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했지만 곧 불길을 피해 어디로든 도망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내몰렸다. 빠져나갈 곳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쳐봤지만 어느 곳에도 타오르는 불길 뿐이었다. 우리는 곧 불길 사이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이대로는 아들과 함께 이곳에서 타죽을 수 밖에 없었다. 온 몸에서 비오듯이 땀이 쏟아졌다.

 그 순간 어디선가 다른 냄새가 나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타는 냄새였지만 뭔가 다른 듯한 고소한 냄새, 콩을 볶는 것 같은 냄새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냄새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다행히 불길이 그리 거세지 않은 장소가 있어 그리로 불길을 뚫고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냄새를 따라 좀 더 앞으로 가자 자그마한 공터가 나왔다. 억새밭 한 복판에 있는 곳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발목에도 미치지 않는 잡초 외에는 억새풀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 앉아 불길이 지나가기를 빌며 외투를 벗어 지우를 감쌌다. 

 불길은 우리가 있는 곳 바로 코 앞에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태울 것이 없어서 그런지 불길은 우리 앞에서 넘실거릴 뿐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누군가가 우리 주위로 보이지 않는 금이라도 그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불길은 한동안 우리를 잡으려는 듯 발악을 하며 타올랐지만 시간이 지나자 힘을 잃고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억새밭을 다 태우자 불길은 번져갈 때 만큼이나 빠르게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불길이 거의 잦아들자 나는 아들을 데리고 별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아까 맡았던 고소한 콩 냄새가 나는 듯 했다. 하지만 주위에는 콩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는 게 이상한 점이었다. 

 터덜터덜 걷던 우리를 소방관이 발견했다. 진작 출동은 해 있었지만 불이 너무 강해서 접근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내는 우리가 무사히 돌아온 걸 보고 울음을 터뜨리며 지우를 끌어안았다. 나와 지우는 곧 근처 병원으로 옮겨졌다. 나는 얼굴과 팔에 꽤 넓은 부위의 화상을 입었지만 정도가 심하지는 않아 흉터 없이 곧 회복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지우는 다행히 아무 다친 데도 없었지만 경과 관찰을 위해 하루 정도 입원해 있으면 될거라는 말을 들었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지우와 얘기를 했다. 지우는 밤중에 잠이 오지않아 밖에 나갔었는데 불이 난걸 보고는 구경하다 불에 갇히게 되었다고 했다. 아내는 말없이 나간 것에 대해 지우를 나무랐다. 그런데 그 후 지우는 나에게 좀 이상한 얘기를 했다. 지우가 불길 사이로 헤메이던 때, 그 억새밭에 누군가가 또 있었다는 것이다.

 "무서워서 울고 있는데 어떤 누나가 와서는 여기로 따라 오라고 그랬어. 그래서 그 누나를 따라 갔더니 아빠를 만날 수 있었어."
 "그 누나는 어디로 갔는데?"
 "몰라, 아빠를 만난 후에는 못 봤어."
 "그 누나..혹시 어떻게 생겼어?"
 "눈이 좀 무섭게 생겼는데 웃을 때는 이뻤어."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지우야... 우리 어제 고모 만나러 간다고 갔었잖아. 그 때 사진 보여줬었지? 그 사진에 있는 사람처럼 생겼어?"

 지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로 여진이었을까? 여진이의 웃는 모습이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다.


 우리는 다음 날 퇴원해서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공무원 연수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아내와 아들은 평소와 같이 지내고 있다. 아들에 대한 아내의 감시가 좀 더 심해졌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억새밭에 있었다는 사람이 생각난다. 그게 정말로 여진이었다면 나는 그녀가 잠시 조카를 보러 하늘에서 내려왔었다고 생각하련다. 만약 그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까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타는 냄새는 더 이상 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다른 냄새가 가끔씩 희미하게 난다. 동생이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약봉지의 냄새, 그 애 손에 항상 묻어있던 풀내음, 피부에 바르던 파우더의 내음, 그리고 여진이를 품에 꼭 안아 주었을 때 나던 보드랍고 달콤한 샴푸 냄새...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