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카르마

2013.01.21 23:31

clancy 조회 수:1541

카르마

clancy

'우와, 진짜로 이런 곳이 있구나...'

완수가 긴 잠에서 깨어나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완수는 사자(死子)다. 이승의 시간으로 20여일 전 그는 단칸 자취방 화장실에서 팔목을 긋고 자살했다. 소위 말하는 고독사였다. 그외 외톨이 인생은 학창시절 못난 외모와 소심한 성격 때문에 왕따를 당했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왕따라는 경력은 마치 낙인처럼 학창시절 내내 따라다녔고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사회에 나와 취업을 하기까지 수 차례 시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를 사회에 섞이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 만들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놀림받고 따돌림 당하는 것은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애 문제는 치명적이었다. 그는 평생 17명의 여자를 짝사랑했고 4번의 고백을 했으며 5번의 거절을 당했다. 1번은 고백은 커녕 맘조차 없었는데 난데없이 당한 일방적 거절이었다. 외톨이의 삶 만큼이나 여자에게 사랑받지 못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소주 두 병을 연거푸 비우고 화장실 바닥에 주저 앉아 면도칼을 집어든 채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 역시 자신을 매몰차게 거절한 직장동료의 한 마디였다.
'완수씨, 착각이 심하시네요. 제가 언제 완수씨에게 오해살 행동이라도 했던 건가요. 그래요 저 사귀는 사람 없어요. 그렇다고 제가 완수씨랑 사귈 이유는 없잖아요? 사실 제 사생활 캐고 다니신 거 같아서 그것 만으로도 기분 나쁘다고요...'
새삼스레 여자의 미소와 친절은 마음이 아닌 머리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고. 자신이 여성에게 사랑받지 못할 외모와 성격과 조건을 가진, 더 나아가 이성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한 순가이기도했다.

'18, 더러운 세상. 차라리 다시 태어나면 좀 나아지려나.'

화장실 바닥을 붉게 물들이는 피웅덩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에 바로 이곳 저승사무소 앞으로 와있었던 것이다. 사람들 말대로 저승이란 곳이 있다는 자체가 그는 신기했다. 저승사무소는 그 말처럼 공공기관을 연상시키는 촌스럽고 딱딱한 건물이었다. 여기에도 리모델링 바람이 불었는지 일부 외관을 유리벽으로 갈아치우긴 했으나 그 안엔 시뻘건 불길이 넘실거리며 여기가 이스이 아님을 웅변하고 있었다. MIB 마냥 검은 정장으로 빼입은 저승사자들의 지시를 따라 이동하며 이런저런 서류를 작성하고 사진을 찍고 날인을 하다보니 어느 새 마지막 과정인 판결을 위한 이 방까지 오게 되었다. 완수는 힐끔 입구에 붙은 팻말을 보았다.

'환생부 최종 판결실'

아마도 여기서 판결을 거쳐 환생을 하게 될 모양이었다. 방에는 완수 외에도 두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멀끔하게 잘 생긴 30대 가량의 남자와 스포츠 머리에 우락부락한 인상의 40대 초반의 남성. 

잠시 후 개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판결을 내릴 사자가 단상 위로 나타났다. 포청천 코스프레라도 한 듯한 수염이 인상적인 거구의 사내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시간 관계상 속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43021번 김민재씨'

'예'

멀끔한 30대 사내가 손을 들어보이며 대답했다.

'서류를 보니까. 참 잘 사셨네요. 봉사점수, 사회공헌점수, 선행점수 모두 월등하십니다. 특히나 여기 오신 이유가 물에 빠진 여자친구를 구하고 자신은 익사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사내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사내의 발 아래에 축축허니 물웅덩이가 생긴 게 보였다.

'애인을 위해 헌신하셨네요. 고교때 만나서 15년간 사귀면서 상대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어요. 상대 여성분께서 무척이나 행복하셨다는 것은 자료에 나온 수치로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하, 그런 것도 수치로 정리가 되어 있다니 완수는 놀라웠다.

'하지만 남을 행복하게 해주느라 자신은 너무 손해를 보셨어요. 금전적으로도 그렇고 여친분에게 쏟은 시간이나 에너지도 만만치가 않으시고. 여기 온 이유만 해도 그렇죠. 희생도 좋지만 자신도 챙기셨어야지. 그래서 다음 생애엔 이번 생에 누리지 못한 부분을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김민재씨의 다음 생은 무책임한 바람둥이로 태어날 겁니다. 이번엔 충분히 삶을 즐기면서 맘껏 남을 이용하며 살아보세요.'

'예?'

남자는 당황해서 제대로 답변도 못한 채 그대로 밖으로 끌려나갔다. 하지만 완수는 그가 부러웠다. 이번 생에서 절절한 운명적 사랑을 나눈 후에 다음 생에선 여러 여자를 후리는 바람둥이라니... 일견 축복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자 다음은, 43022번 오일룡씨. 햐.. 간만에 악질이네.'

우락부락한 스포츠 머리의 사내는 대답 없이 콧방귀만 뀔 뿐이다.

'중학생 시절에 옆 학교 학생을 강간. 이후로 30년 동안 강간만 126회. 피해자가 58명이라. 성추행, 성희롱 횟수는 제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고요. 그 외에 폭행, 사기, 절도까지. 이렇게 사니까 백주대낮에 여자한테 칼에 찔리는 겁니다.'

사내의 등 언저리가 시뻘겋게 물든 이유를 완수는 그제야 알았다.

'다음 생에서 일룡씨는 한 여자만 바라보는 순정남으로 태어날 겁니다.'

'뭐요?'

이번에도 당황스런 외마디가 터져나왔다.

'여자분은 날때부터 병약해서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야 하는 분이고 일룡씨는 그 옆에서 수발하며 그 사람만 바라보며 살거에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함께 많이 힘들겁니다. 하지만 이번 생에 저지른 업보에 비하면 별거 아니니 잘 견뎌내리라 믿어요. 여자분은 일룡씨랑 결혼 후 출산 중 돌아가실 예정이고요. 아이는 일룡씨 아이가 아니라 옆집 남자의 강간 때문일겁니다. 남자 혼자 몸으로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며 끝까지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독신으로 사는 게 이번 생의 미션입니다. 잘 아셨죠?'

'무슨 개소리야!'

남자는 뭐라 항의하고 싶어했으나 곧장 거구의 장정들에게 이끌려 밖으로 들려나갔다. 완수는 이번에 판결도 놀라웠지만 동시에 조금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이번 생에서의 범죄들은 뒤로 미루어 두더라도. 다음 생에선 그런 잘못을 뉘우치면서 그 과정에서 한 여자를 위해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니 여자와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삶을 마친 그로선 그 역시 부럽기만 했다.

'그럼 마지막 43023, 박완수씨'

'예, 접니다.'

사자는 한동안 말없이 완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정이시네요. 연애도 못해보고. 고백은 번번히 차이고.'

'예'

'다음 생엔 잘 해보세요.'

'예?'

'이래저래 똔똔이라 어떻게 해드릴 방법이 없네요. 그래도 희망을 가지세요. 완수씨 같은 분이 다음엔 대박나는 경우 많이 봤으니까. 이번 삶에선 쉽게 포기하지 말고, 자살 같은 것도 하지 말고 끝까지 노력해 봐요.'

그제야 완수는 깨달았다. 모태솔로는 저승사자도 해결하지 못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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