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애는 완벽했다.

어떤 의미로 완벽했냐 하면, 그녀가 남자를 대할 때 느끼곤 했던 어떤 끈적함이랄까. 하여튼 그런 게 없었다데메테르 향수로 만들어 라벨을 붙이자면 이런 거. 사향냄새, 스테이크 핏물, 뜨끈한 손맛, 큰 돛단배가 그려진 스킨, 유광 수트를 입은 빡빡한 엉덩이, 니코틴. 그런 남자들은 널렸고, 또 금세 지긋지긋해졌다.

여자라면, , 그래. 긴생머리 가디건녀랄까. 보편적이긴 한데 그녀의 미감엔 그저 그런 것들. 그녀가 하는 것보다 하는 것에 대한 상상을 더 즐기는 쪽이란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향긋하긴 한데 그게 데낄라나 와인이 아니라 커피향. 그래, 그 남자애는 커피 같았다. 같이 있으면 몽롱해지기는 커녕, 굉장히 지적으로 변하는 자신을, 또는 소파에 푹 파묻히듯 노긋노긋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편안하게 만들어주면서도 각성이 되게 하는 그런 상대에게 느끼는 보기드문 컨디션. 그럴 때는 자신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자연스러운 애교가 샘솟았다.

그 남자애는 대화력이 뛰어났다. 농담과 진담을 적재적소에 넣어 에스프레소처럼 쭈욱 뽑아낼 줄 알았다. 무엇보다 ''를 알아 맘에 들었다. 이를테면 전화를 끊을 때, 덜 잘 해 줄때, 지적을 할 때, 칭찬을 할 때, 집에 들어갈 때라던가. 걜 만나고 온 후 약 삼일간은, 술먹자, 집에 가지마라 들러붙는 남자애들을 도저히 만나주고 싶지가 않아졌다. '눈치없는 애들은 정말 질려'

호감이긴 한데. 이성에 대한 걸까 인간에 대한 걸까 아리까리하다가는 에잇 몰라 만나 즐거우면 고만이지. 사람 폴더링 할 필요는 없어. 불안과 안전을 스틱으로 휘휘 저어서 원샷. 캬 맛있다.

어머 이 산 안 무섭대매 하고 턱턱턱 오르다가 푹 하고 구덩이에 빠져서는 제발살려줘 고함을 질러도 아무도 구해줄 수 없었던 (왜냐면 그녀가 미친듯이 손을 휘저어대었으므로 누구도 그 손을 잡아 올릴 수가 없었다)그녀였다. '호감이 없다면 친구가 될 수 없잖아. 그러니 너와 나도 서로 호감인 거니까. 남녀사이인데도 이렇게 호감인 거니. 상호합의 인정 한잔 쭈욱쭉 들이켜.'

그리고 그후로 한동안. 만나면 좋은 친구, 한잔. 또 한잔. 둘이 마신 술잔이 둘이 공유한 노래들의 씨디장수만큼은 될 정도의 시간. 코린 배일리 래, 제이슨 므라즈, 오아시스, 아 난 고딩땐 블러가 더 좋았어. 그래? 오아시스도 들어봐 뿅갈걸. ..나이들어 들으니 오아시스가 더 그윽하네. 그러게 난 원래 데이먼처럼 귀염밝게 생긴 타입에 끌리는데 넌 오아시스처럼 우울하고 시니컬하고. 아냐 가만보니... 

너 데미안 라이스 정도로 우울하기만 한데. 근데 왜. 네가 좋지? 그런데.... 왜.... 내가 더 좋아하는 것 같지? 젠장.....

대충 이런 수순을 밟아온 거다. 헛똑똑이 소리를 달고산 그녀지만 '친구이상 연인 이하' 관계에서는 완...게 헛똑똑이였다.

술과 담배의 나날이 지나고. 남자와 친구따위 못 돼. 인정. 땅땅땅, 하고 난 후 수녀와 같은 나날을 또 보내고. 다 이겨냈노라 해탈이다. 할 즈음 친구의 친구의 친구인 그 남자애와 친구가 되었다.

그 남자애에겐 자연스럽게 체화한 듯한 '3법칙'이 있었다. 1 낮에 만나서 2 커피를 마시고 3 영화 음악 미술 문학 ...만 가지의 주제를 넘나드는 산만하고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되, 결코 '연애'키워드를 꺼내지 않는. 이전 연애도 앞으로의 연애도. 3번은 참 신기했다.

'넌 연애 안해?' '뭐...해야지...''니가 지금 이러고 나 만날 때가 아니야. 좀 적극적으로...응?''뭐....그렇지...' 이게 다였다.

간혹 그가 '누나, 아저씨 꼭 봐야 해. 원빈이 요즘 남자들 중 가장 멋진 것 같아' 라며 눈을 반짝이거나 또는 '싱글맨 봤어?'를 만날 때마다 꺼내거나. '안 봤다'는 말에 아쉬워하며 한동안 침묵하거나. 하면 '얘가 혹시....'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요즘 좀 망가지긴 했지만 스스로의 이성적 매력에 대해 자신이 있었던 그녀였다. 길에서 헌팅을 당한 적도 있고, 남자친구가 없는 날이 손에 꼽았으며, 주기적으로 ' 자니? ' 콜을 걸어오는 남자가 언제나 두세명이었다. 그녀가 장황하고도 구차하게 자신의 매력 증거를 꼽아본 이유는 그 남자애의 눈빛에 도무지 '동물의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왠지 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딱한번이었나. 병맥주 한병씩 마셨을 때 얘가 취했나 생각하게 만든 건 그의 손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투르게네프나 톨스토이에 대해 한 시간 동안 장광설을 풀어놓는 입술이어서 문제였지.

하지만 뭐, 고백받았더니 꼬라지도 보기 싫어져서 '겨우 이래 될 걸 애저녁에 키스나 한번 해버리고 말걸' 했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끄덕끄덕. 어설프게 고백 받았다간 애매한 관계가 될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한 소식이 전해진다. 그가 전에 나도 함께 본 고양이상의 여자애를 만나고 있는데, 잘 되어가는 것 같다는 내용의.

"눈치챘지, 그럼. 근데 그 여자애 너무 예뻐서 잘 안 될 것 같은데?"

 

 

깔깔대며 통화를 마친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털어넣고 씹었다.  꽈득.  뭐야 이거.

 

 

기억났다.

이 애의 전에도, 전전에도, 그 전전전에도 나눴던 대화.  '게이같아','내가? ?','그냥'  커피맛이 썼다. 시럽을 쳐 넣었더니 맛은 더 없어졌다.

그녀를 3-6개월간 구렁텅이에 밀어넣은 그 남자들과의 친교 관계 도입부였던가. 문학과 음악과 패션과 삶과 우주를 논할 수 있는데다 가느다란 다리에 스키니를 걸치고 스트릿 매거진을 끼고 다닌다고 해서, 치근덕거리지 않는다고 해서 '게이일지 몰라' 라고 상상한 그녀의 심각한 무지는 방심을 불렀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이 그녀의 별명이었지만 방심을 불러일으키는 상대는 꼭 있었지. 젠장.

도리도리. 인정할 수는 없다. 맛있었어. 안 썼어 향긋했어 그동안.

 

 "잘 되어가? 누나한테 코치 좀 받아." 그녀는 지금 오분째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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