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안(建安) 3년, 여포가 있는 하비성을 조조의 군사가 포위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유비 휘하에 있는 수염쟁이 관우란 장수가 조조를 만나려 하였다.

긴 수염, 대추처럼 붉은 얼굴, 예전 여포와 창과 칼을 맞대었을 때부터 조조가 흠모하였던 그 장수(將帥)가 조조를 찾는 것이다.

이쪽에서 만나보려고 애를 쓰고 싶은 차에 이렇게 스스로 만나러 오다니 조조로선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는 말이 어울릴만한 상황이다.

 

무기 하나 없이 조조의 막사에 들어온 관우는 여포의 부하 '진의록‘이란 자의 처를 구해달라고 조조에게 간절히 부탁하였다.

여자 하나 구하기 위해 관우가 무릎을 꿇고 부탁을 할 정도라면 어떤 미색(美色)일지 궁금해지는 조조였다.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조조였다.

 

여포의 하비성을 점령하자 조조는 진의록의 처 두씨(杜氏)를 찾았다. 그리곤 여느 때처럼 두씨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였다.

조조가 두씨(杜氏)를 자신의 침실에 거하게 함을 알게 된 관우는, 조조에게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두씨(杜氏)는 관우에게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옛날 '장생(長生)'으로 불리던 시절, 복수를 위해 살인을 하고 도망자 신세로 있을 때 관우를 숨겨주고 학동들을 가르쳐주는 자리까지 마련해주었던 이가 두생(杜生)이라는 탁군의 유생이었다. 두생은 몸이 좋지 않아 각혈을 하곤 했었다. 그러면서도 두생은 관우와 마주 앉아 세상의 이치를 얘기하였다.

 

“세상은 비록 어지러우나 학문(學文)이 없으면 도(道)를 이루지 못하고 도(道)를 이루지 못하면 전란(戰亂)은 전란(戰亂)으로만 이어질 것이외다. 이 난세(亂世)의 끝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다가올 평화(平和)의 시대를 위해서라도 학동(學童)들을 위한 가르침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겠소.”

연신 각혈을 하면서도 열심히 말을 하는 것은 두생이었고 관우는 두생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몸이 아픈 두생을 대신하여 관우가 학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생은 관우에게 운장(雲長)이라는 자를 붙여주었다.

장생(長生), 길고긴 장생(長生)의 삶은 지금과 같은 전란(戰亂)의 시대에선 이루기 어려웠다.

설령 길고 길게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절개도 의리도 버린 치욕스런 일생이 되기 일쑤였다.

이승의 삶(生)이란 길다고 좋은 것이 아니었다. 길어도 오욕(汚辱)으로 가득한 삶이 있는가 하면 짧더라도 영광(榮光)으로 가득한 삶이 있었다.

저 하늘의 구름은 어떠한가.

오늘 내일 다른듯하면서도 구름은 계속 이어진다. 백성들은 해가 내리쬐면 해를 가려줄 구름을 기다린다. 가뭄이 깊어 비가 필요할 때도 구름을 기다린다.

하늘의 구름처럼 그 명성이 길게 이어지길, 가뭄 속 구름처럼 백성들로부터 귀함을 받게 되길 바라며 두생은 관우에게 ‘운장(雲長)’이라는 자(字)를 붙여주었다.

 

유비와 관우, 장비가 형제의 의를 맺을 때 두생은 각혈을 하면서도 그 의식의 제문을 써주었다.

제문의 형식, 제문의 내용 어느 것 하나 두생이 신경써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천지신명이시여. 비록 우리 세 사람이 성(姓)은 다르오나 의(義)를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몸과 마음을 다해 곤한 백성을 도와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하소서. 형제가 비록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나지 못했지만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죽기를 원하나이다.”

 

두생이 써준 축문이 이어졌다.

유비의 어머니 등씨(藤氏)는 제문을 준비해준 두생의 손을 꼭 잡았다. 두생의 손은 차가웠다. 그 손은 뼈만 남은 듯 말라있었고 손등에는 저승꽃이 피어있었다.

형제의 약속을 맹세하는 제식이 이뤄지는 동안 용케 각혈을 참고 있던 두생은 오랜만의 외출이 힘겨웠는지 그날 밤부터 심히 앓기 시작하였다.

 

탁군의 저잣거리를 휘어잡고 있던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을 눈여겨보고 있던 소쌍과 장세평 상단(商團)의 무리는 출병을 위한 지원을 해주었다.

사람을 모으고 무기를 장만할 큰 돈이 형제에게 쥐어졌다. 자기 몫의 돈을 따로 떼어 챙겨온 관우는, 도원(桃園)의 결의(結義) 직후부터 앓아누운 두생(杜生)에게 소쌍과 장세평으로부터 받은 돈 일부분을 내놓는지만,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누워있는 두생은 관우가 병구완을 위해 주는 돈을 단호히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이 돈을, 병든 나에게 쓰지 말고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드는데 쓰게나. 그 무기로 이 난세(亂世)에도 도(道)와 의(義)가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면 나로서는 여한(餘恨)이 없다네.”

 

두생(杜生)은 딸아이를 시켜 종이 한 장을 꺼내오게 하였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소녀가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관우가 종이를 받아들자 얼굴이 하얀, 곱상한 얼굴의 소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관우가 받아든 종이 위에는, 칼도 아니고 창도 아닌 길다란 무기 하나가 그려져 있다. 큰 도끼처럼 두꺼운 칼날이 봉(奉)과 한 몸이 되어 있었다.

 

관우는 대장장이를 시켜 일찍이 보지 못했던 무기를 만들도록 하였다. 두생이 그려준 그대로, 무쇠로 만든 긴 창의 끝에 마치 도끼날과 같이 묵직한 칼날을 잇게 하였다.

보통의 장정이라면 나무로 된 장대 끝에 쇠끝을 박아 창으로 사용하거나 행여 돈푼이나 있고 힘 꽤나 쓰는 무사라고 해도 무쇠로 만든 창 몸통 끝에는 작은 쇠날을 이어붙이는 것이 대부분인 시대였다. 길고 긴 풀무질과 담금질이 끝이 나고, 대장장이 서너 명이 달라붙어 그 창을 들어 올린 뒤 말에 올라탄 관우에게 건넨다. 관우는 그 창을 가볍게 받아들었다.

 

처음 보는 모양새의 묵직한 창을 받아 쥔 관우는 한두 번 그 자리에서 휘둘러보더니 두 다리로 말의 몸통을 꽉 움켜쥐고는 말고삐를 세게 잡아당겼다.

말이 달린다. 말 위에 올라탄 관우는 새로 만든 창을 맘껏 휘둘러본다. 길이도 무게도 마음에 드는 것이다.

기병의 무기가 이렇게 강하고 무겁고 날카롭다면 보병으로선 접근조차 어려웠다.

기병 대 기병의 접전이라고 하면 무기가 길고 튼튼한 쪽이 우위를 잡기 마련이었다.

두생이 고안해준 무기는, 어지간한 창이나 칼로는 대적(對敵)도 못할 필승(必勝)의 무기가 되리라.

말 위에 올라탄 관우가 그 무기를 휘두르자 시퍼런 칼날이 초승달과 같은 곡선의 빛줄기를 이룬다.

그 모습은 마치 언월(偃月)의 청룡(靑龍)과 같은 것이었다.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각기 말과 무기를 갖춰 탁군을 떠나려할 때는 두생은 밖에 나와 배웅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해져 있었다.

말 위에 올라타 먼 길을 떠나려는 관우에게 두생의 어린 딸아이가 다가와 아비의 선물이라면서 낡은 책을 내민다.

유생(儒生)인 두생(杜生)의 손때가 묻은 춘추좌전(春秋左傳)을 건네받은 관우가 그 몇 년 후 탁군 두생의 소식을 물어보았더니 두생은 관우가 탁군을 떠난지 얼마지 않아 병으로 죽고 그 딸아이는 어느 장수 하나가 데려갔다는 것이다. 그 황건적 장수의 이름이 진의록이었다.

 

관우는 그때 그 두생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갚으려는 것이었다.

두생은 죽었지만 두생의 딸을 돌보아 주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관우였다.

청룡도(靑龍刀)와 춘추좌전(春秋左傳), 훗날 관우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두 물건은 두생에게 받은 것이었고 청룡도를 휘두를수록 춘추좌전을 꺼내보면 꺼내볼수록 두생을 향한 감사의 마음은 깊어갔다. 그 마음이 깊어갈수록 두생의 딸, 그때 그 얼굴이 하얗던 소녀에 대한 생각이 짙어지는 것이었다.

 

조조는 관우의 부탁을 못 들었는지 행여 듣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인지 그날 밤 진의록의 처를 자기의 처소로 데리고 오게 하였다.

이때의 일이 있어서인지 훗날 관우가 조조의 밑에 있게 되었을 때도 관우는 조조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조조가 아무리 후히 대접하여도 관우의 마음은 닫혀 있었다.

 

한나라의 관직은 크게 제(帝) 왕(王) 공(公) 후(候)로 나눌 수 있었다. 후(候)에는 현후(懸侯) 향후(鄕候) 정후(亭侯)가 있었다.

관우가 받은 한수정후(漢壽亭侯)라는 관직은 한수 땅을 봉지로 받았기에 한수정후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으로 기실 큰 실리는 없는 땅이었다.

관우의 인망을 생각하여 효렴(孝廉)부터 시작하기에는 관우의 나이가 적지 않았다.

관우의 기마술을 살려 기도위(騎都尉) 등의 요직을 맡기기에는 조조에 대한 관우의 충성심이 불확실했다.

 

조조는 관우를 불렀다. 공(公)의 직위를 내려줄까 하였으나 관우는 아직 공(功)이 없다하여 스스로 거절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버리고 갈 관직인데 높으면 어떠하며 낮으면 어떠한가.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라는 관직의 앞머리에 한(漢)이라는 글자가 앞머리에 붙은 것에 위안을 삼았다.

훗날 누군가가 조조에게 받은 관직을 비난할 테면 ‘나는 조조의 관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한(漢)의 관직을 받았노라’ 이러면 되지 않겠는가.

조조의 후사에 흔들릴 때면 두생이 선사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두생(杜生)은 대장군 두무(竇武)의 후손이라 하였다.

대장군 두무(竇武)와 태부 진번(陳蕃)은, 황제의 눈을 가리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환관의 무리를 없애려 하였으나 오히려 어리석은 황제인 영제(靈帝)와 간악한 환관들으로부터 화(禍)를 입었다. 새로이 옥좌에 오른 어린 황제 유굉(劉宏)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고 일을 도모하였건만 유굉은 환관의 말만을 믿는 것이었다.

두무와 진번은 물론이요 그 일가친척들까지 형틀에 올라 고초를 겪었다.

신체 한 부분이 불구인 환관의 무리들은 엉치뼈가 부서지고 두개골이 빠개지는 소리를 즐기는 듯하였다.

길고 긴 고문이 이어졌다. 처참하게 찢겨진 시신들이 낙양(洛陽)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환관 특유의 잔인함을 알고 있는 두무는 일의 성사가 어렵게 되자 자결을 선택하였다.

이제 막 효렴(孝廉) 벼슬을 얻어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을 키웠던 두무의 어린 조카 두실(竇實)은 죽지 않기 위해 도망을 쳤다.

수도인 낙양에서 서주로, 서주에서 연주로, 연주에서 병주 태원으로, 태원에서 유주 탁군으로 두실(竇實)의 도망이 이어졌다.

도망 다니는 곳마다 성(姓)을 바꾸고 이름을 바꿨다. 낙양에서 멀고 먼 탁군(涿郡)에 도착했을 때 두실(竇實)은 두생(杜生)이 되어 있었다.

 

돗자리나 짜고 신발이나 만드는 주제에,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고 너스레를 떨고 다니는 유비를 황실의 일족인 유원기와 만나게 한 것도 두생(杜生)이었다.

현덕(玄德)이라는 자(字)를 붙여준 것도 두생(杜生)이었다.

유원기의 도움으로 노식의 밑에서 글을 배우러 가기 전 기초적인 학문이나마 익히게 한 것도, 천하대의(天下大義)를 바라보는 큰 마음을 갖게 한 것도 두생(杜生)이었으며,

관우보다 나이가 어린 유비에게 큰 형의 자리를 양보토록 한 것도 두생(杜生)이었다.

 

효성스러운 이와 청렴한 이를 높이 일컫는 말이, 벼슬의 하나로 바뀐 효렴(孝廉)이란 관직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꾸는 이들에겐 명예롭고도 화려한 관직의 출발점이 되곤 했다. 그때 그 야심만만했던 효렴(孝廉) 두실(竇實)이 시골 탁군의 서생(書生)으로 변해 있었다.

효(孝)를 생각한다면 그때 그 낙양 땅에서 아비와 함께 죽었어야 했었다.

효렴(孝廉)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두실은 아비를 버리고 홀로 도망쳤다.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나올 시간이 없었다. 그가 홀로 도망치는 사이에 낙양에 남아있던 두씨(竇氏) 일가족은 모두 형장으로 끌러갔다.

아비는 자식의 행방을 묵는 형리의 질문에 끝내 답하지 않았다.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자 혹형은 더욱 더 길고 끔찍해졌다. 

온몸의 관절이 꺾이고 부러져 넝마처럼 풀어진 몸이 되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을 때 아비는 수레에 묶여 찢겨 죽었다 하였다.

처절한 비명 속에 그들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는, 성도 바꾸고 이름도 바꾼 두실(竇實) 혼자뿐이었다.

 

두실(竇實), 두생(杜生)은 언제 어디서부터인지 어린 딸을 데리고 있었다.

두생이 탁군의 학동들을 가르칠 때면 그 딸은 두생의 옆에서 조그만한 입으로 아비가 가르치는 글월을 따라 읊곤 하였더랬다.

 

침실에 들어선 두씨를 보고 조조는 두 번 놀랬다.

한 번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고 나머지 한 번은 그녀의 기품 때문이었다.

조조의 침실에 들어온 여인들은, 지레 옷고름을 풀며 색기를 흘리거나 당당히 자신의 뜻을 밝히는 두 종류로 분류될 수 있었다.

전자의 경우로는 장제의 처이자 장수의 형수인 추씨를 들 수 있겠으나 두씨는 그와 달랐다. 두씨는 후자에 속했다.

 

두씨는, 자신은 한(漢) 황실의 외척이었던 대장군 두무(竇武)의 후손이요 당고(黨錮)의 화(禍)를 피해 몸을 숨기고 살았었노라고, 고단했던 지난날을 얘기하였다.

고단한 세상살이였지만 기품만큼은 잃지 않은 상태였다. 조조는 그런 두씨를 아껴 귀히 대접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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