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분소설] 불안을 잠재우는 법

2010.10.28 22:44

유니스 조회 수:3349

#1

 

돈없어도 난 우아하고 싶어. 어떤 소설의 제목이었던가.

 

굴국밥과 해물칼국수를 두고 저울질하다가 기운없이 편의점 문을 연다. 새우탕면과 천원짜리 김밥 한 줄을 놓고 '이러면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지'라고 자위한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발끝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몸을 데워줄 필요가 있었지만 저녁값을 오천원 이상 쓸 수는 없다.

 

'진짜 해물육수거나 해물맛 시즈닝거나. 결국 포만감은 똑같아'


나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린다. 소주병을 든 노숙자가 들어와 일부러 툭 건드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복권종이 위에 튄 짜장국물이 거슬려서였을 수도 있고 그 모든 것 때문일 수도 있고. 갑자기 욕지기가 올라오지만, 입을 꼭 다물고 면발을 우물거린다.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의 여자가 들어와 버드와이저와 밀러 라이트 캔을 들고 한참을 고민한다.  버드와이저를 놓았다가 도로 든다. 계산대로 가는 그녀의 눈가에 그늘이 짙다. '솜이불 속에 들어가 양손에 들고 마셔요'라고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퇴근길은 왜 이다지도 슬플까.

 

 

 

편의점을 나와 벤치에 앉은 후 관성처럼 그에게 전화를 건다.

 

 

 

 #2

 

그는 하얀색의 옷을 만들고 있다, 했다. '예쁠 것 같아'라고 대답해준다. 소매가 한쪽에 두개라도 나는 반갑게 맞아 입을 것이고 피에로나 할머니같아 보이는 옷이라도 연인의 농담거리로는 충분히 찬란할 것이다. 알고 있다. 이 모든 순간이 언젠가 칼날로 벼려져 나를 벨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현재를 더 달콤하게 한다.  

 

'가난한 사람과의 연애는 내 기분도 가난하게 만들어. 그렇다고 기름진 뚱땡이와의 연애는 못하겠어'

나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가난뱅이는 아니었다. 굳이 자신을 팔아치울 필요도  계산적 연애를 할 필요도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에게 입을 맞추었었다. 어떤 연인들은 단지 호기심에서 시작해 세상의 끝과 시작을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막막한 어떤 밤에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느날 그가 담배연기를 내뿜는 모습에 울 것 같아진 적이 있다. 연인의 무방비한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의 쓸쓸함은 나를 단단히 옭아매었다.    이런 젠장, 아뿔싸. 

 

 

그와 나눌 수 있는건 두개의 포크를 꽂은 한 그릇의 파스타, 작은 책들, 밤을 새워 나누는 서로의 꿈에 관한 이야기들. 아메리카노 한잔, 파스타 소스와 국수와 딸기무늬 접시, 죽이는 공연티켓을 살 돈이 우리에겐 있다. 많은 책을 꽂아둘 서재와 부모님을 초대해 식사를 할 거실과 신혼여행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아니, 아니.  없는 것은 정작 다른 것들일지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드레스의 화려한 장식보다 빛난다는 자기확신과 그의 곁에서 변치않을 자신에 관한 믿음. 절망으로 얼룩질 엄마의 얼굴을 상상해보고 나는 금세 도리질을 친다.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다. 그러나 홀로 될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시커먼 연기같은 불안이 끓어오른다. 주름을 주렁주렁 매단 채 홀로 쿠키를 굽는 여자로 늙어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언젠가 '이 로또가 당첨되면 커다란 방을 얻어 결혼하자'는 농담에 그의 뺨을 피가 나도록 치고 싶어진 적이 있다.

 

엉터리 영화에서처럼 나의 손을 잡고 도망친다면, 그런 촌스러운 선택을 하는 남자를 택한 자신에게 환멸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엷게 미소짓는 그에게 때로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봄날만 존재하는 연애를 완성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지금 내가 그를 버리면 우리는 영원해진다. 아스팔트가 굳기 전에 찍힌 발자국처럼. 나는 그의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한다. 그때문에 애닲아 본적은 없기 때문이다. 입술이 닿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매순간을 그 순간처럼 사랑했다.

 

내가 그를 버리면 그는 아마 죽고 싶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는 며칠 후 밥을 뜨고 물을 마실 것이다. 그는 포기와 아주 친했는데, 세상이 언제나 그에게만은 인색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엄마라고 부를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네번 결혼하고 세번 이혼하느라 언제나 분주했다.

 

 

나는 종종 '너희 엄만 일본인일지도 몰라'라며 그의 외모를 놀리곤 했는데, 그는 정말 엄마의 얼굴을 본 일이 없다했다. 그는 일하는 곳의 친한 외국인 아주머니를 '맘'이라 부르며 웃었다. '나는 하루 종일 울기만 하는 아기였다고 할머니가 그랬어' 그 말을 들은 나는 하루만 시간을 내어 종일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시간의 결에 끼어들어 다섯살과 열다섯인 그에게 다가가 뜨거운 밥을 해먹이고 말을 걸어주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영리한 편에 속했다. 열망에 시달리느라 평생을 망치는 바보들과 달랐다. 그는 가지지 않고도 행복한 법을 깨우쳤는데 가장 쉬운 건 욕망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연기를 하다보면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가면이 되어 얼굴에 찰싹 달라붙기도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그는 최초의 욕망을 품어보았다고 했다. 싸구려 기타와 중고 재봉틀, 색연필과 스케치북, 어릴 적부터 가지고 싶었던 세계문학 전집 같은 것들을 작은 방에 두었다. 유년기를 탈취당한 어른은 자라서 어린아이가 된다. 그는 귀가하면 방안에 틀어박혀 고래와 고양이가 등장하는 동화를 읽고 그것들을 나무로 조각하곤 했다. 작은 방안은 동그스름한 조각들과 보드라운 옷, 한권씩 모은 책들로 가득찼다. 그리고 그것들 중 가장 비싼 것은 나였다. 

 

 

그는 사랑을 나눌 때조차 넌 내 것이라고 말해 본 일이 없다. 나는 그의 극단을 보고 싶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나는, 소유욕이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서워, 하고 생각했다. 자의식을 잃고서 나에 대한 소유욕을 드러내고 만 그가 아무말도 하지 않은 척 조용히 누워있는 모습을. 그리고는 무방비한 모습으로 담배를 피워물기를 상상한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 밀러라이트와 버드와이저를 산다. 병 두 개를 백팩에 끼워넣고 그의 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많은 양의 술을 마실 것이다. 바삭거리는 시트에 그를 눕히고 도드라진 허리뼈를 만진 후  약간 휜 등을 쓰다듬을 것이다. 취기에 감싸여 끈적한 그의 혀를 받아들이리라. 나는 뱀처럼 간교하게 계획을 짜서 그를 모조리 흡수하고는, 한순간에 뱉어버리는 헛된 상상을 한다.

 

 

 

그외에 지금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나는 무엇도 떠올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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