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레를 좋아하지만 익은 당근은 거슬린다. 당근을 삼키기 위해서는 달갑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입을 벌려 뱉을 수도 있지만, 뱉은 당근을 바라보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니까, 양미간에 힘을 주고는 혀가 닿지 않도록 애쓰며 우물거린다.


가끔은 정신을 집중해서 맛을 느껴 보기도 한다. 뭉클, 하고 당근은 본래의 형태를 잃고 뭉개진다. 욕지기가 나오려 하지만 꾹 참는다. 묘한 쾌감조차 느껴진다. 혀를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벌레도 아니고 고작 채소  따위에. 당근 따위 갈아버리면 될 것 아니야.'

 

푸르고 날카로운 칼날을 휘둘러  혀까지 단번에 갈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는다. 침과 섞여 주홍색 덩어리가 되었을 당근을 꿀꺽, 삼킨다. 기분나쁜 향이 혀끝에 내내 맴돈다.

 

 

S는 언제부터 익은 당근을 증오하게 되었는가.
 


2

 

S는 B를 이미 알고 있었다. B를 둘러싼 스캔들에 대해서도, 물론. B는 약 스무살 연상의 여자와 사귄 일이 있었다. 연상의 그 여자는 연애에 관한 소설을 주로 쓰는 사람이었으며 사적인 감정, 즉 개개인의 이별에 관한 감정을 건드리는 글에 취약한 부류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뭐, 어쨌거나.

비극은 그 연상의 여자가 그의 첫사랑이었다는 사실.  처음 만난 놀라운 감정에 현기증마저 느낀 그는 순수한 사랑의 메뉴얼을 만드는 사람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을 표현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사랑해요'라고 말했고, 찻잔에서 입을 뗄 때마다 입술을 맞추었고, 그 여자가 싫어하니까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 여자의 웃는 얼굴을 제외한 모든 것은 하나도 보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고, 매일 밤 사랑의 시를 써 보냈다. 친구도 만나지 않고 그 여자를 생각하는 일로 혼자 있는 저녁을 보냈다. 여자의 몸과 방에 밴 머스크 향을 떠올리는 시간을 방해받을까봐 전화도 꺼두고 싶을 지경이었다.

 

B는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게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다른 사람들도 이런 감정을 느껴 보았을까'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 근질거렸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훼손될까 두려워 아무와도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백일째 되는 날, 그 여자는 B를 깔끔하게 버렸다. 그 후 여자는 청춘들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책을 냈다. 당연하게도 주위사람들은 여자가 남자를 이용했다고 수근댔다.

 

S는 그 여자가 그를 이용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럴리가. 글을 쓰는 사람은 그렇게 사악할 수 없어, 그랬다가는 자신에게 고도로 집중하게 되는 집필 과정에서 제 손으로 목을 조르고 말거야. 평범한 연애도 백일전에 끝나곤 하잖아. 게다가 스무살 차이 나는 상대라면, 언제나 마음 한쪽은 달아나고 있기 마련이다. S는 '난 그 여자를 이해할 것 같은데'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상상할 수 있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S는 B와 연인이 되었다. B의 취향이 원래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하다는 듯 열광하다가는 이내 심드렁해하는 변덕스러운 타입의 여자였을 수도 있고. 누구라도 체온을 나누고 싶은 외로운 밤이었을 수도 있고. 희한한 스캔들의 남주인공인  B에 대해 S가 가졌던 호기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남자와 여자는 쌀쌀한 밤공기와 비슷한 취향의 음악과 약간의 알콜만으로도 곧잘 사랑에 빠지곤 하니까, 갑자기 연인이 된 일에 대해 둘은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난 카레를 좋아하지만 , 카레에 든 익은 당근은 먹지 않아.”
어느날 B가 말했다.
"나도 그래"
 
 

S는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카레 접시에서 익은 당근만 골라내 먹고는 "역시 카레엔 당근이 들어가야 맛있어"라고 함박웃음을 짓는 사람이란 '사랑엔 역시 이별이 있어야 완성이지' 라고 말하는 사람만큼이나 드물겠지. 그 순간 떠올랐다. 그 여자의 소설에는 유독 카레가 많이 나왔다. 그리고 항상 "익은 당근은 먹지 않는다"의 변주 a,b,c 문장이 이어졌지.

 

작가 개인과 창작물을 엄격히 분리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같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픽션에도 작가의 취향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하루키 소설 속 남자들이 모두 재즈와 요리에 박식한 사람들인 것처럼.
 
 

낭패다. 스물스물 등이 간지러워 S는 달팽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이 남자를 만나는 동안 나는 또, 몇번의 불쾌함을 맛보아야 할 것인가. S는 몇번의 연애를 통해 비밀을 모르는 자가 비밀을 알고 있는 자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B는 모를 것이다. 자신의 취향이 그녀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을. 그는 앞으로 몇번이나 또 그 여자의 복사본같은 자신의 취향에 대해, 타고난 것인 양  단호하게 말할 것인가. 불쾌한 기분을 떨치려 S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B는 그 여자의 소설에 등장했던 낡은 파레트와 붓을 보여주었다. 그 여자가 신앙처럼 여기는 라흐마니노프와 더 스미스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가 키웠었다는 고양이의 이름은 그 여자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록시와 니나였다. 그 외에도...

 

 

 "짜증나"

S는  벌떡 일어나 책장으로 갔다.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운 그 여자의 책을 바닥에 쏟았다. 한 권 두 권  세권..모두 일곱권이었다.
 
 

열일곱부터였을까. 그 여자가 쓴 소설들을 샀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매니악한 팬은 아니었지만 S의 세대에게 그 여자의 글은 첫사랑에게 적어주는 편지에 자주 등장하는 레토릭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앙증맞고 얇은  파스텔톤 커버의 단편집을 서로 선물하기도 하고, 빌려주고 빌려오기도 했다.
 
 

처음 맥주를 마셨을 때, 처음 혼자 여행을 했을 때, 처음 남자와 헤어졌을 때 그 책속의 문장을 떠올렸던가. 그 여자의 책은 일종의 예습과 같았다. 그 여자의 책에서 미리 맛본 어른의 연애와 인생은 S가 어른이 되어 만난 것들의 미리보기와 같았다. 닮아있기도 했고 다르기도 했다.

 

 S는 대학 졸업 이후 그녀의 글들을 잊었다. 한번 흥미를 잃은 것은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그녀의 성격때문이기도 했다. 몇 년 간 새로운 책과 사람이 다가왔다 밀려갔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 여자의 책들은 회색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요물처럼 앉아 S를 기다리고 있었다. S가 뒤적여 주길 바라며 그 자리에서. 소리도 내지 않고 뒤척이지도 않으며. 
 

 
 

"정말 싫어"

S는 손에 든 빵을 빼앗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 여자의 책 위에 S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밀과 거짓말이 그녀를 옭아매리라. 그녀는 자신이 언제까지나 그의 두번째 사랑일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책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찢어버리고 싶었다.

 

낡지도 금이 가지도 않는 추억이란 얼마나 요망한가. 그 여자는 세월 속에서 점점 도도록해진다.

 

 S와 B와 그 여자는 앞으로도 영원히 셋이 함께 살아갈 것이었다.

 

호기심의 대가치고는 좀 이상한 맛과 향이 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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