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여(余)가 일본 오사카 지역을 여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가난한 대학생의 지갑 사정이야 뻔한 것이기에 번번히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컵라면 등의 싸구려 인스턴트 음식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곤 했던 터라 갓 요리한 따끈따끈한 음식이 몹시 그리운 상황이었다.

'오늘 단 하루! 특별 할인가 규동 1인분 350 円'이라는 가게 밖 가격표에 혹해, 얼른 들어가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홍대 언저리의 일식집에서 규동 한그릇을 6~7천원 정도에 파는 걸 생각하면 무척이나 저렴한 가격이다.

 

 

맛은 본격적인 일본식 소고기 덮밥으로, 달달한 쯔유 양념이 배어든 소고기와 양파가 밥과 잘 어울려 허기진 여행객의 위장을 보듬어준다. 

80엔을 추가하여 반숙계란을 주문. 주변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밥에 슥슥 비벼 먹는다. 
 
100엔을 추가.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하여 여름의 더위도 쫒아내보려 한다. 차가운 맥주는 마치 '등목'을 하듯 시원하고 짜릿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요즘의 여느 생맥주집과는 다르게 물 탄 느낌도 전혀 없고 탄산의 톡 쏘는 맛이 제대로 살아있는 것이 여태껏 마셔본 생맥주 중 으뜸으로 꼽고 싶을 정도였다. 

정신없이 먹고 마시다보니 어느덧 허기는 물러나고 더위마저 사라져 주위를 둘러볼 여유마저 느껴진다.


가게가 낡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건물 내부는 영락없이 일본 동네 한구석에 있을 법한 싸구려 정식집 느낌이다.

'경마신문을 보면서 야구중계를 보는 아저씨가 있을 법한 분위기'라는 표현이 적당할 터.

가게의 내부 인테리어나 음식의 가격이나 오사카 도심에 자리잡고 있기에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낡고 소박한 공간이다.

테이블은 없고, 1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카운터 석이 있고 가게 곳곳에 '한신 타이거즈' 우승 당시의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낡은 가게 내부만큼이나 낡아보이는 오래된 텔레비전을 통해 한신 타이거즈 야구 경기를 지켜보는 손님들이 보인다.


한신의 새 외국인 타자 '케빈 멘치'의 방망이가 허공을 가른다.

"카라부리 산신 ! (空振り三振 ! : 헛스윙 삼진)"

아래위 새하얀 양복을 입고 있는 중년 아저씨가 입을 열기 시작한다.

"'랜디 바스'야말로 최고의 가이진(外人)이었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일본 프로야구사 최고의 외국인 선수 중 한 명인 '랜디 바스'의 호쾌한 스윙을 흉내낸다.

54발의 아치에서 홈런 행진을 멈춰야만 했던 강타자 랜디 바스의 일화를 비롯하여 한신 타이거즈의 우승 시즌의 에피소드들이 연이어 이야기된다.

어느새 식당 안 손님들은 하나가 되어 그해 '도톤보리'에서의 무용담을 신나게 얘기한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던, 중년 '백발' 아저씨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힌다. 

"자, 여러분. 이제 가게 문을 닫을 시간입니다."

'랜디 바스'야말로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외국인 선수였다고 말해주던 그 백발의 아저씨는 랜디 바스의 타격폼을 따라하다가 허리라도 삐끗하였는지, 상체와 하체가 따로 움직이기라도 한 듯 불편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세 부쩍 늙어보이는 그의 모습.

카운터에 있는 종업원에게 전해달라며 동전 하나를 여(余)에게 맡긴다. 지팡이에 의지해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의 부탁에 여(余)는 그 동전을 받아 쥔다. 

노인이 음식값으로 여(余)에게 맡긴 동전에는 '물이끼'가 껴있는 듯 푸르스름한 녹이 슬어 있다. 

재빨리 동전의 앞뒤를 닦았다. 그 액수는 500 円 이요, 그 발행 연도는 '쇼와 60년'으로 종업원에게 노인의 음식값이라고 전해주었더니 규동 한 그릇에 생맥주 한 잔이라 450 円으로 거스름돈 50 円 이 남았노라고 얘기한다.

그 거스름돈 50 円 을 그 백발의 노인에게 전해주려고 여(余)는 규동집 문 밖을 나섰다.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걸어나간 노인이었기에 금방 찾을 것이라 생각하여 나섰지만 채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하얀 양복 차림에 안경 너머 인자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던 그 백발 노인의 행방은 끝내 찾지 못하였고, 노인을 찾겠노라고 낯선 거리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가 여(余)는 규동집의 위치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 밤이 깊었으니 오사카의 밤거리는 화려한 네온불빛으로 가득하다.

이튿날 다시 그 규동집을 찾아가려고 백방의 노력을 기울여봤으나 그때 그 식당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지도상의 위치에는 90년대에 새로 지어진 고층 빌딩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그 50 円 동전을 '도톤보리' 강에 던져주고 여(余)는 오사카를 떠났다.


쇼와 60년 (1985년)은 한신 타이거즈가 우승을 했던 연도로, 광적인 한신 야구팬들은 우승 축하 행사 도중 소속팀의 강타자 '랜디 바스'를 닮아보이는 KFC '커넬 샌더스' 인형을 도톤보리 강에 던져 넣었다고 하며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도톤보리 강바닥에서 발굴된 커넬 샌더스 인형은 얼굴 가득 인자하게 웃는 모습은 예전과 같았으나 물이끼가 껴있는듯 푸르스름한 녹이 잔뜩 슬어있었으며 상체와 하체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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