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24 12:06
점(點)들은 얼굴이 되어 자신의 죽음에 대한 하소연을 하는데, 누가 제일 억울하게 죽었는지 그걸 정해달란다.
마치 세 여신의 경쟁 속에 트로이 전쟁의 서막을 열고 말았던 '파리스'처럼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듣고 그들의 억울함의 최고를 결정짓는다.
첫번째 죽은자가 그 입을 연다.
"나는 임진왜란 때 왜놈의, 왜놈의 그 시퍼런 칼에 베여죽었소. 보시오. 여기 귀가 없잖소."
두번째 죽은자가 연이어 입을 연다.
"내래 6 25 당시 인민군 부역 나갔다가 죽었디요. 살려고 일을 했더니 그게 죽을죄가 됬지 않캈소. 이 편인지 저 편인지 촌놈인 내가 어찌 알갔디요. 좌인지 우인지 그건 먹물들이나 하는 얘기고 우리 같은 무지랭이들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뿐이지 않갑습네까. 총구를 들이대고 죽이겠다고 하니 살려고 일을 했을 뿐이지 않캈습디요. 총을 겨루고 감자 포대 옮기라기에 감자 포대 몇 개 날랐시기요. 인민군이 가면서 나눠준 감자 몇 개 먹었슴메다. 그놈들 눈에도 겁에 질린 모습이 불쌍해보였던 게 아니겠슴메. 용쓰고 배고픈데 먹으니 감자가 달지 않캈소. 어찌 그게 죽을 죄가 되겠디요."
세번째 죽은 자는 입을 열지 않는다.
악다구니를 쓰듯 자신의 억울함을 토해내던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세번째 나타난 원혼은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입을 열지 않는다. 아니 그녀는 입을 열지 못한다.
나는 세번째 죽은자, 그 말없는 여자 원혼에게 가장 억울한 죽음의 자리를 정해준다.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밝혀지지 못하는 죽음, 나 이렇게 죽었소 나 이렇게 억울하게 죽었소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 세상의 어둠 속에 그 진실이 가려진 죽음이야말로 '가장 억울한 죽음'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