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소설] 치킨의 눈물

2011.03.1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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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 때문에 소 돼지들이 파묻히고 있다는 소식이 양계장에 전해들자 닭들 사이에는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닭은 나서서 도망쳐야 한다고 선동하였고 다른 닭은 시간이 앞당겨졌을 뿐 운명을 받아들이자고 하였습니다. 개중에 똑똑한 닭은 통큰 치킨 사태도 넘겼는데 이쯤이야 기다리면 된다고 근거있는 분석을 하였지만 그의 음성은 꼬꼬댁거리는 비슷한 다른 소리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닭들은 본디 제 소리만 중시해서 남의 말 따위는 잘 듣지 않았고 한편으로 그들의 운명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 돼지 소비가 억압되면 자연스레 치킨 소비가 늘게 된다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세대를 거슬러 듣고 또 들어왔었던 겁니다.

 

닭 135호 A는 적잖은 동요에 마음이 심란해졌습니다.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고 있었고 심지어 옆에 있던 136호는 그 난리통에 알을 하나 낳았습니다. 스트레스 받으면 알을 빨리 낳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광경은 닭인 자기가 보기에도 매우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끔찍했습니다. 알의 상태도 썩 좋아보이진 않았던거예요. 하지만 벌써 닥친 일도 아닌데 너무 근심하는 것도 좋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135호가 그 소란에도 약간은 안심할 수 있었던 건, 그보다 더 큰 동요가 일었던 통큰치킨 사태때문이었지요. 오히려 치킨값에 대한 반감으로 일시적으로 치킨 소비가 줄어서 닭들 사이에서는 전설적인 전화위복 사건으로 남아있었거든요. 닭들은 텔레비전이 넌지시 보이는 자리에 모여 뉴스를 주시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텔레비전에서 새어나오는 소리와 빛에 주목하는건 이따금씩 열리는 축구경기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정부의 대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사태는 꽤나 심각해졌고 닭들의 회의도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생존에 강한 위협을 느끼던 건강한 닭들은 날마다 모여서 회의를 반복했고 135호도 그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닭들의 논리란게 별게 있겠어요? 끊임없는 순환논증과 악독한 단기 기억력때문에 이야기는 매일 제자리를 돌다 못해 땅바닥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얘기에 더 신이난 닭들도 있었습니다. 먹힐 걱정보다 방사선에 쪼일 걱정을 더 해야 한다는 새로운 무리가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목소리와 이런저러한 잡다한 소동 덕에 135호는 약간 시니컬해져버렸습니다. 어차피 닭이 튀기거나 구워져서 먹히는거야 어쩔 수 없는데 공포에 떠느니 빨리 죽는 게 낫겠다고요. 하지만 시퍼런 칼이 살갗을 스치는 상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시니컬해도 그 피는 뜨듯하기 마련인데 인간들은 너무 무자비했습니다. 목을 비틀고 털이 뽑히는 상상과 기름에 튀겨지는 살들의 기분이 꿈 속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면서 135호의 정신은 살짝 돌 지경이었습니다.

 

135호는 새벽 빛조차 가늠할 수 없이 어두워진 양계장의 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차피 탈출하는 것은 지리를 몰라 불가능하였고 135호의 생각은 좀 더 다른데 있었습니다. 이미 그의 눈은 살짝 뒤집혀 버렸던 겁니다. 지난 밤의 공포는 망상을 거듭한 나머지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환상을 135호에게 심어주었거든요.  건물 외벽을 따라 꼬꼬댁거리는 주접스런 입을 막아가며 135호가 찾아간 건 양계장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한 늙고 병든 닭이 숨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늙은 닭은 기침을 반복해가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135호의 건강함을 질시하듯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왜왔냐는 물음이 나오기도 전에 135호는 갑작스레 그 늙은 닭의 몸을 마구 쪼기 시작했습니다. 몸에서는 붉고 뜨거운 피가 쏟아져 나왔고 병든 닭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은 무너진 건물의 모서리를 타고 강하게 대기를 흔들었지만 한 밤의 고요를 이기지 못하고 이내 수그러들었습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늙은 닭 옆에서 135호는 잠시 열을 식히듯 나란히 누워있다가 피가 마르기 전에 서둘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은 피를 조금이라도 털에 더 묻힌 후 135호는 총총걸음으로 양계장으로 돌아왔고 자기가 한 일에 지극히 만족하였습니다. 닭이라서 그런지 반응도 빠른 듯 했습니다. 135호의 몸은 서서히 뜨거워져 자기도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새벽이 가고 아침이 오고 낮이 오고 며칠이 지나면 이제 이 모두는 조류독감으로 죽고 말거라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우아한 죽음이라고 135호는 미소지었습니다. 헐떡거리는 제모습이 마치 달빛에 반사된 마냥 한없는 만족감이 그의 눈물 안에서 어른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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