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편] 아이에게

2010.11.03 14:50

남자간호사 조회 수:2265

나는 등산을 좋아했었단다. 암벽 등반도 좋아했었고.
산을 오를 때 근육의 팽팽한 긴장과 벅찬 숨을 내쉬는 그 순간도, 그리고 긴장의 순간이 지나 가만히 앉아 산 바람을 맞으며 피로와 긴장과 땀을 식히며 친구와 함께 피우는 담배 한 대.
 
그래, 난 담배도 좋아했었단다.

어느 날이었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네 엄마와 만나기 전이었다는 건 생각이 나는구나. 
어쨌든 그 어느 날 하산 중에 한 친구에게 사고가 생겼단다. 그 날은 어려운 코스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바로 그 점이 그의 긴장을 너무 풀어준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는 말 그대로 떨어지고 굴렀다. 깜짝 놀란 우리는 그를 향해 달려갔고, 그 동안 그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있었지.

그가 얼마나 다쳤는 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단다. 그런 걸 판단하기엔 우린 너무 놀랐고, 당황했으며, 침착함이 부족했고, 침착하기엔 용기와 지식이 부족했었지.

그래도 친구 한 명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으로 산악구조대에 연락을 했고, 사고 장소가 하늘이 보이는 곳이라 금방 헬기가 올 수 있다는 말에 살짝 안심이 된 우리는 그를 살필 맘의 여유를 찾았다.

몸의 배열이 어딘가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어. 어딘가 꺾이고 부러져 보이지는 않았기에 괜시리 그를 움직였다가 척추라도 다칠 까봐 그를 가만히 고정시켜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문제는 피였지. 혈관을 다친걸까, 그의 허벅지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나왔고, 머리에서도 마찬가지 였었지. 그래서 나는 옷을 뭉쳐 그의 허벅지 상처를 꾸욱 꾹 눌렀고, 다른 친구는 그의 머리 상처를 압박했단다.
무력했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어. 조금이라도 피를 덜 흘리게 하기 위해 상처를 힘껏 누르는 일과 구조대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말야.

그는 의식이 없었고, 우린 말이 없었다. 그는 피를 흘리고 우리는 눈물을 흘렸었지.

어느 순간 적막이 깨지고 구원의 소음이 다가왔다.
구조대원의 주황색 옷이 천사의 그것처럼 보였다면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구나.
그 시끄러운 헬기 소리가 얼마나 반갑고 기쁘던지.

헬기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누군가 그러더구나. 헬기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 다행이었다고. 운이 좋았다고.

운이 좋았던 걸까, 응급실 밖에서 불안과 함께 기다리던 우리에게 의사가 그는 살았다고, 피를 더 흘렸더라면 위험했을 수 있지만, 지금 고비를 넘겼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그저 의사에게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밖에 말 할 수 없었단다.
우리는 병원 앞 벤치에 걸터앉았지. 그제서야 서로를 바라보니 모습이 가관이더구나. 피곤에 절고, 땀에 젖고, 피가 군데 군데 말라붙어 있는 서로의 모습이 말야.

우리는 그저 씨익 웃고 담배를 피웠단다.
그래, 그 때를 잊지 못해. 그 담배의 맛을 말야.

다른 날도 기억이 나는 구나.  네 엄마와 소개 받는 날, 네 엄마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다가 네 엄마의 아름다운 모습에 담배 재를 털어내는 것 마저 잊어서 손을 살짝 데었었지.

너의 탄생을 기다리며 물었던 담배의 맛도 잊지 못하고.

그래, 난 담배를 좋아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던가, 네가 유치원에 다니던 때, 아니다. 초등학생 때 였나 보구나. 학교에 다녀온 너는 내게 달려오더니 다급한 말투로 담배를 피면 안된다고 하더구나.

황당하기도, 귀엽기도 한 네 모습에 난 궁금증이 밀려왔고,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했더니 학교 보건 수업 시간에 다 배웠다고, 담배는 안 좋다며 소리를 빼엑 지르던 네 모습.

그래, 난 담배를 좋아했었다. 그때까진.

난 여전히 등산을 좋아하지만, 담배는 피지 않는다.

담배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몇몇 시간들이 내겐 존재해왔지만 담배와 함께 하진 않았단다.

바로 너란 이유로 말이다. 이미 너는 잊었겠지만, 그 이유는 바로 너란다.

그러던 네게 내가 이 말을 해야겠구나.

너를 위해서란 말은 하지 않으마. 나를 위해서 담배를 끊어주지 않겠니?

내 아이야. 고루한 아버지의 말이라고 무시하지 말아주렴. 네 사랑에 난 그런 순간들을 접을 수 있었단다. 나도 담배를 좋아했지만, 그러했기에 사랑을 담아 이 말을 해 줄 수 있는 거란다.


담배를 끊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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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금연.
 남자간호대생 시절에 지역사회간호학 공부하다가, 학교 보건 수업 파트에서 자료 사진으로 책에 실린 인형극으로 하는 금연 교육 사진을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쓴 글입니다.. 당연히 픽션이고, 쓴 지 한 7,8년 되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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