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래, 그냥 잘래, 잘래, 잘래, 잘래.

-씻고 자자, 응? R, 잠깐만 일어나봐, 화장 지우고, 세수만 하자.

-제발, 귀찮아, 잘래. 응? 자자.

 

  두 시가 넘어 귀가한 R의 온몸에서는 소주와 양주, 막걸리의 냄새가 계통 없이 섞여 발산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풀썩 주저앉아 하이힐을 벗어 내키는 대로 팽개친 R은 하루종일 몸을 옥죄던 답답한 옷가지들을 훌렁, 벗어제끼기 시작했다. 취중귀가의 와중에 여기저기 올이 나가 버린 검은 스타킹을, 아슬아슬 짧은 길이로 남자들의 시선을 붙잡았던 스커트를, 데님 셔츠를, 반지를, 시계를, 귀걸이를 동선의 궤적을 따라 벗어두고 속옷 차림인 채 최종 목적지인 침대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K는 R의 뒤를 따라 그녀가 벗어던지는 옷가지들을 차례차례 수습했다. 팔다리를 뻗고 대자로 누운 R의 표정은 거나하고 평안했으며, 곧이라도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 기세였다. 갖가지 술과 안주를 우겨넣어 볼록하게 부푼 그녀의 배가 얇은 망사로 이루어진 검은 팬티 위로 삐져나와 식식대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 선 K는 오늘도 취한 R을 씻기고 재우기까지의 험난하고 지난한 과정을 참을성 있게 수행할 예정이었다. K는 그녀의 겨드랑이를 잡고 상체를 일으켜 가볍게 흔들며 다정하고 끈기 있게 R의 이름을 불렀다. 씻기고 재우지 않으면 내일 아침 트러블이 올라온 피부를 보고 경악한 R이 '클렌징이 여자 피부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 하루 종일 집구석에만 있으면서 그런 거 하나 케어 못하겠냐'며 K를 닦달할 것이 뻔해서가 아니다. K는 진심으로, 그녀가 깨끗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잠을 자게 되기를, 그리고 보다 상쾌한 아침을 맞게 되기를 바랐다. 

 

-R, R. 그럼 내가 씻겨줄게. 그러니까 너는 잠깐만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기만 하면 돼. 응?

-아, 진짜.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재주껏 데려가봐 어디.

 

  언제나 반복되는 패턴대로, 십여 분에 걸친 설득 끝에 R은 엉덩이를 조금 들었다.술 취한 여자의 몸짓에는 부축하는 이에 대한 답지 않은 꼬장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어서, 정신을 잃고 늘어진 것보다 훨씬 다루기가 힘든 법이다. 때문에 K는 R이 조금이나마 스스로 움직이도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씻고 자라는 염불을 외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옮겨 놓기만 하면 느릿하나마 클렌징 과정이며 세수며 이닦기는 스스로 하던 R이었다. 그러나 K가 R의 수발에 익숙해지는 동안, 그 과정을 하나하나 K에게 위임하기 시작하더니 요즈음은 화장실에 옮겨 놓아도 목욕 의자에 앉은 채 손가락 하나 까딱 않는 것이었다. 목욕 의자에 앉히고 나서도 R의 투덜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물, 따뜻하게.

-그래. 이 정도면 괜찮아?

-너무 뜨거워.

 

  R의 눈두덩은 마스카라가 얼룩진 자국이 시커맸다. K는 화장솜에 아이리무버를 묻혀 익숙한 솜씨로 눈가를 닦아냈다. 눈가는 예민하고 약한 피부여서, 리무버를 묻혔다고 벅벅 문지르거나 하면 빨갛게 부어올라 쓰라리기 마련이다. 화장을 지울 부위에 솜을 지그시 누르고 리무버가 스며들어 화장이 녹기를 기다린 후, 살살 닦아내는 것이다. 물론, R을 수발하면서 무수한 욕을 들어먹은 후 습득하게 된 요령이다. 눈가 화장을 지운 뒤 K는 클렌징 크림을 짜서 R의 볼에 문질러 거품을 내고, 눈이며 코며 입가를 꼼꼼하게 닦아냈다. 쪼그린 채 눈을 감고 반쯤 졸면서 자신에게 얼굴을 내맡기고 있는 R을, K는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온도를 맞춰 놓은 미온수로 거품을 깨끗하게 헹궈 내고, 이제는 칫솔에 치약을 짠다. 이것만은 남이 해주는 게 시원치 않은 항목이므로 K가 칫솔을 입에 넣어주면 R이 자동적으로 솔을 쥐고 칫솔질을 하기 시작한다. R의 칫솔질은 언제나 정성 가득이어서, 취한 상태에서도 꼼꼼함이 수그러드는 일이 없었다. R이 이를 닦는 동안 K는 다시 따뜻한 물을 받아 R의 발을 씻긴다. 늘 샵에 가서 관리를 받는 R의 화려한 페디큐어가 많이 닳았다. 이따 R이 잠들면 아세톤을 써서 지워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K였다. 종일 하이힐에 시달린 발바닥의 굳은살과, 각질이 생겨 까칠한 발바닥을 비누로 문지른다. R은 간지럽다며 몸을 비틀다가 미끄러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세수를 마치고 나니 R은 조금이나마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토너와 에멀젼, 아이크림과 영양크림을 차례대로 바른다. 그러나 그렇게 떡이 되도록 마신 취기가 가셨을 리는 없다. 마지막으로 수분 스프레이를 얼굴 전체에 뿌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침대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K는 그런 그녀의 옆에 누워 팔베개를 괴어준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속옷 차림이다. 브래지어 컵 사이로 삐져나오는 가슴을 보니 하루 종일 집안에서 썩고 있었던 K의 성욕이 자극받는다. K는 손을 그녀의 가슴으로 뻗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R을 부른다.

 

-R...잠들었어?

 

  곧바로 돌아오는 다정한 대답.

 

-나 내일...일곱시 반에 깨워...늦으면 죽는다...

 

  아세톤이 어디 있더라, 발톱이나 지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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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생각난다고 썼던 걸 보니 1년 전의 나는 참 순대국스러운 여자였군.  요즘은 글을 거의 안 쓰는데, 좀 써봐야겠어요. 이때보다 얼마나 담백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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