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Hazard (글) 햇살과 나무꾼 (옮김)

시공사에서는 최근들어 아동 문학에 대한 고전적인 전문 학술서들을 하나씩 번역 출판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책은 브루노 베텔하임의 [옛 이야기의 매력]일 것이고, 가장 실속 있는 책은 존 로 타운젠드의 [어린이책의 역사]쯤 될 겁니다. 특히 타운젠드의 책은 힐쉬베르거가 서양 철학사에서 그랬던 것과 같은 수준의 역사를 영어권 아동 문학에 제공하고 있어서 두고두고 보관해 둘 가치가 있습니다. 모두 좋은 책들이죠.

베텔하임과 타운젠드가 진지하고 침착한 학술 서적이라고 한다면, 폴 아자르의 [책, 어린이, 어른]은 좀 성격을 달리 합니다. 이 책에는 베델하임의 독일식 학자다움도, 타운젠드의 영국식 신중함도 없습니다. 폴 아자르의 책은 수다스럽고 잘 흥분하고 거창하고 온갖 방식으로 목에 힘을 주고 있는 데다가 살짝 편견에 차 있기도 합니다. 아마 좀 급하기도 했겠죠. 아자르가 이 책을 썼던 1930년대 말의 프랑스는 어린이 문학의 자산을 독일과 영국만큼 자랑스럽게 뻐길만한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책, 어린이, 어른]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제3장 남쪽 나라에 대한 북쪽 나라의 우월성'은 그래서 거의 질시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그가 상당한 통찰력을 동원해 이 주제를 상세하게 다루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렇게 느껴졌을 거예요.

그가 민족성과 지역차이에 따른 어린이 문학의 비교에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기는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책, 어린이, 어른]이라는 책 전체를 휘어잡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이 훌륭한 어린이 책인가?'

아자르 답변은 명쾌하고 당연합니다. 어린이들의 취향에 맞추어 쓰여진 책, 감상이 아닌 감수성을 키워주는 책, 주입식 지식을 주는 대신 지식 의 씨앗을 뿌리는 책, 인간의 심성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책, 무엇보다도 예술의 본성에 충실한 책.

모두 좋은 말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 이 소개 글만 읽은 사람들이라면 왜 이런 뻔한 말을 하려고 책 한 권을 낭비했느냐고 아자르에게 따지고 싶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어린이를 위한 진정한 아동문학의 역사는 아주 짧고 그 짧은 역사만 하더라도 다양한 어른들의 선입견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아자르는 잔뜩 흥분해서 그 잔혹한 역사를 토해냅니다. 특히 그는 가짜들에 대해 거의 저주섞인 욕을 퍼붓습니다. 어설프게 문학을 가장한 교훈서에 대한 분노는 책 전체에 가득 차 있습니다. 아자르에게 장리스 부인, 베르켕, 트리머 부인과 같은 '교육자들'은 문학적 범죄자들입니다. 아마 그는 찰스 램처럼 이 사람들이 악마한테 잡혀가고 페스트에 걸리기를 바랐을 겁니다.

분노의 욕설이 멎으면, 아자르는 이런 어른들의 범죄에 대한 어린이 독자들의 승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걸리버 여행기], [로빈슨 크루소], [돈 키호테]와 같은 책들을 어떻게 어린 독자들이 어른들한테서 빼앗아서 자신들을 위해 다시 창조했는지, 어떻게 어른들이 떠넘긴 지루한 가짜 책들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는지. 이 작은 역사는 거의 정치적이기까지 한데, 그건 아자르가 이 과정을 폭압적인 어른들의 계획적 교육 체제 속에서 어린이들이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는 과정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장기인 비교 문학의 테크닉을 잔뜩 사용한 '남쪽 나라에 대한 북쪽 나라의 우월성'과 '민족적인 특색'을 넘어서면 어린이 책의 이상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의 세계 연방'은 당시 유럽의 범세계 주의자들이 꿈꾸었을 듯한 장엄한 환상의 흔적까지 보이죠.

흠, 좋아요. 30년대에는 통했을 법한 이야기군요. 하지만 반세기가 훌쩍 지난 2000년에 우리가 아직까지 이 흥분 잘하고 수다스러운 프랑스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반 세기 동안 어린이책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습니다. 더 이상 작가들은 '나의 어린 독자' 어쩌구 하면서 자기네 독자들을 깔보지 않아요. 어린이 독자들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몇몇 어린이 문학 작품들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 어쩌구하는 가증스러운 가면 없이도 오래 전에 어린이 문학과 성인 문학의 경계를 깨뜨렸습니다(의심스럽다면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세요!) 적어도 현대 어린이 문학은 그 어떤 때보다도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는 면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이 화려함에서 살짝 벗어나면 아직도 비관적인 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싸구려 어린이 문학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싸구려들은 걸작들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댓가니까요. 성인 문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싸구려 어린이 문학작품 역시 언젠가는 도태될 겁니다. 그것은 자연법칙이죠.

더 심각한 문제는 아자르가 저주를 퍼부었던 폭압적인 어른들의 체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싸구려 책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죠. 하지만 문학 자체의 가치와 어린이 독자의 진정한 욕구를 무시한 어설픈 교사들과 공무원들이 그 가짜들을 치켜세우고 리스트를 만들어 추천까지 해서 내보내는 암담한 현실은 비난 받아야 마땅합니다. 얼마나 많은 어린 독자들이 저질스럽기 그지없는 '반공 도서'를 읽고 '감상문'이라는 것을 쓰면서 그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해야 했던가요. 아마 이런 책들은 지금 성인이 된 살벌한 사람들을 만들어낸 원흉 중 하나일 겁니다. 어른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읽은 건 아이들뿐인데, 읽은 게 그따위 책들이라니! 사람들이 이처럼 살벌하고 호전적이 된 것은 당연합니다.

아자르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입시다.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 단계 쯤으로 생각하는 안이한 방식에서 탈출합시다. 그들의 독립된 존엄성을 존중해줍시다. 그들에게 상상력을 발휘할 공간을 줍시다. 그들에게 진짜 문학 작품을 줍시다. 이런, 그러고보니 이런 이야기 중 일부는 몇 십년 전에 폐병으로 요절한 방모씨라는 폐병 환자가 이미 우리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군요. 우린 그동안 뭐하고 있었던가요. 아마 그 양반이 만든 어린이날에 애들을 유원지에 끌고 가느라 다 잊어버렸었나 봅니다. (0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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