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2008) [1회-6회]

2010.03.21 19:16

DJUNA 조회 수:3688

각본: 이은영 연출: 장태유, 진혁 출연: 문근영, 박신양, 문채원, 류승룡, 배수빈, 이준, 안석환, 임지은, 박진우, 이미영, 김응수, 박혁권, 한정수, 김유정

전 보통 시리즈 리뷰를 방영이 끝난 뒤에야 썼는데, 한국 미니 시리즈의 경우는 그게 별 의미가 없다고 다들 그러더군요. 생각해보니 맞는 말입니다. 어차피 문근영의 부상으로 방영을 한 주 쉬게 되어서 시리즈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요. 그러니 지금까지 방영된 [바람의 화원] 에피소드에 대한 제 간단한 의견을 밝히기로 하죠.

우선 다 아시는 기본 정보. 이 작품은 이정명의 역사추리소설 [바람의 화원]이 원작입니다. 이 소설의 반전 중 하나는 신윤복이 남장한 여자라는 것이죠. 물론 드라마에서는 이것을 반전으로 숨길 수 없습니다. 문근영이 주연이니까요.

전 [바람의 화원]이 드라마로 각색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괜히 기대가 되었는데, 그건 이 소설이 재미있지만 그렇게까지 완벽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캐릭터들은 중간중간에 사라지고 심리묘사엔 균열이 있습니다. 그림 퍼즐 놀이를 하느라 정작 드라마가 약화되기도 하며 추리물의 트릭은 종종 어색하고 타협적입니다. 분명 더 나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는데, 중간에 그냥 만족하고 머문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렇다면 보다 긴 호흡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그 빈 틈을 채울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한국 미니 시리즈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이 역시 완벽한 작품이 될 가능성은 없죠.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아이디어와 드라마에 또 하나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걱정도 되었는데, 소설에서 꽤 노골적인 퀴어 요소가 드라마에 얼마나 반영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죠. 사실 지금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원작 소설과 지금까지 전개된 드라마의 차이점에 대해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가장 두드러지게 바뀐 건 신윤복의 캐릭터입니다. 원작의 신윤복은 쿨하고 냉정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천재소녀였습니다. 하지만 문근영의 신윤복은 동글동글 귀엽고 충동적이며 외향적입니다. 캐릭터를 스타 배우에게 맞춘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문근영이 주연이 아니라고 해도 이 정도 개작은 당연합니다. 그게 한국 미니 시리즈라는 장르에 맞고 미스터리에 갇혀 있던 캐릭터와 드라마에 새로운 활력을 넣어줄 수 있습니다.

신윤복의 캐릭터가 변형된 것만으로 드라마는 원작에 없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끌어냈습니다. 드라마 신윤복은 이제 한양 시내를 콩콩 뛰어다니면서 예쁜 기생을 유혹하고, 파파라치 그림을 그려 궁궐 안을 뒤흔들어놓고, 몰래 그림을 팔아 아르바이트를 하고, 김홍도와는 모든 서브 장르를 커버하는 코미디를 연출합니다. 모두 소설에서는 어림없는 일이죠.

드라마도 커졌습니다. 원작에서는 그냥 규칙위반으로 끝났던 [기다림] 스캔들은 거대한 궁중 암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그림을 그린 범인은 손을 돌로 찧는 장파형을 당해야 합니다. 윤복은 [단오풍정]을 그리기 위해 여장을 하고 개울가로 숨어들고 나중에는 화원 별제 장벽수가 보낸 스파이에게 납치되어 우물 안에 갇힙니다. 윤복과 정향의 로맨스가 진짜 멜로드라마로 피어난 건 물론이고요. 원작에선 조금 따로 놀던 추리물의 요소를 보다 자연스럽게 드라마 안에 녹여내려는 시도도 보이던데, 이런 경향은 이후의 에피소드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원작의 기본 줄거리를 따르면서도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넣어 개작을 시도하려 했기 때문에 드라마의 줄거리는 많이 덜컹거리고 종종 설득력을 잃습니다. 예를 들어 장파형 소동은 나름 법치국가였던 정조치하의 조선 시대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단오풍정] 소동은 재미있지만 말없는 천재소녀 윤복이 세상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쿨하게 그려야 제대로 먹히는 원래 설정에 온갖 장식물을 달아 모양을 이상하게 만든 꼴이 되었죠.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흥미진진하지만 괴상하게 꼬여 있는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이 괴상한 이야기들 중 시청자들의 시선을 확 끄는 것은 윤복과 정향의 로맨스입니다. 예상과는 달리 윤복과 정향은 훨씬 적극적입니다.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수작을 걸고 온갖 작업 멘트를 던집니다. 묘사 강도도 높아서 유명한 윤복/정향 그네신 같은 건 성적 은유 이외의 다른 것으로 읽기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두 배우의 궁합이 예상 외로 좋습니다. 이들 '닷냥 커플'에게 열성팬들이 생긴 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다 긍정적이지만 여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러브 스토리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대체물 또는 변형물로 취급받습니다. 작가와 연출자들은 '여성성에 대한 갈망'이라는 핑계를 장황하게 동원해 (심지어 에피소드 7의 예고편에서는 윤복의 입으로 그 감정을 직접 설명하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이들의 관계를 변명합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무르익는 5,6부에서는 오히려 겁에 질려 뒤로 빼는 듯하고요.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열성적인 '닷냥 커플' 지지자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동성애를 욕과 같은 단어로 취급합니다. 매스컴에서는 이들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슬아슬'이나 '야릇한'과 같은 표현을 추가해 오히려 관음증적인 느낌을 강조하고요.

여기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동성애 코드'라는 단어입니다. 하긴 써도 됩니다. 형식상 윤복에 대한 정향의 감정은 이성애적입니다. 윤복의 경우는 보다 복잡하지만 만드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성애적 핑계를 만들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 여기에서 '동성애 코드'라는 타협적인 단어보다는 보다 정통적인 '퀴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드라마가 더 효과적으로 움직이고 읽힐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적어도 이 단어를 사용하면 주인공의 동기와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변명이 장황해지면 드라마의 힘과 진정성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불필요한 설명 없이 감정의 흐름을 타는 것이 최선입니다.

드라마는 소위 '사제라인'이라고 불리는 신윤복과 김홍도의 러브라인을 준비 중입니다. 두고봐야겠지만 전 미심쩍습니다. 우선 스토리 일탈을 가져옵니다. 윤복이 정향에게 집중하지 않는다면 후반부의 스토리가 흐트러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원작에서 김홍도의 감정 묘사가 재미있었던 건 그가 철저하게 짝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는 걸요. 진지한 연애묘사가 추가된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뻔해지고 의무방어처럼 보이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연애를 하기엔 같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지요. 물론 여기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하려면 드라마 흘러가는 걸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드라마가 미술을 다루는 방식이나 음악의 활용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08/10/13)

기타등등

1. 다음은 밑의 게시물에 대한 답변입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wawon&no=25400&page=3

여기서 제가 퀴어라는 단어를 선정한 건 퀴어가 '동성애'만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그냥 게이라는 표현을 썼죠. 퀴어의 범위는 훨씬 넓어서 이성애규범적인 것을 넘어선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당연히 윤복-정향의 관계도 여기에 자연스럽게 포섭되지요. 제가 퀴어라는 개념이 편리하다고 주장한 것도 이 개념이 실질적으로 이들의 관계를 정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성애적 규범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뿐이에요. 이들 위에 서서 이들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분석하지 않지요. 적어도 학술적으로 쓰면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성성에의 갈망을 제가 변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근거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한 사람의 감정이 그렇게 단순할 수는 없지요. 대부분 사람들의 감정은 그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죠. 윤복 같은 성격의 사람이 그 입장에서 갑자기 정지해서 냉철한 자기분석을 시도하는 것도 현실성이 없는 거고.

그리고 퀴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게 여성성에 대한 갈망, 동료 예인에 대한 동지애, 그밖의 모든 것들은 거부한다는 건 아니죠. 그것들로 캐릭터를 정의하거나 변명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성애적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섹스에 대해서만 생각한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심각한 편견이죠. 제 의견은 의무와 규칙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흐르는 대로 놔두라는 겁니다.

2.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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