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2008) [11회-12회]

2010.03.21 19:29

DJUNA 조회 수:2965

각본: 이은영 연출: 장태유, 진혁 출연: 문근영, 박신양, 문채원, 류승룡, 배수빈, 이준, 안석환, 임지은, 박진우, 이미영, 김응수, 박혁권, 

11회

11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여전히 어진화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진화사]라는 소제목이 붙은 에피소드가 지금까지 4개나 나왔어요. 아무리 이야기가 좋아도 시청자들이 지칠 수밖에 없지요. 시놉시스를 딱 봐도 이러면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걸 짐작했을 텐데, 알 만한 사람들이 왜 이랬는지.

그런데 왜 어진화사 이야기가 이렇게 긴 걸까요? 대충 논리는 짐작 갑니다. 어진화사는 왕을 그리는 것이니 중요한 이벤트죠. 드라마에서는 정치적 암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요. 이 사건을 통해 신윤복이 도화서를 나가는 계기가 만들어지니 극적으로 중요합니다. 두 달 간 공을 들여 정조의 어진을 재구성했다니 자랑하고도 싶었겠죠.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깁니다. 이건 그렇게까지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스토리가 아니에요. 그러기엔 단점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장 큰 세 가지만 지적하기로 하죠.

우선 그림의 문제입니다. [바람의 화원]은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이 드라마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그게 이 작품의 강점이죠. 그런데 어진화사가 주인공으로 떠오른 뒤로 우린 신윤복과 김홍도의 진짜 그림을 단 한 편도 보지 못했어요! 물론 그들이 어진을 함께 그렸다고 치고 그들의 작품을 재구성하는 것도 흥미로운 계획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신윤복과 김홍도의 진짜 그림이 가지는 힘에는 미치지 못해요. 그 초상화에 우리에게 익숙한 그들의 스타일이 반영된 것도 아닌 걸요.

두 번째 문제로 계산 착오를 들 수 있습니다. 소설과는 달리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는 실존인물들이 관련된 현실 정치의 무게가 상당합니다. 그건 저도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스토리를 잡아도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윤복과 김홍도의 개인적인 드라마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이를 무시하면 드라마의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고 꼭 이 드라마에서도 중요한 사건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정치적 무게가 아무리 무겁다고 해도 그 사건이 꼭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윤복의 캐릭터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진화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 캐릭터의 매력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셨나요? 배우 문근영을 내세운 귀여운 장면이 많이 나오긴 했어도 신윤복의 매력은 많이 죽었어요. 드라마에서나 책에서나, 신윤복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멋대로 휘두르며 뛰어다닐 때 가장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스승 밑에서 조수 역할을 하는 동안, 이 친구에겐 그럴 기회가 없습니다. 6회의 신윤복과 11회의 신윤복을 비교해보세요. 에너지와 총기가 얼마나 많이 날아갔는지요. 저희들이 좋아했던 윤복이가 맞나 싶습니다.

그렇다고 이 에피소드가 어진화사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두 가지 큰 드라마가 벌어지지요. 이들은 모두 자기만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우선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자극입니다. 어진을 옮기는 신윤복의 그림자를 보던 김홍도는 신윤복이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만 신윤복은 얼렁뚱땅 그 위기를 넘기지요.

이건 꽤 재미있는 아이디어입니다. 먼저 흥미로운 그림을 연출할 수 있어요. 그림자와 초상화, 신분위장이라는 삼중의 장벽을 쳐서 아슬아슬한 에로티시즘을 그려낼 수도 있지요.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일반적인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우린 실루엣처럼 단순화된 정보를 통해 지금까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단점 역시 분명합니다. 아까 일반론은 그럴싸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김홍도와 신윤복의 경우는 그게 잘 먹히지 않아요. 이미 김홍도는 신윤복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체접촉이 장난이 아니었잖아요. 이미 신윤복 육체의 여성적 특성에 대해 알만큼 알고 거기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신윤복이 몸매가 확실하게 드러내는 옷을 입고 있지 않는 한 실루엣은 대단한 추가정보를 제공해주지는 못해요. 물론 실루엣 정보를 통해 지금까지 품고 있었던 의심이 정리되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좀 부족한 것 같군요. 게다가 공을 들인 장면 치고는 대사가 많이 투박합니다. 특히 윤복의 마지막 대사 “진실은 마음 속에” 같은 건 지금 생각해도 그냥 민망해요. 시간이 쫓겨 그냥 내뱉은 티가 역력합니다. 작가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겠죠. 아니, 14회 원고를 쓰느라 그럴 시간도 없으려나요.

가장 큰 문제는 이 설정이 원작에서는 이후로 한동안 계속 이어지는 [바람의 커피 프린스] 설정을 날려버린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너무 빨리 나왔죠. 하긴 이건 취향 문제일 수도 있겠죠. [커피 프린스 1호점]이 이미 있는데, 같은 설정을 그대로 반복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를 통해 제가 좋아하는 [바람의 화원] 설정 하나가 날아가 버린 건 정말 아쉽군요. [바람의 커피 프린스]보다는, 신윤복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뒤로 김홍도가 느끼는 해방감과 조건 없는 사랑의 쾌락이 더 아까워요. 드라마가 이걸 커버할 만한 뭔가를 만들어줄 수 있을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자극보다 더 중요한 건 [바람의 동화] 설정입니다. 영복과 윤복의 이야기지요. 이 이야기에서 영복은 동생 윤복을 위해 붉은 색 안료를 만들다가 독에 중독됩니다. 중독의 영향으로 환각을 보던 영복은 여자 옷을 입은 윤복의 환영을 따라가다 추락사하지요.

언젠가 이런 장면이 나올 거라고 걱정했습니다. 원작 소설에서 영복은 중간에 말없이 그냥 사라집니다. 어디로 가는 게 아니라 작가가 그냥 언급을 안 하죠. 시간 여유가 있는 드라마에서 영복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비극적일 가능성도 높았습니다. 앞으로 영복이 등장할 이유는 없으니 죽는 결말은 캐릭터를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아이디어죠.

이 이야기는 좋은 부분이 많습니다. 윤복에 대한 영복의 사랑은 감동적입니다. 지금까지 별 역할이 없었던 영복 역의 이준은 자기에게 주어진 드라마를 아주 훌륭하게 마무리 짓고 있지요. 그는 실질적으로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입니다. 배우 자신도 만족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영복의 환각 장면은 무척 아름답게 그려졌어요. 그가 그린 동생의 초상화도 좋고요. 전 정조 어진보다 영복의 귀여운 그림이 백배천배 더 좋습니다. 어디 고화질 스캔본 없습니까?

하지만 전 이 이야기의 주제에 대해서는 불만이 좀 있습니다. 천재인 동생에 대한 형의 애정과 헌신은 감동적이에요. 하지만 과연 평범한 사람들은 과연 천재를 위해 그렇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해야 합니까? 그들은 자기만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건가요? 단청소에서 색을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 아닌가요? 전 영복이 "윤복이는 나다"라는 논리에 집착하는 것이 무척 거슬립니다. 전 그가 단청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2회

12회는 쇼킹합니다. 소설을 읽은 사람들에게도 그렇죠. 아니,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더 충격을 받았을지도 몰라요. 소설에선 신윤복이 참수형의 위험에 처해지지 않으니까요.

벌어지는 일은 같습니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그린 정조의 어진은 대신들의 비난을 받고, 신윤복은 스스로 어진을 찢습니다. 그 때문에 신윤복은 도화서에서 쫓겨나지요.

하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소설 속에서 신윤복은 냉정하고 영리하고 용감합니다. 어진을 찢는 행위는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스승을 구하기 위한 계산된 희생입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신윤복은 죽은 형이 만든 색을 모욕하는 대신들에 분노해 충동적으로 그림을 찢습니다. 게다가 드라마 속에서 어진은 정조의 정치 계획과 훨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소설 속의 정조는 신윤복을 쉽게 용서할 수 있었지만 드라마 속의 정조는 그러기 힘들죠. 고로 신윤복이 참수형을 선고받는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개작은 이해가 됩니다. 맘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죠. [바람의 화원]은 원작의 스토리를 끊임없이 실제 정치와 연결시키고 표면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센세이셔널리즘이 극을 달리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게 지금까지 끌어온 스토리와도 맞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맘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우선 논리 문제가 있어요. 주사와 관련된 음모를 보세요. 주사의 사용 유무가 그렇게 정치적으로 중요했다면 정조에게 사실을 말하고 재료를 추가로 얻으면 됩니다. 정적들의 음모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협조해주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정치적 의지가 담겨있는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화원들을 돕지 않는 정조의 태도도 이해가 어렵습니다. 정치적 비판이 예상되는 경우라면 어떻게든 고지를 점령해놓고 싸움을 시작하는 게 당연하죠. 아무래도 이 위기는 조작된 느낌이 강합니다. 천재라고 칭송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멍청하게 굴고 있어요. 이 장면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에피소드 내내 그렇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신윤복의 캐릭터에 있습니다. 위에서 전 신윤복 캐릭터의 매력이 점점 날아가고 있다고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한다고 해도 12회의 신윤복은 심각합니다. 정말 비호감 민폐 캐릭터예요!

사실 신윤복은 늘 조금씩 민폐 캐릭터였습니다. 지금까지 [바람의 화원]에서 일어난 소동들은 모두 신윤복이 생각 없이 무심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벌어졌지요. 하지만 우린 윤복을 별다른 고민 없이 용서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윤복은 걸작을 한 편씩 그렸고 개인적 매력으로 자신이 일으킨 불편함을 상쇄시켰지요. 그 때문에 정향, 영복, 홍도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 고생은 해도 된다고 착각하며 흐뭇해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에피소드들에서 윤복이 한 행동은 어떻게 봐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영복이가 죽었어요. 영복이 남긴 마지막 유물인 붉은 색 안료는 어진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신한평은 아들 둘을 동시에 잃을 판이고 평생에 걸친 소망도 날아갔습니다. 정조의 정치 개혁 프로젝트도 박살났습니다. 그런 윤복이를 살리기 위해 홍도는 예정에도 없던 차력쇼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향의 무너지는 가슴은 도대체 누가 책임을 진답니까!

물론 주인공이 늘 호감 가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소동을 통해 앞으로 벌어질 드라마가 더욱 극적이 될 수도 있고요. 이렇게 얽어놓으면 나중에 진행될 신윤복과 김조년의 관계가 더욱 강렬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하한선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야기가 제대로 먹히려면 12회에서 신윤복은 바닥을 쳐야 합니다. 더 이상 밑으로 내려가서는 안 돼요. 이제 윤복에겐 새로운 미션이 생겼습니다. 어떻게든 이전의 모조를 되찾고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이죠. 전 지금까지 [바람의 화원]을 성장물로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길밖엔 없습니다. 이전 매력을 되찾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자기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고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시간이 과연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진을 그리느라 벌써 아까운 시간이 많이 날아갔습니다.

시간이 좀 남았으니, 다른 이야기도 좀 하죠. 소위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 [바람의 화원]에 대한 글들을 읽노라면 이들 개념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사실은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죠. 스토리 안에서 보면 윤복이 자화상이라며 [미인도]를 그리고 그걸 김홍도에게 보여주는 장면도 조금은 생뚱맞습니다. 주제며 극적 논리가 지금까지 흘러온 이야기와 아주 잘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요. 먼저 써놓고 나중에 이야기를 끼워맞춘 티가 납니다.

원론적으로 여성성과 남성성의 개념은 쉽게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신윤복은 타의에 의해 '남장여자'가 된 캐릭터이니, 조작된 남성성에 의해 여성성이 억압되어 있었고 그것이 나중에 해방된다는 일반논리는 그럴싸해보이지요.

하지만 과연 그게 그렇게 단순합니까? 일단 드라마 신윤복이 과연 억압된 사람처럼 보입니까? 암만 봐도 이 캐릭터는 감추는 게 없습니다. 윤복의 허세 떠는 성격이나 바람둥이와 같은 태도는 그 사람의 원래 개성입니다. 자신의 여성적인 본성은 미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거의 여과 없이 터져 나오고 있고요. 물론 남장이라는 설정에 따른 스트레스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복은 이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 중 정신적으로 가장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오히려 부당할 정도로 건강하지요. 정조시대 사회적 규칙을 멋대로 위반하면서 그런 자유를 얻었으니까요.

게다가 이 작품에서 [미인도]로 대표되는 조선시대의 여성성이 과연 건강한 것입니까? 조선 시대의 평범한 여인네들에게 강요된 '여성성'은 사회적 편견의 산물이었고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신윤복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누렸던 자유는 거의 누리지 못했습니다. (드라마에서 신윤복이 직접 언급하지만) 그들은 새장 속의 새였습니다. 정향과 같은 기생들은 보통 평범한 여인네들에 비해 어느 정도 행동의 자유가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죠. 그렇다면 과연 그 규격화된 여성성은 신윤복이 도달해야 할 지향점이 되어야 할까요? 그건 오히려 모든 면에서 퇴행일 것입니다.

비전형적인 성격이 매력적인 캐릭터가 '성숙'이라는 핑계를 대며 사회적 규칙에 복종하면서 원래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평범한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습니다. 왜 멀쩡하고 자유롭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작정하고 죽이려는 건지 이해가 안 돼요. [바람의 화원]에서는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작에서도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잖아요. 전 신윤복(또는 김홍도)=샤라쿠 아이디어는 괜한 콤플렉스의 반영 같아서 별로 맘에 들지 않지만 그게 차라리 낫습니다. 지금 신윤복은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자신을 마음대로 재정의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 위치를 정말 버려야 할까요?

조금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성성/남성성에 관한 한, 끝에 가서 자신의 위치를 수정해야 할 사람은 윤복이 아니라 정향 같습니다. 소설에서 정향 이야기의 끝은 구원입니다. 하지만 이 구원이 제대로 된 의미를 찾으려면 다시 계월옥으로 돌아가 기생일을 한다는 결말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과정 중 정향을 규정지었던 완벽한 조선시대 여성의 이미지는 당연히 파괴되어야 하지요. 이런 걸 생각해보셨는지요. (08/11/07)

기타등등

1. 신윤복이 남자라는 걸 증명하려는 시도를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그 근거로 "당시 도화서에는 여자가 일할 수 없었다"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조금 갑갑합니다. [바람의 화원]과 [미인도]는 바로 그 설정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나요? 도화서에서 여자가 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신윤복 모두 남자로 변장하는 것이잖아요. 이건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기초적인 내용 이해와 논리의 문제입니다. 왜 이런 걸 가볍게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2. 이 시리즈에서 윤복이는 벌써 기절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기절해 있는 동안 의원의 치료를 받은 것도 두 차례. 이런 데도 윤복이 여자라는 사실은 들통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성추행을 단 한 번도 당하지 않은 건 더 기적 같군요. (다시 세어보니 다섯 번이더군요. 참 몸을 험하게 굴리는 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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