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스미스 Fingersmith (2002)

2010.03.16 12:25

DJUNA 조회 수:5093

Sarah Waters (글)

[핑거스미스 Fingersmith]는 [티핑 더 벨벳 Tipping the Velvet],[어피너티 Affinity]에 이은 사라 워터스의 세번째 장편입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시대 배경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 시대 소설의 어투를 유지하고 있지요. 역시 전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투어 가이드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티핑 더 벨벳]이 1890년대의 뮤직홀과 노동 운동의 현장을, [어피너티]가 1870년대의 여성 교도소와 영매들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핑거스미스]는 1860년대를 무대로 런던의 범죄자들과 정신 병원, 시골의 대저택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디킨즈식 세계를 보여줍니다.

소설은 버려진 아기들을 주워와 도둑과 소매치기로 키우는 (이 소설의 제목 [핑거스미스]는 도둑을 의미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은어입니다) 석스비 부인의 아지트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주인공 수잔은 석스비 부인의 아이들 중 한 명으로, '젠틀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상류 사회 출신 사기꾼의 음모에 가담하게 됩니다. '젠틀맨'은 모드 릴리라는 상속녀와 결혼한 뒤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고 아내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을 계획을 짜고 있었죠. 하지만 그의 계획을 돕기 위해 모드의 하녀로 취직한 수잔은 미래의 희생자인 모드에게 점점 동정심을 느끼게 됩니다.

앞으로도 이야기가 흘러가려면 한참 남았지만 줄거리는 이쯤해서 접어두는 편이 좋겠어요. 더 이야기를 밝히다가는 꽈배기처럼 복잡한 음모로 가득 찬 소설의 재미를 반쯤 날려버릴테니까요. [핑거스미스]는 찰스 디킨즈나 윌키 콜린즈가 썼을 법한, 과장되고 복잡하고 굉장히 멜로드라마틱한 소설입니다. 배반, 음모, 신분의 비밀, 살인, 납치, 유괴, 정신병과 같은 소재들이 지극히 19세기풍으로 얽혀 있어요.

이번에도 워터스는 사전에 예습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핑거스미스]는 19세기 문학에서 많은 걸 빌려왔지만 (특히 [올리버 트위스트]의 노골적인 인용은 금방 눈에 들어옵니다) 그만큼이나 빅토리아 시대의 숨겨진 풍속사에서도 많은 걸 가져오고 있습니다. 중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포르노 소설들이 대표적인 예죠. 소설은 구식 소설의 장르 공식을 따르는 동안에도 재발견된 역사의 조각들을 이곳저곳에 숨겨놓기 때문에 은근히 복잡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린 1부에서 아주 전형적이고 순진하게 묘사된 구애의 장면을 읽습니다. 아마 이런 소설들에 익숙한 독자들은 작가가 시대에 맞게 순진함을 위장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2부로 접어들면 독자들은 그런 구애의 장면이 처음부터 19세기 소설의 의식적인 모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핑거스미스]는 어쩔 수 없이 19세기 전문 책벌레의 작품입니다. 3부의 정신병원 장면에서, 정신병원에 끌려간 여자 주인공에게 의사가 떠들어대는 대사는 어딘지 모르게 워터스 자신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Fancies, Mrs. Rivers. If you might only hear yourself! Terrible plots? Laughing villains? Stolen fortunes and girls made out to be mad? The stuff of lurid fiction! We have a name for your disease. We call it a hyper-aesthetic one. You have been encouraged to overindulge yourself in literature; and have inflamed your organs of fancy.' 20세기에 태어난 워터스는 운이 좋았어요. 낡은 책들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정신없이 짜깁기 했으면서도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대신 잘나가는 신인 작가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워터스가 정말로 구닥다리 책들을 짜깁기만 하는 작가라면 [핑거스미스]와 같은 책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워터스는 소재를 아주 잘 아는 작가들이 그렇듯, 소재에 얽매어 있지도 않습니다. 워터스가 만들어내는 구식 스토리와 의고체 문장은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요. 19세기 작가들이라면 결코 언급하지 못했을 소재와 사건들을 19세기 배경과 결합시키는 수법도 훌륭하고요. 수잔과 모드도 생생한 활력이 넘치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입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빠르고 재미있습니다. 적당히 독자들을 감질나게 하면서도 이야기를 성큼성큼 끌어가는 그 페이스는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워터스의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도 갈수록 발전하는 것 같고요. [티핑 더 벨벳]식의 러브 스토리를 기대하는 분들은 조금 실망할지 모르고, 클라이맥스를 짜넣는 방법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많겠지만, [핑거스미스]가 19세기 멜로드라마의 뻔뻔스러운 매력을 듬뿍 지닌 흥미진진한 소설이라는 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02/02/28)

기타등등

워터스는 [핑거스미스]를 끝으로, 한동안 빅토리아 시대 배경의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현대물을 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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