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 미 온 어 선데이 Tell Me On A Sunday (2007)

2010.03.21 07:31

DJUNA 조회 수:2076

연출: 이지나 출연: 김선영, 바다, 정선아

이 글을 쓰기 위해 제가 보고 들은 것들. 1. 제가 십년 넘게 마르고 닳도록 보았던 사라 브라이트먼 주연의 [송 앤 댄스] 비디오. 2. 드니스 반 오튼의 [텔 미 온 어 선데이] CD. 3. 10월 5일 연강홀에 있었던 [텔 미 온 어 선데이]의 공연. (김선영의 첫 번째 무대였죠.) 이 중 제 기준점이 되는 건 1번일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새로 뜯어고친 버전이라고 해도 오리지널의 ‘각인’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본 정보는 다들 아시겠죠. 원래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이 뮤지컬은 마티 웹 주연의 콘서트 뮤지컬이었고 텔레비전 스페셜로 방영되었으며 나중에 로이드 웨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 무용을 붙인 2막과 함께 [송 앤 댄스]라는 뮤지컬로 공연되었다는 것. 21년 뒤 로이드 웨버가 돈 블랙과 함께 가사들을 대폭 뜯어고치고 새 노래들을 추가해 [텔 미 온 어 선데이]라는 뮤지컬을 만들었다는 것. 그것이 또 이 나라로 건너와 내용을 수정하고 대사도 바꾸어 지금 제가 리뷰를 쓰는 공연이 나왔다는 것. 여기에 여러분이 몰라도 상관없는 제 개인적 의견을 추가한다면, 전 [송 앤 댄스]를 [오페라의 유령]이나 [캐츠]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이라고 여기고 사라 브라이트먼도 괜히 필요 이상으로 프리마돈나 흉내를 내는 [오페라의 유령] 때보다 [송 앤 댄스] 때가 훨씬 좋았다고 생각하죠.

이 세 버전은 모두 내용이 조금씩 달라요. 1번은 이미 구시대의 이야기죠. 이메일도 PC도 없는 시대이고 페미니즘에 아직 수많은 ‘포스트’들이 붙지 않았던 1970년대 정도. 분위기만 보면 60년대여도 상관이 없어요. 60년대가 더 그럴싸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2번에선 시대가 확 바뀌었어요. 주인공은 엄마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툭하면 보톡스니 스피드 데이팅이니 지미 추니 러셀 크로우와 같은 21세기 초의 어휘들을 토해내죠. 디테일도 조금 늘었고요. 예를 들어 주인공이 뉴욕에서 만난 첫 번째 남자에겐 타일러 킹이라는 이름이 붙었네요. 직업도 구체적이에요.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에서 일하는군요. 한마디로 모든 게 [섹스 앤 더 시티]화 되었다고 할까요. 전 이게 참 별로네요. 저도 [섹스 앤 더 시티] 에피소드들은 몇 년 동안 하나도 빼놓지 않고 봤고 케리를 제외한 다른 세 캐릭터에겐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21세기를 사는 모든 도회지 여성들의 경험을 몽땅 [섹스 앤 더 시티]화하는 건 지겨운 일이에요.

3번의 내용은 더 과격하게 바뀌었네요. 일단 주인공에게 직업이 생겼어요. 가수라네요. 게다가 이름도 있어요. Denise라고. (보도 자료와 대본엔 데니스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좀 짜증이 나는군요. Denise van Outen을 언급할 때는 그냥 드니스라고 써놓고서.) 반 오튼의 CD와 공식 홈페이지를 암만 뒤져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 나머지 두 남자들에게도 이름이 붙었어요. 스티브와 리처드 콘란이라네요. 이 이름들이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는 저도 모르죠. 가장 큰 차이점은 남자들과의 이야기가 거의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 분명히 원작에서는 단짝 친구에게 2번 남자를 빼앗겼고 3번 남자는 애까지 딸린 유부남이었는데, 한국판에서는 이 모든 게 삭제되었어요. 2번 남자는 그냥 떠나고 3번 남자는 다른 여자랑 결혼하기로 했다나. 3번 버전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보다는 [섹스 앤 더 시티]와 다른 한국 미니 시리즈에 중독되어 있는 한국 시청자들의 정신세계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바뀐 이야기가 좋으냐고요? 전 그냥 구관이 명관이려니 하렵니다. 사실 이 뮤지컬의 이야기는 별 게 아니에요. 뉴욕에 사는 영국 여자가 남자들에게 세 번 차이고는 “그래도 나는 이겨낼래!”라고 외친다는 거죠. 일이 안 풀리는 이유도 뻔하고. 여기서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이 과정들이 주인공에게 다양한 감정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것이죠. 여기에 뭔가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요. 전 구체적인 비행경험을 묘사하거나 캐릭터의 디테일을 달아준 2번이 오히려 이야기의 간결한 기능성을 날려버렸다고 생각해요. 3번 이야기는 더 나쁘죠. 충분히 날이 설 수 있는 이야기가 자기 방어를 하다보니 들쩍지근해졌어요. 이건 정말 아쉬워요. 남자친구를 빼앗아간 친구에게 퍼부어대는 [Let's Talk about You]는 정말로 훌륭한 독설이란 말이에요. 절대로 빼서는 안 되는 것이죠. 게다가 리처드 콘란 에피소드는 정말 연속극 같군요. 하긴 오리지널도 통속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처럼 공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공연이 나빴느냐. 그건 또 아니었단 말이죠. 오히려 다소 메마르고 빈약하게 느껴졌던 드니스 반 오튼의 CD보다는 훨씬 풍성한 무대였어요. 비슷한 스케일의 음악이라도 CD로 듣는 것과 가수가 부르는 걸 직접 보는 건 차이가 있지요. 저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공연 때 뼈저리게 느꼈던 해외 작품의 이식에서 오는 어색함도 이 작품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느껴지죠. 모노드라마이고 대화가 없으니까요. 뭐, 이렇게 할 거라면 차라리 조금 더 과격하게 가사들을 고쳐서 뉴욕의 드니스를 뉴욕의 선영이나 바다로 바꿀 수도 있었을 거예요. 어차피 각색 과정 중 가장 많이 날아간 건 뉴욕의 배경이 아니라 드니스의 영국적인 면들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제가 들쩍지근하다고 투덜거렸던 개사된 노래들도 그럭저럭 정당화될 수 있겠죠.

날카롭고 위트가 넘쳤던 드니스 반 오튼과 애교스럽고 드라마틱한 사라 브라이트먼에 비하면, 김선영은 조금 더 부드럽고 더 나이가 들어 보이죠. 30대 영국인보다는 30대 한국인처럼 행동하고 말하는데, 그건 당연한 거고. 전체적으로 노래와 연기에 약간의 뽕끼가 들어 있다고 할까? 그게 이 뮤지컬의 개사된 노래엔 어울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다른 캐스팅 때는 어땠을지 모르겠군요. 바다의 경우는 원래 가사가 더 맞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전 여전히 [텔 미 온 어 선데이]를 온전한 작품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겠어요. 구닥다리처럼 보인다고 해도 [송 앤 댄스] 쪽이 더 좋죠. [Somewhere, someplace, sometime]이 썩 좋은 노래이긴 해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가 너무나도 익숙한 뮤지컬의 마지막 곡으로 나온다는 게 조금 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원작보다 통일감이 떨어져요. 하지만 이건 중/소극장 공연을 위한 좋은 대안이고 여전히 원작의 많은 부분이 남아있으니 크게 불평할 필요는 없겠죠. 먼 훗날의 관객들에겐 최신유행으로 치장한 [텔 미 온 어 선데이]가 [송 앤 댄스]보다 오히려 더 낡게 느껴지겠지만. (07/10/08)

기타등등

공연 중간에도 들리던 에이컨 소리는 좀 짜증이 나더군요. 가끔 나오는 소중한 침묵을 그렇게 먹어버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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