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뿐인 어린 천사 엘렌 Ellen Foster (1987)

2010.03.17 11:00

DJUNA 조회 수:4314

 Kaye Gibbons (글) 송은경 (옮김)

전에 지나 말론 주연의 홀마크 영화 [엘렌 포스터]에 대한 짧은 리뷰를 쓴 적 있었죠. 몇몇 분들이 케이 기본스의 원작 소설이 번역되어 나와 있다고 하셨길래 온라인 서점을 뒤져봤답니다. [상처뿐인 어린 천사 엘렌]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더군요.

케이 기본즈의 소설은 엘렌 포스터(포스터는 이 아이의 진짜 성이 아니지만 잠시 넘어가기로 합시다)라는 남부 소녀의 1인칭 고백으로 이루어진 소설입니다. 엘렌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암담합니다. 이 아이의 회고담은 다양한 육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의 나열입니다. 법적 보호자들이 한 명씩 죽어갈 때마다 사정이 조금씩 나아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특별히 밝아지지는 않죠. 심지어 엘렌이 그들로부터 어느 정도 승리를 쟁취한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렌은 현재 삶의 밝은 면들을 일부러 강조하면서 과거에 비해 지금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설명하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오히려 이야기의 어두움을 더 강조하는 편입니다.

이걸 다행이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는데, 어린이 학대의 나열이라고 할 수 있는 기둥 줄거리는 소설의 진짜 드라마가 아닙니다. 진짜 드라마는 엘렌의 머리 속에서 일어납니다. "어렸을 때 나는 늘 아빠를 죽이는 방법을 생각해보곤 했다"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한마디로 소설의 성격에 대한 선언입니다. 줄거리 위주의 소설이라면 아빠의 운명이 이야기의 핵심이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엘렌의 아빠가 이미 죽었다는 정보를 밝히고 시작하니까요.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학대가 아니라 그 학대에 대한 주인공 캐릭터의 심리적 대응입니다.

케이 기본스의 소설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부분은 이중의 시제를 이용한 구성입니다. 엘렌은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을 현재형으로 기술하면서 중간 중간에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학대받았던 이전의 삶을 과거형으로 회상합니다. 하지만 아직 과거의 상흔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엘렌의 회고에는 아직 고통의 쓴 맛이 남아 있고 가끔가다 옛 상처가 벌어질 때에는 시제 역시 불안하게 뒤섞입니다. 영화가 밋밋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겠어요. 서술의 묘미가 반을 차지하는 이 소설에서 이야기 자체는 비교적 평면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소설의 기둥 줄거리만 취한 영화가 원작의 매력을 많이 놓친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소설의 이중적인 구성은 두 시간대의 엘렌의 성장을 같은 속도로 기록합니다. 엘렌의 회고담은 학대와 위선의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이야기입니다. 엘렌의 현재 이야기는 이 생존자가 자기 자신도 피해자로 옭아맸던 편견과 무지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성장의 과정은 어떻게 보면 암담한 환경 속에서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한 소녀가 지금까지 박탈당했던 어린 시절을 되찾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해요. 굉장히 오프라적인 이야기지만 (정말로 오프라 선정 소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짧은 여정의 힘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번역서에 대해 몇마디 이야기하죠. 일단 [상처뿐인 어린 천사 엘렌]이라는 번역 제목은 그렇게까지 원작의 분위기와 맞는 편이 아닙니다. 마케팅을 고려한 역제겠지만, 엘렌은 천사 따위와는 거리가 머니까요. 주인공의 이름을 내세운 건조한 원제가 소설의 담담한 스타일과 폭력적인 이야기의 결합을 더 잘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송은경의 번역은 비교적 유려한 편이지만 현대 미국 남부 구어체의 생생한 느낌은 번역 과정 중 어쩔 수 없이 사라집니다. 소설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기탁 부양 가정의 개념을 분명히 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아서 꽤 많은 독자들이 헛갈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0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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