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마린 Aquamarine (1992)

2010.03.20 21:51

DJUNA 조회 수:3039

Carol Anshaw (글), 양은주 (옮김)

(후반부에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출전한 17살의 수영선수 제시 오스틴은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선수 마티 핀치에게 약간의 차이로 져 금메달을 놓칩니다. 다소 건조한 이 사실 뒤에는 남들이 모르는 작은 비밀이 하나 있었으니, 제시가 경쟁자인 마티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거죠.

그 뒤로 22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22년의 '세월들'이 흐르는 거겠죠. 프롤로그가 끝나면 독자들은 세 가지 갈래로 분열된 제시의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1번 삶에서 제시는 고향인 미주리 주의 작은 마을 뉴 예루살렘에서 남편과 함께 관광객들을 위한 동굴을 운영하고 남는 시간에 부동산 중개업자로 일하는 가정주부입니다. 2번 삶에서 제시는 소프 오페라에 출연하는 여자배우와 다소 불안한 관계를 맺고 있는 뉴욕의 영문학 교수입니다. 3번 삶에서 제시는 플로리다의 비너스 비치에 살면서 파산직전인 수영센터와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외로운 이혼녀입니다.

이 세 명의 제시는 모두 같은 사람들입니다. 단지 68년 올림픽 이후 발생한 몇 가지 작은 갈림길에서 각기 다른 선택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죠.

여기서 전 이 작품을 SF로 분류하고 싶은 가벼운 욕망을 느낍니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비잔티움의 첩자]가 SF라면 [아쿠아마린]이 SF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이 소설은 전형적인 대체역사물의 논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단지 스케일이 작을 뿐이죠.

캐럴 앤셔의 이 소설이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다룬 것도 아닙니다. 지금 제가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은 O. 헨리의 단편 [운명의 길]입니다. 이 단편소설에서 작가는 주인공인 프랑스 시인 다비드 미뇨가 갈림길에서 한 세 가지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를 모두 보여주지요.

O. 헨리의 소설과 비교해 보면 캐럴 앤셔의 소설 쪽이 더 SF에 가깝습니다. [운명의 길]은 우울한 운명론적 농담이었습니다. 다비드 미뇨는 세 가지 다른 길을 가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모두 같은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었죠. 그의 운명은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단지 그 결말로 향하는 길이 달랐을 뿐이죠. 하지만 [아쿠아마린]에서 운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설이 보여주는 제시의 세 가지 삶은 모두 의식의 주체가 배제된 물리적인 연쇄반응에 의해 결정되고 확산됩니다.

앤셔의 소설에서 재미있는 건 이 세 가지 이야기가 겹쳐지며 만들어지는 복잡한 화음입니다. 같은 과거와 가족을 공유하고 있는 세 사람의 제시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비슷비슷한 사람들과 마주치고 그들과 상호작용하는데, 그 작용 방식은 당시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면서도 비슷합니다. 세 가지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읽는다면 단순한 에피소드와 설정에 불과하지만 세 편의 이야기를 연달아 읽을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일종의 음악적인 의미가 추가되지요.

종종 이런 관계는 초현실적으로 얽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2번 역사선에서 제시의 연인으로 나오는 소프 오페라 배우 킷은 이야기 끝에서 손을 다치는데, 1번 역사선과 3번 역사선에서도 손을 다쳐 붕대를 감은 채 텔레비전에 등장합니다. 만약 분열된 각각의 평행우주에 한 사람의 제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1번 역사선과 3번 역사선에서 킷은 왜 손을 다친 것일까요? [아쿠아마린]의 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은 완벽하게 격리되지 않습니다. 벽 너머에서 요동치고 다른 가능성의 삶에 그림자를 깔며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죠. 앤셔가 SF 작가였다면 여기에 물리학자 캐릭터라도 한 명 등장시켜 양자론과 확률파와 평행우주에 대한 장황한 연설이라도 시켰을 텐데 말입니다.

[아쿠아마린]에서 중요한 또다른 주제는 성 정체성입니다. 세 역사선이 갈리기 전에 일어나는 이 소설의 도입부에서 제시는 경쟁자인 마티에게 동성애적 감정을 느낍니다. 하지만 1번과 3번 역사선의 제시는 그런 추억을 과거를 묻고 이성애자로서 살아가죠. 단지 2번 역사선의 제시만이 완전한 동성애자입니다.

그렇다면 앤셔는 성정체성을 비교적 유동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걸까요? 이성애자에서 동성애자로 옮겨간 작가 자신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정은 조금 더 복잡해요. 세 명의 제시 중 정서적으로 자유롭고 해방된 삶을 사는 사람은 동성애자인 2번 제시뿐입니다. 이성애자로 살아가는 1번과 3번 제시는 자신이 남편이나 애인을 사랑하는 이성애자라고 굳게 믿으면서도 늘 다른 사람을 찾아 헤매거나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지요. 삶은 상황과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확산될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정서적으로 해방되고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은 비교적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여기서 소설의 주제는 넓어집니다. 꼭 동성애만을 주제로 삼을 필요는 없어요. 세 갈래로 갈라진 [아쿠아마린]의 우주는 결국 제시가 대표하는 20세기 후반의 미국 여성들이 마주치고 상대해야 하는 삶의 조건에 대한 실험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시적인 정의는 아니지만 저한테 기대할 걸 기대하셔야죠. 전 일단 이 작품이 SF라고 주장하고 이야기를 시작했잖아요. :-P (0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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