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북

2010.03.14 21:46

DJUNA 조회 수:3720

문학 장르는 보통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달됩니다. 책은 종이나 천처럼 얇게 처리한 물질 위에 가로나 세로로 글을 쓴 뒤 보관하기 편하게 묶거나 두루마리로 만든 물건입니다. 사용자들은 책을 펼친 뒤 그 위에 쓰여져 있는 글을 눈으로 읽으면서 문학 장르를 섭취합니다.

그러나 문학이 처음부터 이런 과정을 통해 수용자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글이 없었던 시절에도 문학은 존재했고 글이 생긴 뒤에도 많은 사람들은 문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도 문학을 즐겼던 것은 마찬가지였지요.

당시 사람들에게 문학은 음악처럼 청각적인 매체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꾼이나 시인이 전달하는 내용을 귀로 '들었습니다.' 운문이 등장했던 것도 그 자체의 미적 목적 때문이라기 보다는 리듬감을 통해 기억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단순한 시로 읽는 많은 고전 시작품들은 원래 악보까지 따로 붙어 있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되고요.

문제는 청각 매체가 보존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소리를 보존하는 방법을 발명하기 이전엔 목소리는 한 번 입 밖에서 나오면 끝이었습니다. 당연히 종이책처럼 대량으로 찍어 상품화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아마 돈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을 고용해서 대신 읽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서비스가 보편적인 직업이 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사실 저는 레이몽 장의 소설 주인공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 직업을 지킬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녹음 매체가 발명되면서 목소리는 천천히 다시 문학 세계로 돌아왔습니다. 시인들은 자기가 쓴 시를 낭송한 녹음을 남겼고, 시각 장애자들을 위한 녹음된 문학 작품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녹음된 매체들은 특수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녹음 매체가 본격적으로 문학 세계에 재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점점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읽지 않게 된 사람들을 위한 대안으로 오디오북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죠. 오디오북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우길만한 시간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동차 운전을 하거나 조깅을 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CD 시대가 된 지금도 오디오북이 여전히 카세트 테이프라는 매체를 고수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오디오 북의 발전은 카 오디오나 워크맨의 발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디오북은 종이책을 완전히 대신할 수 없습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문학은 종이책이라는 매체를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해왔습니다. 오디오북은 소문자로만 글을 쓰는 e.e. 커밍즈의 시가 가진 단아한 느낌을 전달할 수 없을 겁니다. 타이포그래피를 이용한 정신나간 비주얼을 선사하는 알프레드 베스터의 소설 역시 오디오북으로 넘어가면 느낌이 많이 죽겠지요. 루이스 캐롤이나 아폴리네르처럼 글자들로 그림을 그리는 시인들의 작품들도 오디오북으로 소화할 수는 없습니다. 책 고유의 장점도 아직은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쉽게 '번역'되지 못합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고 철자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고, 책처럼 내용을 대충 확인하며 훌훌 뒤로 넘기기도 쉽지 않아요. 독서 속도를 맘대로 조종하는 것도 어렵고요. 오디오북을 교과서나 사전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웬만한 책 한 권을 읽는 데도 테이프 여덟 개 이상이 날아가니 길이도 상당히 길어지고요. 덕택에 오디오북 세계에서는 축약판이 완전판보다 많습니다.

하지만 오디오북은 종이책이 가지고 있지 않은 여러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스타 시스템의 활용을 들 수 있군요. 제레미 아이언즈가 [롤리타]를 읽거나 케이트 윈슬렛이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읽으면 그들의 팬에겐 책을 '들을' 또다른 동기가 생기는 셈입니다. 토니 모리슨과 같은 작가가 [빌러브드]와 같은 자기 소설을 직접 읽은 오디오북도 비슷한 가치가 있을 것이고요. 종종 이들은 소설을 각색한 영화의 선전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아이언즈와 윈슬렛은 모두 그 소설의 영화 버전에 출연한 사람들이지요.

종이책을 보완하는 다른 장점들도 있습니다. 문학이 아무리 문자 매체라고 해도 대부분 자기만의 목소리를 숨기고 있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제인 오스틴은 영국식 중상류 사회 구성원들이 사용하는 정중하고 미묘한 억양을 글자들 사이에 숨겨놓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학교에서 배운 미국식 영어로 오스틴의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오스틴의 캐릭터들은 결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오스틴 소설의 디테일을 상당히 놓치게 되는 셈입니다.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들은 모두 특유의 연기 테크닉을 가진 전문가들의 낭송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이 작품들의 진짜 가치를 알려면 리듬을 타고 낭송하는 방법을 아는 전문적인 배우들이 대사를 읊는 걸 일단 들어봐야 합니다. 우리같은 외국인 독자들에게는 고유 명사나 고어, 외국어 단어의 정확한 발음을 확인하는 방법이 되어주기도 하죠.

작가 자신이 책을 읽는 경우, 작품의 해석에도 도움이 됩니다. 작품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직접 책을 읽었으니 종이책에서는 오해하거나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는 여러 문장들이 오디오 북에서는 자기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책읽기는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입니다. 음표로 기록된 음악이 직접 연주되거나 불려지면서 새로운 모습을 찾는 것처럼 글자로 기록된 문학도 낭송되는 과정을 통해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낭송자가 작품을 망칠 수도 있지만 원작을 능가하는 새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지금까지 영어권, 적어도 유럽 문화권의 오디오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아직 우리나라에는 일반 '청취자들'을 위한 오디오북 시장은 거의 없습니다. 시각 장애자들을 위한 녹음은 계속 진행되고 있고 EBS와 같은 방송국에서 문학 낭송을 방송하기도 하며 가끔 시낭송 테이프나 CD가 나오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오디오북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사실 개념도 잡혀 있지 않은 듯 해요. 아직도 꽤 많은 사람들이 해리 포터 오디오북을 사가지고 갔다가 돌아와서 텍스트가 없다고 서점에 항의를 한다니까요.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 모르겠군요. 종종 서구 언어보다 우리 말이 글자에서 목소리로 옮겨지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여성 언어와 남성 언어가 꽤 분명한 우리 언어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의 대사를 읽으면 종종 이상해집니다. 문어체와 구어체의 문장들이 겹칠 때 생기는 이질감 역시 아주 무시할 수는 없고요. 괄호 안의 문장들을 연결해 자연스럽게 읽는 방법도 아직은 없는 듯 하군요. 한자어와 한문을 처리하는 것도 힘듭니다. 복잡한 한자어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며 읽는 것은 특히 어렵죠.

그러나 이 모든 건 자잘한 문제들입니다. 앞으로 또 몇 년이 지나면 오디오북도 새로운 유행이 되어 우리 출판계의 한 부분이 될 지도 모릅니다. 아마 미래에 새로 발명될지도 모르는 녹음 재생 매체가 이런 유행을 뒷받침해 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워크맨이나 카오디오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런 종류의 사업은 기술의 발전과 속도를 같이 하는 법이니까요. (0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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