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위의 미레트 Mirette on the High Wire (1992)

2010.03.17 11:06

DJUNA 조회 수:5119

Emily Arnold McCully (글/그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에밀리 아놀드 맥컬리의 칼데콧 상 수상작 [줄 위의 미레트]의 무대는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입니다. 정확히 말해 파리의 잉글리시 거리에 있는 작은 하숙집이지요. 마담 가토라는 과부가 운영하는 이 하숙집은 세계 곳곳에서 온 무대 연예인들의 안식처입니다. 대충 드가나 툴루즈-로트렉이 그렸을 법한 도회지 연예인들이 바글거리는 작은 건물을 생각해보세요. 마담 가토의 하숙집은 그런 곳입니다.

무슈 벨리니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하숙집에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줄타기 곡예사인 그가 마당에서 연습하는 걸 본 마담 가토의 딸 미레트는 서서히 줄타기에 대한 갈망을 품게 됩니다. 벨리니 몰래 줄 위에서 연습을 시작한 미레트는 서서히 곡예사의 재능을 인정받게 되고, 결국 벨리니의 제자가 되죠. 하지만 벨리니에게는 미레트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하나 있었답니다...

[줄 위의 미레트]의 두 주인공 미레트와 무슈 벨리니는 어떻게 보면 삶의 양극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미레트는 막 깨달은 자신의 재능을 피우기 위해 안달이 된 어린 소녀이고, 무슈 벨리니는 젊은 혈기와 재능을 무기 삼아 전세계를 누비다가 갑작스럽게 덮친 공포 때문에 중간에 주저앉아 버리고 만 어른입니다. 맥컬리는 이 두 사람이 줄타기라는 곡예를 통해 서로의 문을 열어주는 과정을 간결하기만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곡예 도중 얼어붙은 무슈 벨리니를 돕기 위해 미레트가 첫번째 공중 곡예를 시도하는 장면에서 절정을 맞습니다.

에밀리 아놀드 맥컬리의 수채화는 얼핏보기에 무척 안전하고 무개성적으로 보이지만 생각 외로 교묘하게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예술사 전공자답게, 맥컬리는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를 묘사하기 위해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법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합니다. 특히 위에 언급한 드가와 툴루즈-로트렉의 영향이 가장 커요. 사람들 위로 섬세하게 드리운 회색 그림자는 드가에게서, 밝은 색조의 화사한 느낌은 로트렉에서 빌려온 셈이겠죠. 그러면서도 맥컬리는 어린 독자들을 위해 그림책다운 경쾌한 액션들로 책을 채우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맥컬리가 재창조해낸 옛 파리의 전경은 무척 매력적이고, 간결한 텍스트를 보완하는 디테일을 담뿍 안고 있습니다.

맥컬리는 미레트와 벨리니를 주인공으로 한 두 편의 그림책 속편을 더 냈습니다. [Starring Mirette & Bellini]와 [Mirette & Bellini Cross Niagara Falls]가 그 작품들인데요, 전작만큼의 평은 받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0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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