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문학

2010.03.20 21:16

DJUNA 조회 수:4292

제가 이 글을 위해 받은 주제는 '장르문학이란 무엇인가, 장르문학과 순수문학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입니다. 제가 집중할 주제는 두 번째지만 거기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찾으려면 첫 번째도 어느 정도 건드리긴 해야 하지만요.

우선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최근 이런 경향을 유행시킨 작가는 움베르토 에코입니다. 그는 첫 장편인 [장미의 이름] 이후 꾸준히 장르문학적인 도구들을 사용한 작품들을 내놓았고 '순수문학'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지식소설이라는 딱지를 달고 나온 장르 소설들은 모두 그의 영향 아래 놓여 있죠. 장르의 도구를 빌린 수많은 순수소설들이 등장하고 소개된 것도 그의 영향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에코가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게 아닙니다. 그는 그런 걸 허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경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적어도 여러분이 픽션을 쓰는 작가라면 순수문학이나 장르문학 중 하나를 골라 가입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SF나 판타지처럼 팬덤의 존재가 중요한 장르라면 같은 장르 안의 작가들이나 독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세계에 속해있지 않다고 해서 장르소설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중요한 건 그가 작가들이 아닌 독자들에게 하나의 관점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걸 가리지 않는 게 쿨한 태도라고 말했던 거죠.

사실 추리 소설이니 SF소설이니 하는 것들의 게토가 형성된 건 오래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19세기말에서부터 20세기 초죠. 이 게토가 순수성을 유지하며 영원히 남아있을 가능성도 높지 않습니다. 장르문학이란 절대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시대 상황과 출판 사업이 적절한 선에서 타협한 결과지요. 이들은 엄밀한 문학적 구분은 아닙니다. 질적인 구분은 더더욱 아니고요. 요새 독자들이 이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걸 흥미로워하는 건 아직도 이들을 구분하는 데 '문학성'과 '질'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관찰은 아주 틀리지는 않습니다. 제가 언급한 이 두 장르는 전성기인 20세기에 일종의 공장생산품으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장르는 수십 개의 필명을 가지고 피아노 치듯 타이프라이터를 때려대며 일주일에 한 편씩 장편을 써대는 작가들로 가득했죠. 그에 비하면 '순수문학'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수공업품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작업환경에서 전혀 다른 구미를 가진 고객들을 위해 글이 만들어졌으니 '문학성'과 '질'의 차이가 생긴 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아닌 문학적 형식 자체만 본다면 이들이 순수문학에서부터 억지로 구별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출판사가 장르문학을 가르기 전부터 장르문학은 존재했고 그들은 모두 명망높은 '순수문학가'들의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19세기는 장르문학의 용광로였습니다. 에드가 앨런 포, 찰스 디킨스, 윌키 콜린즈, 허버트 조지 웰즈, 오노레 드 발작, 빌리에 드 릴라당, 마크 트웨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모두 훌륭한 추리, SF, 판타지들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들에서 그런 장르물들을 가려내는 게 얼마나 따분하고 무의미한 일인지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건 시간낭비입니다.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만들어진 뒤에 생긴 일들은 조금 더 재미있습니다. 양쪽 진영의 작가들이 장르에 대해 독자들이 품고 있는 고정관념과 싸워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장르의 경계선이 그들을 막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와 조지 오웰은 이 경계선이 가장 뚜렷하던 20세기 초중엽에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SF 소설들을 썼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에 장르물에서 경력을 시작한 대실 해미트와 레이몬드 챈들러와 같은 추리작가들은 순수문학 독자들에게도 어렵지 않게 접근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보르헤스가 소개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한 20세기 후반엔 더욱 강해졌습니다. 존 바드, 토머스 핀천, J. G. 발라드, 브라이언 올디스, 어슐러 르 귄, 도로시 레싱,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 사이에서 경계선을 찾는 건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걸 '요새'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참여한 작가들이 너무 많아요.

어느 정도 의미 있는 분석이 가능한 대상은 오히려 반대쪽에 있습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많은 장르 작가들이 장르의 경계선 주변에서 맴돌거나 거기에서 벗어난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발라드나 올디스와 같은 작가들이 속해있는 뉴웨이브 작가들이 대표적인 예죠. 추리문학엔 존 르 카레, 로스 맥도널드와 같은 작가들이 있었고요.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의도는 순수합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장르의 문학적 가능성을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아니면 장르 독자들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문학적 야심이 컸거나요.

하지만 여기엔 또 다른 변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순수한 장르물들은 그렇게 잘 팔리지 않습니다. 추리물이나 SF는 여전히 게토 문학입니다. 읽는 사람들만 집중적으로 읽죠. 그렇다면 좋은 작가들을 보다 잘 팔아먹기 위해 출판사는 간단한 속임수를 씁니다. 그 작가들의 작품이 특정 장르에 속해있지 않다고 우기면서 마케팅을 벌이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가 마이클 크라이튼입니다. 크라이튼의 성공은 이 작가의 작품을 게토에서 끌어내 크라이튼이라는 이름의 독립된 상표를 만들어낸 출판사의 마케팅에 있는 것입니다.

최근 유행하는 지식소설들 역시 같은 마케팅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사람들이 장르물에서 기대할만한 재미를 갖추면서 고급스러움과 체면을 잃지 않는 책을 만들어 보다 넓은 독자층에 호소하려는 것입니다. 이들 대부분이 과거에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게 더 고급스러워 보이니까요. 물론 이들 작품들의 문학적 성과는 작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체적인 유행에서 출판사 마케팅의 비중을 무시한다면 그 분석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겁니다. (0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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