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캐릭터의 죽음

2010.03.16 23:45

DJUNA 조회 수:1785

[버피] 6시즌을 실시간으로 따라가는 시청자들은 최근 들어 피가 마르는 듯한 경험을 하고 있을 겁니다. 특히 윌로우/타라 쉬퍼나 버피/스파이크 쉬퍼들은요. 제19화에서 타라는 총에 맞아 죽었고 스파이크는 등을 다친 버피를 거의 겁탈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죠. 앞으로 6시즌은 3회가 더 남았는데, 그 동안 일이 어떻게 마무리지어진다고 해도 이들의 망가진 가슴은 쉽게 치유될 것 같지 않군요. 적어도 [버피] 관련 게시판은 거의 전쟁터 분위기입니다. 이들에게 거의 신 대접을 받았던 크리에이터 조스 위든도 요샌 신성을 박탈당한 듯 합니다.

그런데 웃기지 않습니까? 이들은 텔레비전 시리즈의 주인공들입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죠. 우리가 보고 관심을 쏟는 인물들은 모두 그 캐릭터들과 아무 상관없는 배우들이 각본을 보고 따라 한 연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시청자들은 실제 가족이나 친척들보다 이들의 운명에 훨씬 신경을 씁니다. 아무래도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아마 친척 한 명이 죽는다고 해도 좋아하는 텔레비전 캐릭터 하나가 죽는 것보다 덜 충격적일테니까 말이에요.

왜 그럴까요? 여기에 대해 그렇게 냉소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잖아요. 여러분은 일년에 친척들을 몇 번이나 만납니까? 가까운 데 살지 않으면 큰 명절에 만나고 끝일 겁니다. 하지만 텔레비전 주인공들은 일주일에 한 번 씩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친척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예의 차리는 적당한 선에서 끝나죠. 하지만 우린 텔레비전 시리즈의 주인공들을 뱃속까지 뚫어보고 있습니다. 실연했을 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왜 결혼을 했는지, 심지어는 무슨 속옷을 입는지까지도요. 우리가 잘 알고 자주 보는 사람들에게 신경이 더 쓰이는 건 당연하죠.

텔레비전은 영화와도 다릅니다. 우린 영화 주인공의 비극적 결말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그건 일회성의 거창한 오락이니까요. 하지만 텔레비전은 우리의 일상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린 영화 스크린의 줄리아 로버츠나 댄젤 워싱턴을 살짝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거창한 대상들로 여기지만 텔레비전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친구나 이웃으로 받아들입니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텔레비전 시리즈가 시즌별로 이어지는 곳이라면 사정은 더합니다. 예를 들어 시청자들은 얼마 전에 극중에서 작고한 [ER] 캐릭터 고 마크 그린을 8년 동안이나 알고 지내왔지요. 어떻게 8년 동안 뱃속까지 뚫어보고 지내온 사람이 죽는다는 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그 사람이 텔레비전 세계에서만 존재한다는 게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됩니까?

종종 사람들은 말합니다. 텔레비전 앞에 붙어 있지만 말고 밖에 나가서 3차원 사람들을 만나라고요. 네, 맞는 말입니다. 진짜 인간들과 나누는 인간적 교류는 텔레비전에 달라붙어 있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그건 과연 텔레비전 연속극의 캐릭터들과 사건들에 매달리며 신경을 쓰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텔레비전 세계의 연인들의 이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건전하고 풍성한 감정의 소유자라는 증거일 뿐, 여러분이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이라는 증거까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반응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실제 세계에서도 메마른 경우가 많죠. 실제 세계에서나 가상 세계에서나 감정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먹고사는 것이죠. [라보엠]을 보면서도 “저건 뚱뚱한 이탈리아 가수들이 배고픈 파리 보헤미안들을 흉내내는 가짜 쇼야”라고 생각하며 계속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어떻게 푸치니의 오페라를 제대로 즐길 수 있겠어요?

물론 현실감각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없다는 건 여러분이 정말로 현실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도 되지 않습니다. 어디에나 넘어서면 위험한 선이 존재하는 법이고 텔레비전과 현실 세계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죠. 그러나 그건 개별 상황에 맞게 조절할 문제이지 우리가 당연하게 일반화할 문제는 아닙니다. (0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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