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대기 The Martian Chronicles (1950)

2010.03.17 00:23

DJUNA 조회 수:3515

Ray Bradbury (글)

내용상 연결되는 일련의 단편들을 묶어 만든 장편을 지칭하는 픽스 업 소설은 SF 장르의 발명품입니다. 맨 처음 이 표현을 쓴 사람은 황금 시대의 SF 작가인 A.E. 반 보이트로, 그의 대표작 [스페이스 비글 Voyage of the Space Beagle] 역시 네 편의 단편들을 묶은 픽스 업 소설이지요. 이런 형식은 잡지의 영향력이 강했던 SF 장르 고유의 특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 아직까지 다른 장르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레이 브래드베리의 장편 [화성 연대기] 역시 픽스 업 소설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작품은 40년대 후반에 브래드베리가 여러 잡지들에 발표한 일련의 화성 관련 단편들을 묶은 것입니다. 연대기 순으로 발표되지도 않았어요. 예를 들어 이 작품의 가장 마지막 장인 [The Million-Year Picnic]은 사실 가장 처음 발표된 단편입니다.

'여러 잡지들'이라고 했는데, 이 잡지들 중 존 W. 캠벨 주니어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운영되는 SF 잡지들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밝혀두어야 하겠군요. 레이 브래드베리의 단편들은 결코 캠벨의 패거리들이 'SF'로 인정할만한 작품들이 아니었습니다. 브래드베리는 그들이 구분하는 'SF 작가'가 되기엔 과학에 대한 관심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브래드베리는 똑똑한 남자였으니, 배우려면 못 배울 것도 없었을 겁니다. 문제는 그가 SF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가 그의 환상문학적 기질에 맞았기 때문이지, 아시모프나 클라크처럼 그의 상상력이 자연과학적 기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브래드베리의 소설들은 SF의 장식을 살짝 뒤집어 쓴 판타지였습니다.

요새는 이런 접근법이 그렇게까지 신기하지는 않습니다. 장르가 발전할수록 경계선에 선 작품들도 늘어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브래드베리가 이 작품을 썼던 1940년대에, 그의 이런 접근법은 도전적이었으며 거의 전위적이기까지 했습니다. 브래드베리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가지가지지만, 그가 장르의 폭을 넓힌 공헌자라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슬슬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죠. 화성 연대기는 20세기 말에서부터 21세기 중반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지구인들이 화성을 정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일련의 화성 탐사 계획은 화성인들의 다양한 역습으로 실패로 돌아가지만 결국 화성인들은 지구의 전염병에 의해 몰살하고 말아요. 텅빈 화성의 폐허는 곧 지구인들에 의해 점령되고, 지구인들은 그들이 지구에서 저질렀던 실수들을 화성에서 반복하기 시작합니다.

[화성 연대기]의 화성과 실제로 존재하는 우리 태양계의 4번째 행성 사이에는 피상적인 유사점밖에 없습니다. 그건 이 소설이 쓰여진 1940년대의 천문학적 지식의 한계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브래드베리는 뻔뻔스럽게도 그때까지 알려진 과학 지식을 싹 무시한 뒤, 그만의 화성을 재창조했습니다. 그의 화성은 이상할 정도로 미국 서부 사막과 비슷하고, 지구인의 화성 탐사 과정도 미국 백인들의 서부 개척사와 비슷합니다. 물론 화성인들을 미국 원주민에 대한 은유로 볼 수도 있겠지요. 작품 속의 우주선들은 낡아빠진 꽃불 폭죽과도 같고, 우주여행자들은 이국적인 섬에 도착한 백인 선원들처럼 행동하는 데다가, 핫도그 가판대와 자잘한 가게들이 나란히 늘어선 화성 식민지의 풍경은 노먼 로크웰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브래드베리의 화성은 배경으로 무척이나 미국적이면서도 은근히 복고적인 매력이 가득 찬 환상 세계였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의도적 복고풍 때문에 [화성 연대기]라는 소설은 덜 낡아보입니다. 당시 최첨단과학 지식을 내세웠던 캠벨식 순수 SF 소설들도 지금 와서 보면 구식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런 복고풍의 매력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며 이용했던 브래드베리쪽이 어떤 편에선 유리했던 셈이죠. 가정용 로켓이나 냉전 시대의 핵전쟁처럼 세월이 흘러 낡아버린 SF적 도구들도 의식적인 복고풍에 섞여 그렇게 튀어보이지 않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레이 브래드베리의 이 소설이 반 세기 전의 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화성 연대기]에서 낡은 건 과학 지식이 아니라 예술적 접근법이었습니다. 현대 독자들에게 브래드베리의 이 고전은 지나치게 순진하고 감상적이며 종종 얄팍하게 느껴집니다. 브래드베리에게 명성을 안겨준 그의 시적인 문장들도 요새 와서는 지나치게 장식적으로 흘러간 것처럼 보여요. 남녀 관계나 인종 문제에 대한 그의 낡아빠진 관점도 상당히 불편합니다. 가끔 그는 스토리를 끌어가기 위해 기초적인 인간 행동도 무시해버립니다. 지구에서 핵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화성 이민자들이 참전하기 위해 지구로 돌아가는 [The Luggage Store]의 설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나 이런 단점들을 잊고 본다면 [화성 연대기]는 여전히 흥미로운 '단편집'입니다. 어떤 때는 유럽 메르헨처럼 마술적이고 ([The Martian]), 어떤 때는 문학적 인용으로 가득 찬 익살극이고 ([Usher II]), 어떤 때는 버려진 폐허를 배경으로 한 서글픈 도덕극이며 ([And the Moon Be Still as Bright]), 어떤 때는 종교적 에피파니이기도 합니다 ([Night Meeting]). 대부분이 쉽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고요. [The Off Season]에 나오는 화성의 모래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 시각적 강렬함 때문에 종종 브래드베리의 이 작품은 할리우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미 이 작품을 각색한 록 허드슨 주연의 미니 시리즈가 나온 적 있지요. 프랭크 다라본트가 이 작품을 다시 각색한다는 소문도 들립니다. 브래드베리는 극장용 영화로 나올 거라고 하지만, 다라본트는 미니 시리즈를 생각하고 있다더군요. 후자 쪽이 더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은 듯 합니다. (02/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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