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ako Hirai (그림)

[Christie: 25 pictures from Agatha Christie's Mysteries]는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인 히라이 다카코가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들의 커버용으로 그린 일러스트들을 모은 책입니다. 제목 그대로 25편의 커버 그림들이 실려 있지요.

크리스티 소설의 커버 그림들이라고 해서 에르퀼 프와로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시길. [목사관의 살인] 그림에 미스 마플의 얼굴이 그려져 있긴 하지만 그 뿐입니다. 히라이 다카코는 구체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대신 전체적인 작품의 컨셉과 분위기를 표현하는 쪽을 택합니다.

커버에 실려 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목사관의 살인]은 그래도 내용에 대한 정통적인 해석입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묘사된 건 분명 고급 열차의 식당칸이니까 배경과 맞고 [목사관의 살인]은 주인공 명탐정을 소개하고 있으니까요. 몇몇은 제목을 노골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ABC 살인사건]의 그림엔 쾡한 눈의 깡마른 사람들이 장식으로 달린 커다란 A,B,C 알파벳 글자들이 누런 호수와 같은 배경에 떠 있고 그 주변을 작은 용이 날아다닙니다. [빅 4]의 그림에는 중국식으로 장식된 황금색 4자가 그려져 있고요.

그러나 대부분의 그림들은 보다 추상적입니다. [수수께끼의 할리퀸]의 표지에는 체스판 위에 올려놓은 식당종 주변을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주인공들이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3막의 비극] 역시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주인공들을 거대한 흰색 가면 주변에 배치해놓고 있고요. [파커 파인 사건집]에는 사람들과 건물들이 들어 있는 서류장을 그려져 있고, [골프장 살인사건]에서는 나무가지들이 그려놓은 빈 공간이 해골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는 떠나가는 중년남자를 뒤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어요.

전체적으로 히라이 다카코의 그림들은 섬세하고 화사하며 약간의 냉정한 풍자가 섞여져 있습니다. 이 사람의 그림들에서 인물들은 그렇게 큰 위치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추상적인 가면극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런 면에서 히라이 다카코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과 정통파 영국 추리소설들에 대한 독자들의 심상을 완벽하게 잡아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이야기들은 호사스러운 영국 대저택을 배경 삼아 펼치는 연출된 거짓말과 비틀린 시공간의 추상적 게임이니까 말입니다.

이 책의 그림들이 '영국풍의 일본색'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도 지적해야겠군요. 실제로 자신이 소유한 적 없는 호사스러운 과거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 사람의 그림과 에드워드 고리의 작품들 사이엔 강한 유사점이 있습니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히라이 다카코의 유령들은 툭하면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에드워드 고리의 여자 주인공들과 사촌 사이쯤 될 겁니다.

[Christie: 25 pictures from Agatha Christie's Mysteries]는 예쁘고 유쾌한 책입니다. 하지만 길쭉한 그림들이 늘 3분의 1지점에서 접히는 정사각형의 북디자인은 조금 불만이군요. (0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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