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2010.03.05 09:47

DJUNA 조회 수:1822

시간의 화살은 늘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갑니다. 깨진 컵이 다시 뛰어 올라와 허공 중에서 달라붙은 일은 (거의) 불가능하고, 우주는 늘 팽창하며, [유년기의 종말]의 주인공이 아닌 바에야 과거 대신 미래를 기억하는 일은 없습니다.

시간의 짜증나는 일방성 덕택에 우리는 늘 과거의 노예입니다. 우리는 늘 순식간에 과거로 넘어가는 현대의 찰나 속에서 살고 있기에 과거는 늘 큰 짐입니다. 과거는 이미 사라졌지만 늘 지겨운 흔적을 남기며 우리를 괴롭힙니다.

가장 고약한 것이 기억입니다. 뇌세포에 새겨진 이 전기 정보는 우리의 존재를 정의합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우린 이것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기억을 피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아닙니다.

수많은 기억 상실증 영화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롱키스 굿나잇]의 피에 굶주린 첩보원 찰리 볼티모어와 얌전한 유치원 교사인 사만다 케인은 같은 몸을 쓰고 있지만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왜? 기억 상실증이 찰리의 기억을 날려 버렸으니까요. 찰리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이상 사만다 케인은 찰리로부터 자유롭습니다.

SF 영화에서 이 모든 것들은 조금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흔적으로서의 기억을 조작해낼 수 있습니다. [블레이드 런너]의 리플리컨트들은 덕택에 아주 괴상한 존재가 됩니다. 그들은 공장 생산된 기계지만 뇌 속에는 수십 년의 가짜 기억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 기억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에게 그 기억은 여전히 소중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존재한 적 없는 과거에서 날아온 시간 여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은 순수하게 전자기적인 형태의 정보로만 남지 않습니다. [블레이드 런너]의 리플리컨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가족 사진이 있습니다. 조작된 가짜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목숨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롱키스 굿나잇]에서 사만다와 찰리를 연결하는 것은 그녀 자신의 육체입니다. 뇌는 찰리의 기억을 잊고 있지만, 그녀의 육체는 아직도 찰리를 기억합니다. 찰리가 자신의 육체에 남긴 수많은 흉터들은 그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녀의 육체는 사만다의 명령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찰리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갑자기 터져 나오는 순간 뇌 속의 기억도 터져 나오는 것이죠.

리플리컨트나 사만다 만큼 극적은 아니더라도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도 늘 비슷한 흔적을 남기며 걸어갑니다. 흔적은 어떻게 보면 4차원적입니다. 3차원 공간에 새겨진 물리적 존재지만 과거에 걸쳐 나 있지요. 감이 안 잡히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 물어 보세요. 그들은 아직도 손목에 새겨진 문신을 치를 떨며 바라볼 겁니다.

[프리퀀시]는 그런 흔적을 유쾌한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마추어 무선 통신으로 30년 전 아버지와 통화를 합니다. 통화를 하는 동안 그는 과거를 조금씩 바꾸어 갑니다. 흔적은 여기서 재미있는 의사 소통의 도구가 됩니다. 아버지가 30년 전에 담뱃불로 책상을 지지면 현대의 책상에 바로 그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들의 경고로 목숨을 건진 아버지는 책상 위에 '나는 아직 살아있다'라는 메시지를 새깁니다. 그리고 바로 그 메시지는 바로 그 순간 아들의 책상 위에 '낡은 흔적'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말이 되냐고요?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흔적은 단순히 물리적인 존재만은 아닙니다. 제대로 된 탐정의 눈에 들어가면 그들은 수다스러운 증인이 됩니다. [양들의 침묵]에서 발견된 시체는 이미 죽은 상태에서도 관객들과 클라리스에게 증언을 합니다. 노골적인 증거에는 꼭 탐정의 눈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버펄로 빌의 마지막 희생자는 그녀가 갇힌 우물에서 부러진 손톱의 흔적을 발견하고 절규합니다. 얼마나 끔찍한 생각이 그 사람 머리 속에서 빙빙 돌았을까요?

[레베카]를 보죠. 우리의 이름 없는 주인공은 돈 많고 잘생긴 중년 남자와 결혼해서 그의 삐까뻔쩍한 맨덜레이 저택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는 운 나쁘게도 이 저택에는 아직까지도 그 남자의 전처인 레베카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레베카가 읽던 책, 레베카의 쿠션, 레베카가 좋아하던 강아지, 레베카의 속옷... 레베카는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우린 그 누구보다도 레베카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낍니다.

흔적은 꼭 물리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콘택트]에서 외계인들은 그들이 받은 히틀러의 연설을 메시지의 커버로 사용해 보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텔레비전 방송은 모두 외계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핵전쟁으로 죽어 없어진다고 해도 왈가닥 루시의 흔적은 영원히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지요. 그것은 우리가 전 우주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진짜 흔적입니다.

사실 유령 영화들은 모두 과거의 흔적에 대한 영화들입니다! [여고 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보죠. 효신이 자살한 직후, 민아는 우유팩을 들고 달려오는 효신의 모습을 봅니다. 나중에야 관객들은 예전에 효신이 나중에 우유팩을 들고 시은의 교실에 들어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민아가 본 효신의 모습은 학교 어딘가에 새겨진 효신의 이미지입니다.

[더 헌팅 (얀 드봉의 리메이크 버전 말고 와이즈의 오리지널 말입니다)]에 등장하는 귀신들린 저택 역시 그런 흔적을 초자연적인 공간에 새겨놓은 집입니다. 이 영화에는 구체적인 괴물들이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해독되지 못한 암호와 같은 불길한 초자연적 흔적들로 집을 가득 채웁니다. 귀신들의 웃음소리, 숨쉬는 문, 휘청거리는 나선 계단은 수십 년 동안 집에 하나하나 새겨진 상처들입니다. 이 저택에 머물던 사람들은 모두 어쩌다보니 조금씩 그 상처에 말려들고 결국 집에 또 다른 상처를 새깁니다. 아마 그 집에 나중에 들어간 사람은 줄리 해리스와 클레어 블룸의 흔적을 발견할 것입니다.

물리적이 아니라고 해서 꼭 초자연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브링 잇 온]의 주인공들은 조금 다른 흔적으로 고통받습니다. 다른 팀의 루틴을 표절한 단장은 오래 전에 대학으로 떠나가 버렸지만, 그 죄는 여전히 화상 흔적처럼 토로스 치어리더 팀에 박혀 있습니다. 주인공 치어리더 토랜스에게 부여된 임무는 이 화상 흔적을 어떻게든 지워 없애는 것입니다. 토랜스의 최종 해결책은? 용서를 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시시하다고요? 그렇다면 더 나은 해결책이 있는지요?

[브링 잇 온]은 그래도 편하게 일이 풀린 영화입니다. 죄란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주인공 누들즈에게 물어보세요. 일이 더 고약해진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흔적을 새겨주기도 합니다. [진홍글자]의 주인공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붙은 A자처럼. 게다가 그 사람에게는 살아있는 A자라고 할 수 있는 사생아 딸까지 붙어 있잖아요?

[진홍글자]보다 더 지우기 힘든 시간의 흔적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영화 필름 자체에 남은 시간의 흔적이겠죠. 지금도 수많은 필름들이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와 같은 영화들은 이제 복원이 불가능하다는군요. 비교적 최근 영화인 [스타 워즈]만 해도 새로 복원된 필름은 예전만 못합니다.

디지털 영화가 필름을 대체하면 이런 흔적들은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낡은 필름이 주는 로맨틱한 여운이 주는 멋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낡은 필름의 지직거리는 느낌이 없었다면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낡은 키스신들은 그렇게까지 아름답지 않았을테니까요. (0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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