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민아가 등장했습니다. 담 뒤에서 가방을 집어던지고 개구멍을 통해 기어들어오는군요. 상징적이라면 상징적인 장면이겠지요. 얘는 등장부터 침입자란 말이에요.

중간에 마주친 국어교사 고형석에게 인사를 하고 수돗가에서 손을 씻던 민아는 붉은 색의 일기장을 발견합니다. 호기심에 슬쩍 펴본 민아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어요. "첫 키스는 사과향기같은 거라구? 난 피냄새를 맡았어. 혀 끝에 닿는 네 입술의 피..."

듀나 그리고 효신과 시은의 키스 장면이 잠시 삽입되죠. 일기장을 펼치는 것만으로 민아는 지금까지는 관심도 없었던 두 사람의 과거로 뛰어듭니다. 일기장은 참 편리한 시간여행 도구가 아닌가요? 지나간 시간의 편린들과 그 시간에 얽혀있는 죽은 감정들이 종이장마다 고정되어 있는 거예요.

파프리카 민아는 픽 하고 웃은 뒤 일기장을 수돗가에 내려놓았다가 교실로 가는 동안 다시 그걸 가져갑니다. 일기장에 대한 민아의 관심은 아직 나비 날개짓처럼 가볍고 변덕스럽습니다.

듀나 민아반 교실입니다. 지원이 연안이 중창단 연습용으로 가져온 캠코더로 학생들을 찍으며 짤막한 주석들을 달고 있습니다. ("니네 밤일 나가냐?" "아침부터 학생들이 떡칠하고 있는 현장에 와 있습니다." 어쩌구 저쩌구...) 아이들 중엔 수조의 거북이를 바라보는 평범한 외모의 학생이 섞여 있는데, 이 친구는 이 영화의 팬들 사이에서 '거북소녀'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고 있는 수영입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연출된 듯 굳어보이기도 합니다. 카메라 앞에서 떠들어대야 하는 상황이니 아이들이 어느 정도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지만, 초반에 등장인물들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이런 장면을 사용하는 건 여전히 조금은 인위적으로 보이잖아요. 그러나 아이들의 대사들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조금은 지나치게 잘 선정된 듯 보이긴 하지만요) 우리의 삼총사인 지원, 연안, 민아의 성격은 경제적이고 효과적으로 소개됩니다.

파프리카 육상부실입니다. 시은의 휴대 전화에 "생일 축하해"라는 메시지가 찍힙니다.

뒤에서는 육상부 선수들이 코치의 비행에 대해 떠들고 있습니다. 원래는 코치와 관련된 조금 길고 상세한 스토리 라인이 있었지만 대부분 삭제되었지요. 이 스토리 라인에서 육상부 선수들은 코치의 비행을 고발하는 편지를 써서 시은을 통해 교감에게 전달하려 합니다. 코치에게 별다른 악감정이 없던 시은은 한동안 망설인 뒤 교장실에 편지를 밀어넣다가 그만 교감과 마주치게 되지요. 이 때문에 학생들의 고발은 들통나고 시은은 코치와 학생들 모두에게 욕을 먹는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시은이 이런 식의 정치적 실력 행사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그 때문에 양쪽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캐릭터라는 건 중요합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따돌림은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거든요. 효신은 자발적으로 그런 격리된 삶을 선택한 아이이고, 시은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입장에 말려드는 아이라는 게 다르지만요.

듀나 만류하는 연안을 무시하고 지원은 계속 몰래 카메라를 찍고 있습니다. 지원의 목표는 맞은 편 남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고형석이지요. 여기서는 두 가지만 읽으면 됩니다. 여자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남자 선생들에게 품을만한 가벼운 짝사랑의 감정들과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들을 몰래 카메라와 성적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뻔뻔스러움.

파프리카 '요새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신기해하는 시선이 조금 느껴지기도 하네요.

듀나 실제로 '요새 아이들'을 신기해하며 바라보는 '어른들'이 만든 영화니까요. 이런 시선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고 또 그런 걸 아주 지울 필요도 없겠지요. 사실 이 영화의 정확한 인류학적 기술의 상당부분은 외부인의 시점에서 나오거든요.

파프리카 다시 민아반 교실. 민아는 일기장을 몰래 훔쳐 읽고 있습니다. 효신과 시은이 같이 찍은 사진, 달리는 시은을 그린 만화, 레터링, 빽빽하게 가득 찬 스티커 사진들... 관객들은 이를 통해 처음으로 일기장의 레이아웃을 검토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민아의 관심은 증폭됩니다. 이 교환일기장의 주인중 한 명은 그냥 아무개가 아니라 자기반 학생이거든요. 그것도 과묵하고 쿨하며 은근히 시선을 끄는 아이 말이에요.

그 순간 시은이 들어옵니다. 민아는 허겁지겁 자세를 바꿉니다.

자리에 앉은 시은은 효신이 보낸 생일선물을 발견합니다. 시은의 짝은 선물을 열어보라고 부추기지만 시은은 애써 무시하려 합니다.

그러는 동안 지원은 민아가 보는 일기를 발견해서 빼앗습니다. 민아는 지원에게서 다시 일기를 빼앗고 그러는 동안 민아반 담임이 들어옵니다.

듀나 소동이 일어나는 동안 일기장이 펼쳐지고 여기서 갑자기 영화의 시간대가 과거로 바뀝니다. 이치를 따진다면 맨 앞페이지여야 할 것 같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하긴 이 이야기가 꼭 일어난 순서대로 기록되었다고 믿을 필요도 없고 꼭 열린 페이지에 나오는 이야기만 회상된다면 그것도 어색하지 않겠어요?

영화는 동복과 하복을 시간대를 구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초여름인 현재의 아이들은 모두 하복을 입고 있지만 이 시간대의 효신과 시은은 동복을 입고 있습니다. 아마 이들이 이 학교에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아서일 거예요. 효신은 아직 아이들에게 따돌림당하기 전일 거고요. 분명한 날짜는 나와있지 않지만 우린 전후관계를 통해 대충 이들의 이야기를 연대기 순으로 재배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얘들은 아무래도 조회시간 땡땡이를 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효신이 숨어있는 화장실에 시은이 들어가고 둘은 함께 숨어있다가 무식하게 여자 화장실에 침입해온 남자 교사에게 발각되죠.

쓸데없는 로맨틱한 장식은 없지만 아주 효과적인 '첫눈에 반한 사랑' 장면입니다. 규율위반의 흥분 속에서 갑작스럽게 맺어진 공범자들의 연대감 말이에요. 늘 남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만 싶었던 효신이 시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니겠어요?

파프리카 들통난 둘은 벌로 수영장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벽을 닦고 있는 효신에게 시은은 "너 계속 그렇게 벽 오래 쳐다보면 사람이 미친대."라고 말합니다. 나중에 민규동 감독은 이런 시은의 미신적인 믿음을 통해 이 캐릭터가 스테레오타입화된 '부치'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걸 보여주려도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오히려 효신보다 훨씬 여성적이고 여자고등학교의 문화에 더 깊이 연결되어 있는 아이라고요. 하여간 밀대를 밀면서 수영장을 질주하는 시은은 드물게 밝군요.

한참 그런 시은을 바라보던 효신은 "너 눈부처가 뭔지 알아?"라고 묻습니다. 눈부처란 상대방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의 반영이지요. 이것도 상당히 적극적인 구애인데, 시은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요.

듀나 시은에게 다가간 효신은 교환일기를 쓰자고 제안합니다. 이건 사귀자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어요.

슬슬 교환일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이것은 말 그대로 두 사람 이상이 공유하며 쓰는 일기의 한 형태입니다.

영화가 개봉된 뒤, 저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이 일기 형태의 역사를 조사해본 적 있지요. 우리의 추측에 따르면 교환일기의 기원은 마르탱 뒤 가르가 쓴 [티보가 사람들] 제1편인 [회색 노트]입니다. 그것이 아마 20세기 초엽이나 중엽에 동북 아시아로 건너가서 감수성 예민한 '문학소녀들'의 유행이 된 것이지요. 우리만의 유행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일본에서 이 형태가 상당한 인기를 끈 건 분명하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이 형태가 가장 인기를 끌었던 건 6,70년대였습니다. 당시 인기였던 전혜린이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교환일기에 대한 추억을 언급했던 게 시작이었던 모양이에요. 이 유행은 1980년대에 잠시 사라졌다가 90년대에 다시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어쩌다보니 현대 여자 고등학생들의 삶을 인류학적으로 접근하려고 시도하던 감독들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죠.

파프리카 그런데 효신과 시은의 교환일기치고는 시은의 목소리가 너무 적지 않나요? 여기서 우리가 영화를 통해 읽을 수 있는 건 효신의 목소리뿐입니다.

듀나 예술적 재능이 있는 건 효신이고 그런 효신을 묵묵하게 따르는 건 시은이니까요. 시은은 공동작가라기보다는 독자에게 가깝죠. 효신은 친구 한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종자기(鍾子期)에게 백아(伯牙)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종자기가 백아를 이해한 것만큼 시은이 효신을 이해한 것 같지는 않지만요.

파프리카 시은의 승낙을 받아낸 효신은 시은처럼 "와~~~!!"하고 고함을 지르며 수영장을 질주합니다. 마치 시은에게 어느 정도 남아있던 밝음을 살짝 훔쳐온 것 같아요. 효신의 이 망가진 행동은 깜찍한 코다같습니다.

듀나 회상 장면 계속. 효신과 시은은 학교 옥상에서 놀고 있습니다. 핸드 헬드 카메라로 가볍게 찍은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하고 서정적인 부분입니다. 시스템과 집단의 눈길에서 벗어난 이 작은 천국은 두 사람이 언제나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지향점이기도 합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메인 테마]가 흐르는 동안 이 영화의 음악에 대해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군요. 이 영화의 음악은 당시 상당한 시도였습니다. 영화에 사용된 거의 모든 음악들이 조성우의 오리지널 스코어였지요.

파프리카 음악 시간에 나오는 [임이 오시는지]와 김상헌 교수가 작곡한 [키리에 엘레이손]을 잊어서는 안돼요.

듀나 [키리에 엘레이손]도 영화를 위해 작곡된 오리지널 곡이지요. 하여간 이 OST 앨범은 영화처럼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렇다고 결코 상업적으로 성공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장 잘 알려진 음악인 [메인 테마]는 요새도 광고와 같은 데 자주 쓰이더라고요.

파프리카 효신은 "넌 잘 안 들리고 난 가끔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라고 말합니다. 시은이 무슨 소리냐고 묻자 효신은 "널 처음 봤을 때 굉장히 큰 종소리를 들었어"라고 덧붙여요.

듀나 굉장히 닭살돋는 농담이지요. :-) 그런데 이 상황은 로맨스 기하학의 요철과 같기도 해요. 한쪽은 모자라고 한쪽은 넘치고. 청각이라는 감각 기관의 '이상'은 두 사람의 고립된 상태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파프리카 시은의 청각 이상이 영화에 언급된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일 가능성도 있지요? 삭제된 장면에서 민아는 시은의 병에 대해 전화로 문의하다 시은의 청각 이상이 뇌종양과 같은 큰 병의 증상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듀나 시은이 육상을 선택한 것도 중학교 때 자살한 네 친구들 중 한 명이 죽기 전에 시은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 아이가 육상선수였기 때문이지요. 시은은 나중에 민아에게 효신이 자기를 그 때문에 좋아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내가 친구의 죽음을 견뎌낼 수 있는 애라고 생각한 거 같아"라고요. 이 역시 모두 다 삭제된 장면들과 이전 각본에 나와있답니다...

파프리카 재미있는 설정이지만 최종 편집본에 들어갔다면 너무 장황해졌을 거예요. 참, 그 삭제 장면에 나오는 자살한 중학생 이야기는 98년 청량리에서 여자 중학생 네 명이 동반자살한 사건에서 따온 것이겠지요? 거기서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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