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쿼터제를 수호하기 위해 머리 깎고 싸우려면 대충 다음과 같은 '불신의 골짜기'를 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운동이라고 할 수 없죠. 어떻게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생각을 따르는 것이 건전한 일일 수 있습니까?

가장 넓은 부분부터 시작합시다. 우선 우리는 우리의 문화 산업이 과연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부터 따지고 넘어가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헛소동에 불과하죠. 가치없는 것에 목을 메고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전 이런 주장이 어떤 식으로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이런 식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파하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건 이 생각이 틀렸거나 (그렇기를 바랍니다) 생각이 너무 심오해서 제가 그 근거를 감히 상상도 못하는 것이겠죠.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 모든 가능성을 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건 여러분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쉽게 도약할 수 있습니다. 애국심 따위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문화적 다양성의 보존은 상식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유지해야 한다'와 '파괴되어도 좋다'가 싸우고 우리가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른다면 '유지' 쪽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문화가 무슨 핵폭탄도 아니니까요.

다음 단계는 '영화 산업 보호책이 없으면 우리 영화 산업이 무너지는가'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앞의 경우보다 훨씬 많은 토론과 생각들이 있습니다. 아무 온라인 토론장에나 가도 스크린 쿼터제에 대한 논쟁은 많습니다. 한 쪽에서는 보호 정책을 없애면 오히려 영화의 경쟁력이 늘어날 것이라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간신히 버티고 있는 보호정책이 없으면 그나마 버티고 있는 산업구조마저 붕괴될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미안하지만 우린 모릅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 자신의 미래라면 더욱 더 그렇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근거를 대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도 없다면 그 생각은 존재 가치도 없지요. 논리적 근거는 생각의 기초일 뿐 그 생각이 옳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만.

쿼터제 지지자들은 대자본을 쏟아 부은 헐리웃 영화와 한국 영화가 일대일로 경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제작비만 따진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문화 상품은 그 나라 안에서는 '자국 영화'라는 이점도 얻습니다. 이 둘이 충분히 상쇄할까요? 전 모릅니다.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덧셈 뺄셈처럼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재보고 끝나면 되는 거죠. 그게 안되니까 서로를 설득 못시키고 툭탁툭탁 싸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냥 충분히 상쇄하더라도 그냥 보호 정책을 유지하는 쪽이 나은 것 같지만 (앞 날을 누가 압니까?) 또 그런 보호 정책이 장기적으로 유해하다는 것을 증명할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는 한 전 보호 정책 쪽에 붙겠습니다. 그러나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만큼 강한 근거는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상하게 논쟁 구석으로 밀려나 있지요. 그것은 "스크린 쿼터제가 과연 훌륭한 영화 산업 보호 정책인가?"입니다.

사람들이 삭발하고 쿼터제를 사수하려는 것은 스크린 쿼터제가 그 자체로서 가치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국내 영화 산업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쿼터제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면 쿼터제가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는지부터 증명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제가 읽은 쿼터제 옹호론들은 대부분 보호정책 옹호론입니다. 이 논리에서 스크린 쿼터제가 옹호되는 이유는 우리 영화가 보호 정책이 필요하고 스크린 쿼터제가 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왜 이 항공기를 구입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항공기가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크린 쿼터제라는 특정 '항공기'가 옹호되려면 이 정책이 가능한 다른 정책들보다 낫다는 근거부터 대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다른 가능한 정책들이 어떤 게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고 지지하는 정책이 그 정책들보다 낫다는 걸 증명해야 합니다.

복거일은 언젠가 정부가 국산 영화 상영 시간을 사들이는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한 적 있습니다. 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다른 가능한 정책이 있다는 증거는 되지요. 얼마 전 정부에서는 일본식 쿼터제를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그게 기존 쿼터제보다 이로운 게 뭐가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역시 고려해봐야 할 것들이죠.

스크린 쿼터제가 그대로 고수될 수 있다면 좋을 겁니다. 기존 정책을 그대로 쓴다면 시간과 돈이 절약되지요. 하지만 과연 이 정책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유지되어야 한다'와 '유지될 수 있다'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만약 '유지될 수 있다'가 근거 없다면 우린 안전하지 못한 비행기를 타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미국의 압력이나 정부의 '배반'을 어떤 부도덕한 힘으로 보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그것은 바람이나 번개와 같이 비행기가 마땅히 견뎌야 할 자연의 힘입니다. 번개가 꽝꽝 비행기를 때리는데 '우리 비행기는 추락해선 안돼!'라고 떠들어댄다고 해서 비행기가 안 추락합니까? 비행기는 그런 번개에 버틸만큼 단단하게 만들어졌을 때 살아남습니다. 약한 비행기는 망가집니다.

우리는 종종 당위에 눌려 현실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의 직배 저지 운동이 그랬습니다. 씨네21에서는 그때보다 지금 스크린 쿼터제 사수 운동이 발전했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발전한 것은 지지하는 생각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 뿐입니다. 그게 발전한 거라면 그건 발전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당성이 있다고 해서 세상이 봐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던가요? 직배 저지 운동이 근거가 부족해서 끝났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지하는 정책의 가능성과 한계를 알고 그것을 이용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의 로맨티시즘과 애국심에서 떨어져서 실익을 검토할 수 있는 차가운 두뇌가 필요합니다.

그 두뇌가 스크린 쿼터 지지가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며 충분한 근거를 댄다면 저는 쿼터제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여문 주장을 끌어낼만큼 야무진 토론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냥 기다리는 편이 낫겠어요. (9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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