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 

여기서 영화는 시골길을 달리는 차 안으로 옮겨갑니다. 예쁜 시골 풍경이 이병우가 작곡한 왈츠 풍의 예쁜 기타 독주와 함께 흘러가고 있어요.

그런데 이 전환은 회상일까요? 물론 회상이겠지요. 하지만 이 장면전환은 다른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어요. 회상이 아니라 앞에서 묘사된 병원의 입원 기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게 해석하면 이 이야기는 정말 암담합니다. 수미는 똑같은 일들을 쳇바퀴 속의 다람쥐처럼 계속 반복해서 겪고 있다는 거니까요.

파프리카 이 장면의 시점을 주목해주세요. 차 안의 장면은 모두 오른쪽 뒷좌석에 앉은 사람의 시점에 맞추어져 있어요.

김갑수가 연기한 아버지 무현이 운전석에서 내립니다. 무현이 "안내려?"라고 묻는 동안에도 뒷좌석에 탄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요.

드디어 수미가 등장합니다. 차분하고 안정된 표정으로요. 물론 내리는 문은 오른쪽 뒷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미의 시점으로 보고 있었던 거죠. 이 장면은 우리가 보는 영화가 얼마나 주관적인 시점에서 전개되는가를 암시하는 중요한 힌트 중 하나입니다.

문근영이 연기한 수연이 언니를 따라 내렸습니다. 졸린 눈을 꼭 감고 머리를 잘래잘래 흔드는 모습이 너무 귀엽네요.

듀나 귀엽기도 하지만 상당히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죠. 이 영화에서는 세 여자 주인공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들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이 영화가 다중 인격과 환상을 다루는 작품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지죠. 여자 주인공들이 깨어나는 장면은 지금까지 무대 밖에 있었던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우는 수미가 지금까지 죽어있던 동생을 불러낸 것이죠.

드디어 무대가 되는 집이 등장했습니다. 반은 일본식이고 반은 서구풍인 하이브리드 저택이지요. 논리적으로 이 선택은 맞습니다. 이런 영화의 고딕 분위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비교적 오래된 건축물이 필요해요. 그 건축물은 자기만의 역사적 스타일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서구식이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집이 자신만의 존재감을 획득할 수 있고 영화는 액션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지요. 여기서 반쯤 일본식인 서구식 저택은 그럴싸한 선택입니다. 한 7,80년전 쯤인 일제 시대에 지어졌다고 우기면 되니까요. 우리나라 건축사에서는 이런 식으로 분명한 두 문화적 스타일이 노골적으로 충돌하는 시대가 없었지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들은 대부분 그냥 온돌방이 달린 무개성적인 서구식 건물이잖아요. 영화 속의 집에서처럼 매서운 느낌도 덜 주고요.

파프리카 집 안에서 누군가가 수연을 바라보고 있네요. 도대체 누구일까요? 무현?

듀나 무현일 리가 있나요. 그 사람은 수연을 못보잖아요.

파프리카 그럼 은주? 그럼 이야기가 이상해지잖아요. 수미가 안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은주는 집 안에 존재할 수 없는데.

듀나 이것 역시 조금 넓게 해석해보면 어때요? 집을 바라보는 동안 수미는 자기가 만든 은주를 집에 넣은 거라고요.

더 음산한 해석도 있어요. 이 집엔 정말로 수연과 엄마의 귀신이 있어요. 그렇다면 수연을 바라보는 이 시점은 진짜 수연이거나 엄마의 것일 수도 있어요. 이 시점이 수연의 것이라면 정말 재미있지 않겠어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테니까 말이에요.

파프리카 귀신들은 수미의 환상도 볼 수 있는 걸까요?

수연이가 꽈리를 먹고 있어요. 이 장면에서도 문근영이 짓는 "아이셔!"하는 표정은 정말 귀엽지요. 이 배우는 장면마다 '귀여운' 연기를 하는 부분들이 하나 정도 있어요.

이 역시 하나의 힌트로 먹히지 않을까요? 물론 죽은 수연이 정말 귀여운 아이였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죽은 동생의 귀여운 옛 모습을 회상하는 언니의 시점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방법도 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에필로그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듀나 수미는 그런 수연을 바라보고 미소짓고 있어요. 네, 이 장면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겠군요.

수미는 집과 그네, 위층 발코니를 바라보다 (이것들은 모두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죠) 돌아서서 수연을 부릅니다. 수연은 손을 내밀고 언니에게 달려가요. 이 장면은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온 두 자매가 느끼는 즐거움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다시 보면 재회의 기쁨을 표현한 것처럼 보여요. 물론 수미는 수연이 죽었다는 걸 벌써 잊고 있겠지만, 잊혀진 사실과는 상관없이 지금까지 느꼈던 외로움과 다시 동생을 만났을 때 느끼는 기쁨이 남아있는 거예요. 제 생각일지는 몰라도, 이런 애정표현은 몇 시간 동안 같은 차 안에 앉아있던 동생에게 할 만한 건 아니죠.

파프리카 수미와 수연은 저수지로 달려갑니다. 하늘엔 정말 가짜같을 정도로 깨끗한 구름이 떠 있고요. 두 소녀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어요. 엄청 차가웠을 거예요. 춥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슬쩍 보기만 해도 어쩔 수 없는 가을 풍경이잖아요.

듀나 아, 이 아이들의 첫번째 맨발과 맨다리가 드러나는 장면이지요. 이 영화에서 김지운은 페티시즘에 대한 지적을 잔뜩 받았습니다. 하긴 영화 전체를 통해 주인공 아이들의 맨 다리와 발을 어루만지고 있었으니 그 소리를 안 들으면 이상하죠.

물론 김지운에겐 분명히 자기변명의 논리가 있어요. 공포영화와 섹슈얼리티 어쩌고 하는 거요. 맞는 말이긴 해요. 둘은 쉽게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죠. 그에겐 예술적인 변명도 있어요. 아이들의 벗은 다리와 맨발은 옷으로 꽁꽁 무장한 어른들에 대비되어 무력하고 보호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주니까요. 이건 영화의 내용과 분명히 맞았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영화를 통해 끝도 없이 수미와 수연의 발과 다리를 어루만졌다는 사실 자체가 바뀌지는 않아요! 논리가 어떻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페티시즘의 손톱자국이 가득해요.

저보고 말하라면, 영화 속에 녹아 있는 이런 페티시즘적인 성격을 부인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거예요. 도대체 왜요? 결과가 좋잖아요. 김지운은 아무렇게나 맨다리와 맨발을 집어던진 게 아니에요. 분명한 논리가 서 있었고, 드라마 속에서 효과적이었으며, 예뻤어요.

결정적으로 페티시즘과 변태성이 뭐 그렇게 숨겨야 할 일인가요? 오히려 예술가들에겐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제공해주기도 하잖아요. 전 페데리코 펠리니가 여자 젖가슴에 집착했다고 뭐랄 생각도 없고 루이스 브뉴엘이 발과 구두에 집착한 페티시스트라고 해서 흠잡을 생각도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선 감추는 게 더 위태로워요. 부정직성은 곧 시점의 음란화와 연결되니 말이에요. 보고 싶으면 그냥 보란 말이에요.

파프리카 수미가 수연의 손금을 봐주고 있습니다. (꼭 스포츠 중계 하는 것 같군요)이 장면도 동생 운명의 불길함을 암시하는 상징이라는군요. 네, 또 상징이에요! 영화에 가득한 상징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한 번 이야기하기로 하겠어요. 지금은 시간이 없네요. 물 속에서 찍은 다리 장면이 막 나왔거든요.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 다리가 모두 찍혔다고 하는데, 제 눈엔 한 쌍밖에 안 보이네요. 다시 돌려봐요. 분명 한 사람 다리뿐이지요? 위치로 계산하면 수미 다리입니다.

듀나 네, 제 눈에도 수미 다리밖에 안보여요. 오디오 코멘터리를 들어보세요. 임수정도 한 사람 다리밖에 안보인다고 하네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5 스크린 쿼터제 옹호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 [1] DJUNA 2010.02.22 2119
64 시네 스노비즘 [3] DJUNA 2010.02.22 3013
63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1. 프롤로그) [1] DJUNA 2010.03.06 3913
62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2. 등교) [7] DJUNA 2010.03.06 3265
61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3. 오전수업) [1] DJUNA 2010.03.06 2965
60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4. 점심시간 - 신체검사) [1] DJUNA 2010.03.06 3025
59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5. 오후자습) [1] DJUNA 2010.03.06 2712
58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6. 야간자율학습) [37] DJUNA 2010.03.06 5430
57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7. 하교) [1] DJUNA 2010.03.06 3138
56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1. 이 사람, 누구지?) [1] DJUNA 2010.03.06 3250
»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2. 수미, 수연) [1] DJUNA 2010.03.06 3569
54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3. 너희들 왔구나!) [1] DJUNA 2010.03.06 2584
53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4. 첫 날인데 그만하자.) [1] DJUNA 2010.03.06 2523
52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5. 그 여자도, 이 집도) [2] DJUNA 2010.03.06 2976
51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6. 악몽) [6] DJUNA 2010.03.06 3474
50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7. 그 여자가 그런 거야?) [1] DJUNA 2010.03.06 2477
49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8. 변하는 게 있어?) [1] DJUNA 2010.03.06 2364
XE Login